춘추-전국의 전환기에서 냉전 이후 시대 힌트를 찾을수도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열국지를 삼국지하고 비슷해 보여서 읽어보기로 했다가는 5분의 1을 읽기도 전에 손에서 내려놓게 마련이다.

지겨워서다. 이건 무슨 반란 일으키는 매뉴얼이냐라는 푸념이 나올 수도 있다.
 
패악무도해서 쫓겨난 임금도 있지만, 변방 근무 교대 날짜를 안 지켜줬다고 화가 나서 임금을 시해한 군인들도 있다. (춘추5패의 첫 번째 제환공의 아버지가 이렇게 죽었다.)
 
하지만 이것은 워낙 기나긴 역사에서 여러 나라의 특이한 사건들만 모아서 읽다보니 생기는 착시현상일 것이다.
 
두 역사소설의 분량은 비슷하다.
 
그러나 배경으로 하는 시간의 길이가 너무나 다르다. 열국지는 춘추전국시대 500년 전체를 배경으로 한다. 삼국지는 180년부터 280년까지 100년, 그중에서도 제갈양이 사망한 234년까지 50여년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 춘추시대 진(晉)나라와 초나라가 정면 대결을 벌인 성복전투. 진은 이 전투에서 승리한 이래 춘추시대 내내 패권국가의 위상을 지켰다.
삼국지가 유비 관우 장비 제갈양 등 몇몇 주인공의 애환을 깊게 터치했다면 열국지는 역사기록물처럼 무수한 사람이 누가 주인공이라 할 것도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열국지를 읽었다면서 ‘관포지교’ 얘기를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이들은 전체 5권중 1권 끝부분에 해당하는 여기까지만 읽었을 수도 있다. 그나마 잘 알려진 관중과 포숙 덕택에 계속 읽어 내려갔지만, 이들의 시대가 저물고 나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반란 이야기를 더 이상 읽어 내려갈 흥미를 잃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열국지를 읽는 방법을 하나 추천하자면, 굳이 1권 첫 페이지부터 매달리지 말고 중간중간 마치 매회 에피소드가 따로 있는 드라마를 보듯 관심 있는 부분만 읽어가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전체 5권중 3권 중반 이후(구용 열국지 기준)와 4권을 추천한다. 특히 오늘날 국제 정세와 비교해 보려는 분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이다.
 
이 때는 진(晉)나라와 초나라 두 슈퍼파워가 냉전에서 탈피해 공존을 모색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 시기다. 중원의 오랜 위협요인 초나라를 왕도로 길들이려는 진나라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 듯한 장면이다.
 
하지만, 초나라의 탈오랑캐, 중원 동화가 결과적으로 진(晉)나라 멸망의 근본 원인이 됐다. 진이 사라졌다고 해서 초나라가 그 자리로 진격해 들어간 것도 아니다. 순해진 초는 여전히 양쯔강 일대의 자기 자리를 지켰을 뿐이고 진이 있던 땅에는 한, 위, 조 세 나라가 생기면서 전국시대로 넘어갔다.
 
초나라 위협은 사실상 사라졌지만 전국시대 중원의 열국들은 더 무시무시한 위협 속에 살다가 하나씩 망해갔다. 서쪽에서 쳐들어온 또 다른 진(秦)나라 때문이다.
 
원래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패권이 살아있을 때, 진(秦)은 충실한 왕도 정치 동반자였다.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가장 많이 원군으로 등장해 진(晉)을 돕고 주나라 왕실을 든든히 받쳐 준 말 그대로 ‘순한 맛’의 서쪽 오랑캐였다. (秦은 원래 정식 제후로 인정을 못 받다가 주나라가 견융족 침략으로 도읍을 낙양으로 옮길 때 공을 세워 그때부터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그랬던 진(秦)인데, 이들을 서쪽에 머물도록 묶어놨던 진(晉)이 사라지면서 수 백년 잠재했던 동진(東進)의 본능이 발현되고야 말았다. 그래서 마침내 진시황제의 천하통일을 이룬 것이다.
 
▲ 진시황제의 초상.
다시 진(晉)과 초가 대치하던 춘추시대로 돌아가 보면, 이 시대는 마치 1950~1980년대의 미-소 냉전시기와 흡사하다. 공산주의 위협에 미국을 중심으로 서방진영이 결속하는 모습처럼, 초나라 위협에 직면한 중원 나라들은 아직 명맥이 남아있는 주나라 왕실을 존중하는 것을 단합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들의 맹주가 주나라 왕실과 같은 희(姬)씨 친척인 진(晉)나라 인데, 춘추5패의 두 번째 진문공 이래로 진(晉)은 미국과 같은 위상을 지켜왔다.
 
냉전시대 미국에게는 비록 공산국가라 하더라도 상당히 든든한 우방 같은 역할을 한 나라가 있다. 바로 중국이다. 마오쩌뚱이 1976년 사망하고 실용주의로 접어든 중국은 미-소의 대립에서 줄곧 미국과 같은 블록에 섰다. 1984년 LA 올림픽에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 북한, 쿠바가 일제히 불참했는데도 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참가해 금메달 순위 4등을 한 장면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냉전시대 미국이 소련의 절반도 안되는 재래식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에는 중국의 독특한 노선이 크게 도움을 줬다.
 
춘추시대의 주요 고비마다 진(晉)과 진(秦)이 동반자로 중원의 정세를 풀어나가는 모습과 많이 흡사하다.
 
1991년 소련 해체, 동유럽 공산국가의 몰락은 이제 미국을 유일 강대국으로 남겨놓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실현을 예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군사 수요가 사라진 미국 경제의 방향상실부터 다가왔다. 확실한 공동의 적이 사라진 이후에는 미국이 군사작전에 동맹국 군대를 동원하는 일도 어려워지고 있다.
 
초나라 위협을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 중원 나라들은, 앞으로도 시도 때도 없는 진(晉)나라의 다국적군 소집에 순응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그래도 전대미문의 병차 4000승, 40만 군대 열병식으로 제나라 임금을 강제로 동맹에 가입시키는 저력을 보여주기는 했다. 그로부터 얼마 안지나 진나라는 세 나라로 갈라졌다.
 
진(晉)이 사라지고 중원이 전국시대의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동안, 서쪽의 진(秦)은 상앙의 법치주의라는 상대적으로 상당히 경직된 체제를 통해 급속도로 국력이 신장했다. 전국시대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앞선 400년 춘추시대 동안 중원 국가들이 진(秦)을 너무 믿었다가, 100년 동안 진에게 무너져간 시대라고 보면 되겠다.
 
냉전 때부터 국제 위상을 키운 중국은 이제 곧 경제력 면에서도 정상국가로 발돋움하는 날을 기다릴 정도가 됐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격화되면서 러시아가 옛날 소련의 모습으로 돌아갈 거라는 우려도 심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순화된’ 초나라의 위협이 과연 어디까지 중원을 뒤흔들 수 있을까.
 
서방의 러시아 제재에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중국이다. 러시아에 공감해서가 아니라, 이 정도로는 ‘메인 타겟’을 그쪽으로 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진시황제가 통일한 진나라는 비록 제후국으로서의 역사는 수백 년이지만, 통일 천자국가로서는 겨우 15년을 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중국의 영어 이름 차이나는 진(秦)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전국시대를 혼자 힘으로 종식시킨 진나라의 역사가 그만큼 의미심장하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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