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국, 중동의 역사에서 무수히 확인된 원칙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아랍의 영웅으로 유명한 살라딘은 십자군 국가의 왕 노릇을 하던 루시안을 포로로 잡았다.

루시안은 선왕인 볼드윈 4세처럼 용맹하지도 못하면서 무분별한 분쟁을 일으키다 잡힌 처지니 살라딘의 자비를 바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살라딘은 그에게 “훌륭한 왕 밑에서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뭐했나. 왕은 왕을 죽이지 않는 법이라고 한다”면서 그를 살려줬다.
 
루시안이 살라딘의 포로가 된 것은 영화 내용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다. 살라딘은 그를 포로로 잡은 상태에서 십자군의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 등장한 아랍영웅 살라딘의 모습.

왕이 왕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법칙은 한국 역사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927년 서라벌을 습격한 견훤은 신라의 경애왕을 처형했다. 천년 사직 신라왕을 포로로 잡아 죽일 당시는 견훤의 살벌한 위엄에 곧 후삼국이 통일될 듯 했지만 오래지 않아 신라 세력은 그에게 깊은 원한을 갖게 됐다. 
 
반대로 견훤의 라이벌 고려태조 왕건에게는 엄청난 반사이익이 됐다. 견훤의 학살극으로 신라 왕실의 권위가 완전히 추락해 왕건은 서라벌에 무혈입성하고 신라를 고려로 흡수하게 된다. 포석정 참극이 없었다면 왕건은 신라 왕실을 없애는 일에 대단히 조심스럽고 많은 세월을 보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공양왕을 죽인 것은 이 원칙에서 어긋나 보이기는 한다. 이성계는 고려왕을 죽일 경우 즉각적인 반란 세력의 결집을 근본 차단할 수 있는 한편으로 민심의 이반은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고려가 비록 1392년에 망했어도 1170년의 무신정권 집권, 1259년 이후의 원나라 복속기 등으로 정상적 국가 기능을 크게 상실해 무려 220년 동안 고려왕들이 신망을 잃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이성계의 판단으로 풀이된다.
 
‘왕을 죽이면 안된다’는 원칙은 중국사에서 더욱 뚜렷이 확인된다. 무수히 중원을 침략했던 이민족들 – 중화 용어로 소위 ‘오랑캐’라는 사람들 –의 변화 모습에서다.
 
중국의 천자는 주변 이민족들 관점에서는 무자비한 침략자인 동시에 너무나 잘 살아서 극도의 위화감을 심어주는 존재였다. 빈약한 유목민족의 힘으로는 중국 변경을 소란하게 할 수는 있어도 천자를 굴복시키기는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변경의 중국인 마을을 침략해 가난한 백성들을 약탈하지만 만약 천자의 황궁을 한번만이라도 털 수 있다면 손에 넣을 수 있는 재물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더구나 그는 조상 대대의 원수가 아닌가. 그를 붙잡아 목을 잘라 조상의 영전에 제를 올리는 것은 자손으로서 최대의 사명인 것이다.
 
그래서 4세기까지는 어쩌다가 한번 중국 임금이 이민족에게 붙잡히는 날에는 산적이 동네 부잣집을 덮친 것과 같은 참상이 벌어졌었다.
 
미녀 포사에게 푹 빠졌다가 나라를 망친 주나라 유왕은 춘추시대가 도래하게 만든 원인제공자로 비난받는다. 그는 견융족의 공격을 받고 포로로 잡혀 죽었다고 한다. 기원전 770년 무렵의 일이다.
 
이보다 더 분명한 사례가 역사책에 기록된 건 서기 311년이다. 다섯 부족의 오랑캐가 중원을 침략해 열여섯 나라가 난무했다는 5호16국 시대의 출발점이다.
 
흉노족의 유연이 한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그 아들 유총이 진나라 수도 낙양을 함락시켰다. 진나라 회제는 포로가 돼서 한의 수도 평양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회제의 뒤를 이은 민제도 또다시 한의 포로가 됐다. 유총은 민제에게 천인의 옷을 입혀 술시중을 들게 한 후 죽였다.
 
삼국지 최후의 승자는 유비도 조조도 아닌 사마의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자손인 회제 민제의 비참한 최후를 볼 때 과연 사마의를 최후의 승자라고 할 수 있을까. 유비 조조의 자손들이 권좌에서 물러날 때와는 비교조차 힘든 참상이었다.
 
이후의 중국 황제들은 ‘오랑캐’에 대해 더욱 극도의 경각심을 갖게 됐다.
 
 
이민족들도 '왕을 죽이면 안된다'는 법칙을 배우기 시작
 
침략이란 것도 아주 크게 보면 상이한 두 개의 문명이 접촉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다. 두 문명이 아직 소통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주로 전쟁의 형태로 첫 번째 접촉이 벌어진다. 갈등의 시기가 일정하게 지나고 나면 사람들은 싸우기보다 서로 얘기가 통하는 법을 모색하게 된다. 문물이나 풍습의 교환을 통해 서로가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민족들이 직접 중원에 들어와 나라를 세우고 국정을 하다보니 이들은 차츰 왜 중국황제들이 그렇게 ‘재수없게’ 굴었는가를 이해하게 됐다. 중국 임금들처럼 역사와 시문을 존중하는 법도 배우기 시작했다.
 
이민족들은 왕이 왕을 죽이면 안된다는 법칙도 배우게 됐다. 그동안 5호는 다시 북방으로 몰려났고 중원은 당 송의 한족국가가 들어섰다가 몽고의 원나라, 다시 한족의 명나라가 등장했다.
 
1449년 중국은 명나라의 영종이 통치하고 있었다. 몽고의 오이라트족을 정벌하기 위해 그는 5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친정에 나섰다.
 
그러나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그는 오이라트족의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1130여년 만에 또다시 중국 천자가 ‘오랑캐’ 제단의 희생양이 될 위기에 몰렸다.
 
▲ 명나라 영종은 1449년 50만대군을 이끌고 몽고의 오이라트 원정에 나섰다가 포로로 붙잡히는 신세가 됐다. 오이라트는 그를 포로로 구금했다가 명나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15세기의 오이라트는 4세기의 5호와는 크게 달랐다. 영종을 죽인들, 여전한 강대국 명나라를 격분시키기만 할 뿐 얻는 것은 시신 한 구 뿐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오이라트는 영종을 명나라와의 협상수단으로 활용했다.
 
명나라에서 영종의 동생 대종이 즉위해 “우리 형님을 죽이든 살리든 너희들 마음. 그러나 잘 보살펴주면 고맙지”라는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에 영종을 내세운 오이라트의 외교는 별 소득을 얻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영종을 죽이기로 한 것이 아니라 더욱 ‘오랑캐답지 않은’ 선택을 했다. 영종을 그대로 명나라로 돌려보낸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이민족 특유의 ‘순수함’을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중원스런 ‘교활함’일 수도 있다. 그 후 사태의 전개를 보면 더욱 그렇다.
 
명나라로 돌아온 영종은 동생인 대종이 제위를 돌려주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이 가득한 세월을 보내다 대종이 중병에 걸린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켜서 임금 자리를 되찾고 말았다. 오이라트 입장에서는 영종을 살려 보냄으로써 명나라에 대혼란을 일으켜 명의 국력을 더욱 약화시키는 성과를 거둔 셈이다.
 
1644년 여진족의 청나라는 불세출의 명장 도르곤의 지휘하에 북경에 입성했다. 청의 세조 순치제는 276년만에 이민족 출신 중국 천자가 됐다.
 
청군이 입성하기 직전, 명나라 황제 숭정제는 이자성 반군에 몰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청나라 군대는 숭정제의 위패를 모시고 북경에 들어와 이자성 군대를 물리쳤다. 만주인들은 숭정제의 장례식도 엄숙하게 치렀다.
 
 
왕을 죽이는 건 그를 선택했던 국민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
 
오늘날의 대통령이나 봉건시대의 임금은 선출 방식은 달라도 본질은 똑같다. 그 나라 민심을 가장 잘 대표하는 자연인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어제의 적국이지만 그 임금은 오늘 내가 통치해야 될 국민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다. 그런 사람을 죽인다는 건 오늘 내가 다스려야 할 국민을 적으로 돌리는 짓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 아들 조비가 한나라 헌제의 선위를 받고는 그를 죽인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헌제는 사실 산양공으로 물러나 조비보다도 훨씬 나중에 죽었다고 한다.
 
헌제 시해설은 유비가 자신에게 정통성이 넘어왔음을 강조하기 위해 더욱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 조비는 시문에 능해 아버지인 조조와 동생 조식과 함께 건안7자에도 포함되는 사람이다. 이런 학식을 갖춘 사람이 역사적으로 무수히 입증된 ‘왕을 죽이지 않는다’는 교훈을 어겼을 까닭이 있을까.
 
미군이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을 사형시키고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하면 중동의 분란은 거의 사라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었다. 후세인이 처형된 지 8년이 돼가는 오늘날 중동은 알카에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국가의 약진으로 앞날이 극히 불투명하다. 북아프리카 지역에는 보코하람이라는 또 다른 무장세력의 기세도 심상치않다.
 
설령 미국과 유럽군대가 이슬람국가를 섬멸한다고 해도 갈등이 사라진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지역 민중들의 가슴에 2000년 묵은 원한을 남겨놓고는 ‘왕을 죽이는’ 방식이 아무런 해결을 줄 수 없다. 갈등의 악연만 더욱 깊게 만들 뿐이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