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년을 뛰어넘어 생생히 전하는 한중록의 섬뜩한 기록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왕위계승 1순위자로 장구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2년 전에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나의 시간은 사라지고 말지도 모른다.”

듣기에 따라 “우리 어머니 왜 여태 안 돌아가시냐”는 패륜의 소리가 될 수도 있다. 만약 한국이나 중국 왕조의 태자 또는 세자였다면 그는 바로 모반죄로 폐세자 및 극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물론, 찰스 왕세자는 “어머니 여왕이 나에게 양위해 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소리였다”고 변명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또한 모반죄로 극형에 해당할 것이다.

그는 이미 저군(儲君)으로만 60년을 넘겨 이 분야 기네스 기록을 세웠다. 정말 한국이나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오랜 세자 노릇이다.

영국의 민심은 그에 대해 몹시 사납다. 전부인 다이애나 왕세자빈을 핍박해 불행한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여겨 영국인들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찰스를 건너뛰고 왕세손 윌리엄 왕자에게 바로 왕관을 물려줄 것을 선호한다.

만약 찰스 왕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은 상태였다면 지난 9월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의 결과가 전혀 달라졌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그가 왕이 되면 영국연방이 해체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그가 만약 조선시대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한중록을 읽어본다면, 생활 자세에 상당한 변화가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1762년 윤5월 13일, 창덕궁 일대에 처절한 기운이 천지를 짓누르던 그날의 정황이 252년이 지나도 여전히 글 속에 살아 오늘에 전하고 있다.

 

▲ 지난 2005년 경기도 수원 화성행궁에서 재현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가례 모습./사진=뉴시스


250년이 지나도 섬뜩함이 여전한 그날의 기록

요즘은 소위 ‘음모론’이라는 것이 유행이어서, 지금까지 전해져 온 역사적 평론이 뒷전으로 밀리는 경향도 있다. 합리적 의심에 기초한 반론 제기 차원에서는 음모론이 기여하는 면도 크다.

그러나 음모론에는 일부 논객들의 지적인 허영도 섞이기 마련이다. 지나치게 남다른 관점, 튀는 논리에만 매달리면 역사적 전후 관계에서 어긋난 허황된 망상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혜경궁 홍씨가 권력욕에 사로잡혀 남편을 팔아먹은 사람으로 매도한다. 그녀의 친정인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에 적대적이었던 정황은 뚜렷이 보인다. 또 한중록의 문맥으로 봐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8일 동안 남편을 살리려고 애쓴 흔적이 전혀 없다. 남편이 갇힌 순간 그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촌철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포자기의 변명 뿐이다.

그러나 한중록 곳곳에서 혜경궁 홍씨는 남편이 없어 궁색해진 스스로 처지를 한탄하고 있다. 정치적 의도로 남편을 버린 여자라면 뒤늦은 뉘우침이라도 이렇게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서는 유서나 마찬가지가 된다. 한중록을 정치공작 서적으로 매도하는 사람들 주장과는 모순되는 얘기다.

또한 한 때 밝은 빛과 같던 남편의 당찬 기상과 밝은 결단 내리던 기억들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하늘이 하신 일이니 섧고 섧도다”는 한탄이 이어진다.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진작부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죽음 뿐만 아니라 죽고 난 후 아들인 정조가 먼저 죽은 형의 양자가 된다는 예상도 하고 있었다.

세자빈 홍씨가 임금이 세손을 아끼니 세자도 곧 다시 아끼지 않겠냐고 위로하자 사도세자는

“나는 폐하고 세손은 효장세자(사도세자의 요절한 이복형) 양자로 삼으면 어찌할까 본고”

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후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했다. 정조 즉위 후에도 혜경궁 홍씨가 대비가 되지 못한 건 이 때문이다.

영조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도세자를 ‘재수 없는 자식’으로 취급한 모양이다. 사형 처결과 같은 흉한 일을 마치면 내궁에 들어가기 전 동궁에 들러서 액을 씻고 가는 셈 쳤고 기쁜 일이 있던 날은 아끼는 옹주의 처소에 들렀다고 한다. 실록에선 절대 찾을 수 없는 며느리의 생생한 기록이다. 세자의 의대증 뿐만 아니라 부왕인 영조에게도 일종의 정신 질환이 엿보인다.

혹자는 이에 대해, 세자에게 갓난 아이 때부터 장희빈을 모시던 궁인들을 붙인 때문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한때 중전 모시던 궁인들의 콧대가 드높아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마저 업신여기니 생모가 갓난 아들 찾아가기가 불편해 정서불안을 초래했다는 거다. 부왕인 영조에게도 편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영조는 즉위 때부터 장희빈 소생인 경종을 시해했다는 의혹에 시달려 왔다.

나날이 사나워지는 부자지간에 가끔씩은 마음을 터놓는 대화도 있었다.

▲ 영조대왕 어진. 그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이는 전대미문의 비극을 일으켰지만 조선 중흥군주였던 그의 치세에 정치는 안정되고 민간에선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지식인들은 활기찬 실학운동을 일으켰다. /사진=뉴시스

“어찌하여 그리한다?”
“서럽고 상하여 그리 하여이다.”
“어찌하여 상한다?”
“사랑치 아니시기로 서럽고 꾸중하여 두려워 그리 하여이다.”

아들과 이런 대화를 나눈 영조는 며느리 혜경궁을 불러 “세자가 이리이리 얘기하니 그 말이 맞으냐”고 물어본다. 며느리 대답을 들은 영조는 “내 이제는 그리 안하리라”고 얘기한다.

너무나 기쁜 혜경궁이 이 말을 세자에게 전한 즉, 세자는

“자네는 사랑하는 며느리가 그 말을 곧이 믿는가. 필경에는 내가 죽고 마느니”란 무심하고도 섬뜩한 반응을 남겼다.

사도세자가 죽기 직전, 그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나경언의 흉서 사건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죽음을 초래한 직접 계기는 전혀 의의의 곳에 있었다.

바로 영빈 이씨(선희궁), 세자의 생모였다.

그 무렵 영빈의 생일날, 세자는 어머니를 위한 엄청난 잔치를 열었다. 식탁에는 온갖 음식과 과일이 수북이 쌓였고 뜰에는 기치와 무기를 갖춘 병사들이 기세등등하게 사열을 벌였다. 효심으로만 보기에는 예가 지나치다는 느낌도 남겼던 모양이다.

아들의 생신 축하를 받는 영빈의 얼굴에는 한시도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를 어찌 할꼬...”라는 한탄만 거듭했다. 나중에 동궁에서 무수한 병장기가 쏟아져 나와 세자의 죽음을 부추겼다는 사실은 병사들 사열을 바라보는 영빈의 근심을 설명해준다.

갈수록 꼬여가는 부자지간에, 정치적으로도 더 이상 세자의 설 자리가 없어진 상황에서 영빈은 마침내 영조를 찾아가 “(세자의) 병이라 하니 대처분을 내리시어 종묘와 세손을 보전하소서”라고 울면서 청했다. 세자의 ‘죄’가 세손(정조)까지 닿는 것을 막자는 피눈물의 결단이었다.

영빈이 다녀간 후 영조가 결단을 내려 동궁으로 행차를 했던 것이다. 이날 이후, 영빈은 새벽까지 뜬 눈으로 자신의 행동이 과연 옳았는지를 번민하는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임금이 동궁으로 행차한 날 혜경궁 홍씨의 묘사는 더욱 섬뜩하다.
 

1762년 윤5월 13일의 창덕궁

이날 전각 기둥에서 큰 소리가 나자 세자는 크게 놀라며 “이게 무슨 소리냐. 내가 죽는 모양이다”라고 외쳤다.

곧 이어, 부왕이 부른다는 분부를 접하자 세자는 감기를 핑계 대며 혜경궁에게 세손 휘항을 내달라고 졸랐다. 혜경궁이 자기 것이 있는데 어찌 아이 것을 쓰려하시오라고 묻자 세자는

“자네가 참으로 무섭고 흉한 사람이네. 내 이제 나가면 죽을 것을 꺼려서 세손 휘항 안주려는 심산을 알겠네” 라고 화를 내며 부왕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것이 이들 부부의 이별 장면이었다.

혜경궁이 사람을 시켜 기별을 알아보니 세자는 이미 용포를 벗어버리고 칼을 짚고 앉은 임금 앞에 엎드려 있었다는 것이다.

곧이어 “뒤주를 들이라”는 분부를 접하자 무엇에 쓰려는지 영문을 알 수 없지만 무서운 예감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영조의 호통에 세자는

“아바님 이리 마쇼셔. 이제부터 시키는대로 다 할 터이니 이리 마쇼셔”라고 애처롭게 울다가 끝내 부왕의 명을 거역하지 못했다. 뒤주에 들어가는 세자가 ‘전하’나 ‘아바마마’가 아닌 ‘아버님’으로 부른 점이 특이하다.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의 기록이니 ‘아버지’라 부른 것을 약간 고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관점에서 보면 혜경궁 홍씨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부왕과의 갈등, 또 오랜 대리청정으로 부왕 못지 않은 정치적 스트레스를 짊어진 세자는 갈수록 집안에서도 폭력적으로 변했다. 바둑판을 휘둘러 그녀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혜경궁의 남편에 대한 애착을 고갈시켜 갔는지도 모른다. 그녀 스스로의 기록에서도 뒤주에 들어간 순간부터 남편을 다시 살려보겠다는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도세자는 8일 뒤에 죽음이 확인됐다. 사도세자가 갇히는 순간 폐세자 처분이 내려져 혜경궁과 세손은 사가인 홍봉한의 집으로 옮겨가 후속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세자가 죽자마자, 영조는 곧 세자의 지위를 사후 회복시켜줬다. 사도세자는 이때 내린 시호다. (정조 즉위 후에는 장헌세자로 고쳐졌고 대한제국 수립 후엔 임금인 장조로 추존되기까지 한다.) 세손 책봉도 이뤄지고 혜경궁이라는 칭호가 내려져 홍씨는 다시 입궐했다. 세손을 보전하려던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바램이 이뤄진 것이다.

혜경궁 홍씨가 남편 사도세자를 바라보는 눈에는 두려움, 원망, 안타까움과 함께 좋았던 시절의 기억이 함께 담겨있다. 음모론만 강조하는 사람들의 얘기와는 다른 모습이다.

정조를 잉태하던 날, 세자가 기쁜 표정으로 용의 모습을 일필휘지로 그려가던 모습. 친정 동생이자 세자의 처남들이 대궐 관원과 시비가 붙었을 때, “네 이렇듯 성질이 급하여 훗날 어찌 나를 보호하겠느냐”며 웃으며 타이르던 대범한 모습. 이런 남편을 잃은 까닭으로 혜경궁은 아들이 임금이 돼서도 대비가 되지 못했다.

기막힌 사건의 한복판에 있던 혜경궁 홍씨가 운명을 받아들인 시각은 이렇다. 성군인 시아버지와 총명했던 남편이지만, 하늘이 내린 병으로 벌어진 일이니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것인가. “섧고 섧도다.”

서울 창경궁 맞은편 연건동 서울대학교 병원 입구에는 경모궁 터라는 작은 표지석이 있다. 경모궁이란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서 남편인 사도세자를 지칭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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