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과 정말 달라진 지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1997년 11월 21일, 나한테 심각한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국에서 두 번째 유학중일 때다. 착실하게 공부하던 첫 번째 유학 때와는 사람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마침 인터넷이란 것도 배워서 손이 가는 건 자꾸 한국 뉴스고 월요일까지 내야 하는 2주일 단위 숙제는 털끝도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내가 정말 애착을 가지고 서 있을 자리는 여기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기까지 반년 넘게 나는 스트레스를, 지도교수는 3만4000달러나 지원받고 아무런 기여도 안하는 한 녀석에 대한 인내심 발휘를 강요받는 상황이었다.

작으나마 위로가 됐던 건 학교 근처에서 산 CD 한 장이다. 1960년대 뉴포트 포크페스티벌의 노래를 모은 앨범이다. 칙칙한 대학원 기숙사 방에서 듣던 시절 생각나게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또 듣고 있다.

그런데 이날 내가 떠나온 고국에는 더 큰 시련이 닥쳐왔다.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1997년 IMF 위기가 시작된 날이다.
 

▲ 한국 사회에 노숙자가 대거 등장한 건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다. IMF에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살인적 고금리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갑자기 금리가 치솟으면서 서민들이 빚을 갚지 못해 노숙자 신세로 전락했다. IMF가 한국에 요구했던 고금리 처방이 과연 타당했는지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나는 스스로를 ‘IMF를 코앞에서 목격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IMF’의 당일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말이다. IMF 구제금융 신청은 이미 벌어진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던 상징적 사건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11월21일이든 22일이든, 이렇게 될 수밖에 없던 2년여의 과정을 나는 매일 지켜보고 정리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대단한 선지자나 돼서 “우리나라 이러다가 큰일 난다”고 외치고 다녔다는 건 아니다. 나 또한 무지한 다수의 하나로 전선이 무너지는 경보조차 내지 못한 보초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때 대수롭지 않게 지켜본 일들이 나라 망하는 과정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얘기다.

1995년 9월부터 1997년 6월까지 나는 산업은행의 외화자금실에서 국제금융시장을 관찰하고 일일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했다.

1995년 9월 입행 무렵 은행은 S&P로부터 AA- 등급을 얻은 일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이를 당시 정부의 세계화 정책, OECD 가입, 한국 경제의 위상강화가 가져온 결실로 여겼다.

그해 말엔, 한국 원화의 위상도 강화돼서 ‘곧 1달러당 300원 시대를 대비해야 된다’는 기업체 보고서도 나왔다. 세상 곳곳에 장밋빛이 가득해서 특히 그해 연말 결산 날 은행 건물 전체가 라스베가스 도박장같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은행의 연말결산은 매우 방대한 작업이다. 신년 연휴 전날인데도 결산 담당 직원들은 작업이 끝날 때까지 밤새워 매달려야 한다. 결산과 무관한 직원들은 이걸 미안하게 여겨서 퇴근을 미루고 야근하는 사람들 분위기를 띄워주는 일을 했다. 곳곳에서 모여앉아 포커판을 벌였는데 지금은 없어진 풍속도다. 굳이 카드를 안쳐도 11시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다가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나누고 하나 둘 씩 사라졌다.

‘1달러당 300원’에 역행하는 한마디는 원달러 데스크의 딜러였던 이성희 씨(JP모건 지점장)로부터다.

“연초에는 원달러 환율 올라가니까 조심해야 돼요.”

이 말에 특별한 뜻이 담겼다기보다는, 그 후 국난을 거치고 나니 예사롭지 않게 기억나는 것이다.

1996년 8월에는 분위기가 완전히 딴 판이 돼 있었다. 하지만 신문을 통해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거의 알 수 없었다. 딜링 시장에 매달리는 사람들만 “왜 이럴까” “언제까지 이럴까” “별 일이야 나겠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지나가는 날들이었다.

그러는 동안 820원, 840원, 860원... 원달러환율이 계속 올라갔다. 20원씩을 강조하는 것은 이 수준마다 외환당국이 강력한 개입으로 상승 저지선을 쳐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펀드멘탈에는 아무 문제 없다”라는 정부 인사들의 멘트는 주요 시기마다 반복됐다.

그때 우리 사무실에는 유난히 미혼남성이 많았다. 업무관계가 많은 투자금융사 여직원과 단체 소개팅을 가졌다. 우리 일행 중 누군가 “여기 투금사에는 미인이 많군요”라고 덕담을 했다. 아가씨 한 명이 진지하게 일침했다. “우리는 투금사가 아니라 이제 종금사입니다.”

1996년 무렵 30개 투금사가 무더기로 종금사로 전환됐다. IMF 국난에서 종금사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더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무더기 종금 전환과 관련해 제대로 사법 처벌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1996년 12월에는 환율의 거장 MIT의 루디거 돈부시 교수가 방한했다. 몇몇 학자들이 토론을 벌이는 자리였는데 한국은행의 고위간부가 “한국 딜러들이 성숙하지 않아 완전한 자유환율제를 시행할 수 없다”고 발언했다. 돈부시 교수는 그에게 “그런 식으로는 당신 나라 딜러들은 영원히 성숙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은 간부는 웃기만하고 아무 반론이 없었다.

1997년 3월, 한보사태가 터지기 전에도 IMF 위기가 어떻게 다가왔는지는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대로 괜찮은 거냐” 의혹을 제기할 때마다 “아무 문제 없다”는 자세로 일관한 당국자들이다. 그 때와 지금이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지 눈여겨 볼 일이다.

IMF 위기는 경제 금융측면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가장 심각한 건 연장자나 지도층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지 무슨 말이 그리 많냐”는 윗분들 질책이 두려워 정말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다가 모두 망했다. 높은 사람들은 그나마 명퇴금으로 치킨집이라도 차렸다. 그 사업이 결과적으로 망했던 어찌됐던. 젊은 사람들은 갑자기 치솟은 금리 때문에 월급차압을 받다가 회사에서 밀려나 신용불량자가 됐다가 택시기사가 되겠다고 몰려들었다.

연배 있는 사람들의 말에 젊은이들이 적개심을 앞세우는 것을 나무라기도 힘든 세상으로 변했다. 흰 머리가 유난히 많은 사람은 염색을 안 할 수 없게 됐다.

옛날이야기에서 나라가 망할 때 임금은 방탕하고 백성들은 게을렀다.

1997년 한국에서 위정자들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한국국민들은 절대 게으르지 않았다. 5000년 역사의 단 하루도 게을러 본 적이 없는 국민들이다.

IMF위기는 전적으로 위정자들이 국가 관리를 잘못한 때문이다. 그런데 피해는 무고한 국민들이 뒤집어썼다. 자포자기해서 도망자가 된 사람, 울화병이 터지는 속을 안고 남의 빚까지 꾸역꾸역 갚아간 사람들 모두가 피해자다.

지금 위정자들은 그 때와 과연 얼마나 다른 사람들일까. 혹시 사람은 같더라도 정책은 과연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몇 년 전, 23회에 걸쳐 1997년 금융위기에 대한 연재를 한 것이 있다. 시리즈의 서두를 여기 소개하고 맨 마지막 연재 기사의 링크를 소개해 그 날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국난을 제대로 경보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면서 기자가 됐다. 두서 없이 연재했던 글들을 더 게으름부리지 말고 다시 한 번 손질해야 할 것 같다.

“황사가 잔뜩 끼긴 했지만 올해도 봄은 찾아왔다. 조금 있으면 눈부신 햇살이 뉴스로 범벅된 이 땅 곳곳에 저항할 수 없는 계절의 화사함을 뿌려 줄 것이다.

1997년의 봄날은 특히 화창했다.

지난 겨울, 노동법 파동과 금융계가 앞장선 총 파업 소식을 쏟아내던 TV 상자는 한보, 정태수, 청문회, 김현철, 박경식... 이런 것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회의실 TV에서 무슨 소리가 흘러나오든 창밖의 봄이 은행원의 마음에 상념을 불어넣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 시리즈 마지막 기사: 정말로 김영삼이 IMF를 초래했을까 ]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