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근에 대한 지나친 신뢰가 변태적 권력욕 초래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요즘 흔히 문고리 권력이란 말을 많이 한다. 정책을 책임지는 관료들이 아니라 최고 권력자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누린다는 지적이다. 최고 권력자의 인사접견권이나 정보 접근에 영향을 줘서 사실은 자신들의 이해를 도모한다는 얘기다.

회사에서 부장 과장들이 담당 임원의 비서와 친해서 득을 봤다는 것도 문고리 권력의 작은 사례다. 평소 밥도 사고 화장품 선물도 자주 해서 친해졌더니 “지금 전무님 기분 좋으실 때 얼른 와서 결재 받으시라”는 귀띔을 받는 경우다. 이런 건 선의의 문고리 권력이다.

왕조 시대 문고리권력은 환관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모든 왕조가 다 환관들의 권력 농락에 시달린 것은 아니다.

한국사에서는 고려가 환관들의 국정 교란이 심했지만 조선에서는 이런 사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연산군 치세에 임금을 극력으로 간언하다 목숨을 잃은 환관 김처선의 영웅담이 전해진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명나라가 환관으로 인해 나라가 망했다는 지적을 받는 반면, 청나라는 개국 초부터 환관발호를 엄하게 단속했다. 조선이나 청나라 모두 앞선 왕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 환관들도 애 장난 수준의 문고리 권력은 갖고 있었다. 만주족 특유의 삼궤구고 덕택이다. 삼궤구고는 황제를 알현할 때 세 번 절하고 땅에 머리를 갖다 대기를 세 차례 반복한다는 예법이다.

환관들은 자금성 전각에서 땅바닥이 잘 울리는 곳을 알아두고 있었다. 촌지를 잘 주는 관리는 그런 장소에서 삼궤구고를 올리도록 안내했다. 건청궁 전각이 쿵쿵 울리도록 절을 받다보면 황제는 말로 표현은 안 해도 속으로 ‘저 친구 인사만큼은 확실하게 하네’라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반면 환관에게 밉보인 사람은 아무리 세게 바닥에 머리를 들이대도 말 그대로 ‘맨 땅에 헤딩’만 한 결과가 됐다. 까닭을 모르는 황제는 “몸 생각 끔찍이 하는구나. 이 불충한 놈아”라는 생각을 할 법하다.

그러나 청나라 태감들은 명나라 환관들처럼 최전선 산해관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를 모함하는 따위의 간신질은 꿈도 꾸지 못했다.

청나라보다 1800년쯤 앞선 진나라 조고의 문고리 권력은 이런 애장난 수준이 아니다. 진시황제의 환관이었던 그는 정말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둘렀다. 황제의 죽음까지 숨길 지경이었다.

진시황제가 동쪽 지금의 허베이성을 순시하다 수레에서 병사했지만 조고는 이 사실을 대륙을 가로질러 지금의 산시성 함양궁으로 돌아갈 때까지 숨겼다. 7월의 여름날 시신 부패하는 냄새를 숨기기 위해 수레에 생선을 가득 채우고 진시황제가 살아있는 척했다.

2세 호해황제가 등극하자 그는 간신의 본색을 드러냈다. 문고리 권력이 이제 실제 권력이 돼 버린 것이다. 조고는 황제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신하들이 자신을 따라 함께 황제 앞에서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2세 황제를 시해했다.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왕위에 앉힌 3세 자영의 손에 죽고 말았다. 조고는 환관으로 권력의 횡포를 부린 최초의 사례다.

 

▲ 중국 드라마 초한지에서 지록위마를 다룬 장면. 진나라 환관 출신 승상 조고가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면서 2세황제 호해를 기만하고 있다.

 

간신환관의 원조 조고는 원래 진시황제의 충신이었다. 연나라 자객 형가가 사신으로 가장해 진시황을 죽이려고 단검을 꺼내 들었을 때 호위무사들은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임금에게 칼을 들고 접근하는 자체가 역적으로 몰릴 짓이기 때문이었다.

진시황은 장검을 갖고 있었지만 경황이 없어 빼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기만 했다. 무수한 공경대신 무사들이 지켜만 보고 있는데 나선 것은 환관 조고였다.

그는 평소 휴대하던 진시황의 약주머니를 형가에게 던졌다. 형가가 이를 피하는 사이 진시황이 장검을 등에 지고 뽑아들 수 있었다. 형가는 단검만 지닌 데다 조고의 약주머니 때문에 몸의 균형도 잃었다. 장검을 빼든 진시황을 당하지 못하고 최후를 맞았다.

막강한 카리스마의 진시황제가 살아있는 동안 조고는 몸을 아끼지 않는 충신 환관일 뿐이었다. 그러나 문고리 권력의 유혹이 그를 천하통일 15년 만에 나라를 망하게 한 간신으로 만들었다.

14세기부터 17세기 중반까지 대륙을 지배한 명나라는 환관으로 시작해 환관으로 망한 나라다.

개국태조 주원장부터 지독한 의심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수 만 명을 한 번에 죽이는 옥사도 서슴지 않았다. 의심이 많은 임금은 정말 충신 중의 충신으로 확인된 측근만 가려 쓰는 법이다. 자연히 환관들이 국정에 참여하는 비중이 커졌다. 명나라 초기 환관들은 황제의 신뢰에 헌신적으로 보답했다.

주원장의 아들인 영락제 주체는 남해 원정으로 중국사에 큰 이름을 남겼다. 이 원정을 이끈 정화는 주체를 황자시절부터 섬긴 환관이다. 주체가 아버지 주원장과 조카인 2대 황제 주윤문의 의심 속에 위태로운 나날을 보낼 때부터 생사를 같이한 사람이다. 원래 이름이 마화였던 그는 공을 세워 정이라는 새로운 성을 영락제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환관들의 권력이 문고리 차원을 지나 비밀경찰인 동창까지 차지하는 지경이 됐다. 만력제를 지나 말기 천계제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관료들이 환관들에게 살해됐다.

천계제의 아우 숭정제가 제위를 승계해 위충현 등 환관들을 몰아냈지만 이미 기운 국력을 다시 일으키지 못했다. 이자성의 반군이 북경에 입성하기 직전 숭정제가 자결하는 자리에 모든 신하가 도망가고 환관 왕승은 만이 곁을 지켰다고 하니 명나라는 참으로 환관으로 시작해 환관으로 끝난 나라가 되겠다.

간신이 된 환관들은 대부분 원래가 충신중의 충신이었다. 온갖 모략이 난무하는 궁중에서 모시는 주인 하나만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놓았던 사람들이다. 먹고 입는 시중을 들면서 주인은 환관을 분신처럼 여겼고 생명의 위기에서 구해준 이들을 심정적으로 도저히 내치지를 못했다. 임금이 돼서 좋은 시절을 맞이했으니 저들이 조금 자기 욕심을 채운다한들 전혀 미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선시대 환관 중 유일하게 악명을 남긴 연산조 김자원도 이런 경우다.

최근 정치권에서 권력 핵심에 대해 ‘십상시’라는 표현까지 동원해 비난한 문건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십상시는 후한 말기 국정을 농단했던 열 명의 환관들을 일컫는다. 황건적이 창궐할 정도로 부패한 권력을 휘두르다 삼국지의 유명인물 원소와 조조에 의해 하루 만에 2000명의 환관이 도륙을 당하면서 최후를 맞았다. 동양사에 등장하는 제일 추잡한 단어 가운데 하나다.

반대 정파도 아니고 한 때 노선을 같이 했던 사람들이 이런 단어를 써가면서 극한 대립을 하고 있다. 어찌 됐든 1987년 이룩한 민주화의 근간만큼은 건재하다는 국민들의 긍지만큼은 손상하지 말고 사태가 해결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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