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신을 상대할 때도 당국자는 정책 대안을 제시해야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삼국지 조조는 헌제로부터 왕위를 받아 업(鄴)에 왕부를 설치했다. 이 곳은 전국시대 위(魏)나라 지역이다. 그래서 조조의 칭호가 위왕이 된 것이다.

업은 인류 4대문명을 일으킨 강 중의 하나인 황하의 유역이다. 치수(治水)가 통치에서 절대 요소를 차지하는 지역이다. 범람하는 황하는 무수한 관리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전설의 성군인 우임금의 아버지 곤도 그런 운명을 맞이한 사람이다.

전국시대 위나라 문후(文侯. 기원전 445~ 기원전 396 재위)는 실력 위주의 인재 기용으로 크게 나라를 일으킨 사람이다. 전국시대는 모든 제후가 왕을 자처해 7웅의 경쟁시대를 열었지만 후(侯)라는 지위를 쓴 것은 개국 초이기 때문이다. 춘추시대 최대강국 진(晉)나라가 한, 위, 조로 나뉜 직후다.

문후가 서문표(西門豹)라는 인물을 업의 시장으로 임명했다. 서문표 시장이 부임해보니 시민들 표정이 영 신통치 않았다. 노인들을 모아 까닭을 물었다.

시민들과의 ‘시정대화’에서 얻은 문제의 근원은 하백(河伯), 즉 강의 신이었다. 이 분이 남성인데, 인간세상의 여자를 상당히 밝혔다. 그래서 업의 시민들은 해마다 하백에게 처녀를 바쳐야 했다. 방법은 대나무로 만든 배에 처녀를 태워 강에 가라앉게 하는 것, 신앙이 부족(?)한 사람의 눈에는 ‘멀쩡한 처녀를 물에 빠뜨려 수장시키는’ 것이었다.

처녀만 바친 것이 아니다. 하백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이니 막대한 혼수를 마련해야 했다. 이 일은 삼로라는 높은 관직에 있는 자가 수하의 아전들과 무당과 함께 주관했다.

 

▲ 서문표의 초상화.

 

서문표가 파악해보니 강물에 던져질 처녀를 무당이 고르면, 이 처녀의 부모는 엄청난 돈을 바쳐 희생이 되는 것을 면했다. 하백의 부인이 되는 처녀는 무당에게 바칠 돈이 없는 가난한 집 딸이었다. 시민들로부터 혼수 명목으로 받는 수백만전 가운데 ‘하백과의 결혼’에 쓰이는 돈은 20~30만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삼로와 무당일파가 나눠 갖고 있었다. 혼수금은 삼로가 관장하고, 딸의 희생을 면제하는 돈은 무당이 별도로 챙기는 돈이었다.

이런 살벌한 전통이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이 지역에 내내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를 바치지 않는다면 강물이 범람해 모든 백성이 익사할 것으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후세의 관점에서 어처구니없는 관습이 존재한 건 그 시대에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지도층 인사들이 그나마 ‘해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란 얘기다. 대중들이 여기에 설득되는 것 또한 믿어주는 것 말고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서문표는 삼로와 무당에게 “하백에게 처녀를 보내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니 그날은 나도 참석하겠다”고 통지했다. 서문표는 제자백가 사상 중 법가(法家)를 신봉한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 사람조차 부임 지역 풍습은 거역하기 어려운 듯 보였다.

하백이 장가드는 날, 서문표 시장과 삼로, 아전 그리고 무당을 비롯해 수많은 시민이 구경을 나왔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2000~3000명이 나왔다고 하니 과연 업은 훗날 조조의 왕도가 될 만큼 큰 도시였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서문표는 무당도 만나게 됐다. 고대 정교가 일치하던 시절에는 무당이 곧 통치자였으니 전국시대 초기인 이 때도 서문표가 함부로 무당을 어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당은 이미 70이 넘은 늙은 여자로 10여명의 제자가 수행하고 있었다. 결코 속세의 수장 서문표에 뒤지지 않는 신앙의 수장다운 위엄이었다.

서문표가 분부했다. “시집가는 처녀가 하백께서 기뻐할 만큼 외모가 되는지 궁금하다. 내가 좀 봐야 되겠다.”

신부가 대기하는 장막으로 들어가 살펴본 서문표가 무당과 삼로에게 말했다.

“여자가 이렇게 생겨서는 상당히 곤란하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좀 시간이 걸려도 더 예쁜 처자를 구해야 되니까 무당께서 하백에게 가서 이런 사정을 직접 아뢰주시오”라고 말하고 군사들을 시켜 늙은 무당을 강물에 집어던지게 했다.

같은 시대를 다룬 역사소설 열국지에서는 이 때 무당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물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수천의 사람들은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상황 급변에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오직 서문표 한 사람만이 태연한 모습으로 늙은 무당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문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당 할멈이 왜 이리 돌아오지 않는가. 누가 가서 좀 모셔 와야 되겠다”라면서 이번에는 무당의 제자 한 사람을 물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또 다시 사람을 기다리는 시늉을 했다.

서문표가 입을 열 때마다 사람이 하나씩 강물로 들어가서 무당의 제자도 벌써 셋이나 사라졌다.

“무당하고 제자들이 여자다보니 하백에게 말씀을 드리기 어려운 모양이야. 이런 일은 그래도 장부가 나서야지”라며 이번엔 삼로를 강에 빠뜨렸다.

이미 사람들은 넋이 다 달아나 있었다. 특히 그동안 ‘하백과의 결혼’에 관련된 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어느 순간에 그동안 마을에서 행세하던 사람들은 전부 하백의 손님으로 강바닥에 가 있는 상황이 됐다.

서문표가 “삼로마저 오지 않는데 이걸 어떡해야 되나”라며 아전과 마을 유지를 돌아보는 순간, 시장의 시선이 의미하는 것을 알아차린 이들은 이마에서 피가 나도록 그 자리에서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목숨을 빌었다.

전통의 무당권력과 싸움이 일단락 된 걸 깨달은 서문표는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모든 상황을 종료했다.

“하백께서 손님들을 오래 머무르게 하는 모양이다. 일단 오늘은 모두 돌아가.”

▲ 중국 경극에서 서문표가 처녀의 미모를 살펴보는 모습.

추측컨대, 인재도 많은 중국에서 앞선 시대에 서문표 말고도 권력과 결탁한 미신 추방을 시도한 인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가 ‘하백과의 결혼’을 근절하지 못하고 서문표에까지 이르게 한 건 근본처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설픈 미신추방에 나섰다가 오히려 관원이 희생된 사례도 적지 않을 것이다. 무당과 삼로의 일파로 일단 그 자리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하회를 기다리라’는 심정으로 훗날을 도모하게 마련이다.

만약, 미신을 근절했는데 바로 직후에 물난리가 나면 그 책임은 과연 누가 질 건가. 미신을 없앤 관리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런 우려 때문에 관리들이 섣불리 풍습에 맞서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무사안일이 관료들의 고질적 악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기원전 4세기와 그 이전 상고시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마천은 서문표의 고사가 매우 통쾌하면서도 익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의 고사를 사기 속의 ‘유머 한마당’ 격인 골계열전에 포함했다.

그런데 서문표가 미신과의 싸움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둔 것은 무당과 삼로를 강에 집어넣은 그날 이후다. 만약 서문표가 무당만 없애고 다른 해결책을 내지 않았다면 그 다음 홍수나 가뭄 때 그 자신이 자연재해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을 것이다.

업은 원래 지대가 높아 홍수가 빈발하지는 않는 곳이다. 그러나 황하 유역에 깊게 뿌리내린 물에 대한 공포는 공유하고 있었다. 상습적인 가뭄은 또 다른 형태로 하신의 두려운 존재를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서문표는 백성들을 대규모 공사에 동원해 12개의 도랑으로 관개시설을 만들어 백성들의 논에 물을 공급했다.

그런데 서문표가 유가(儒家)나 도가(道家)가 아닌 법가(法家)이다보니 동원방식은 좀 거칠었던 모양이다. 그는 “백성은 이루어진 것을 즐거워할 뿐, 함께 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지금 부로와 자제들이 나를 원망하지만, 백세 뒤에는 부로의 자손들이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관개공사 후 늘어난 농작물 수확의 기쁨은 토호세력들이 미신으로 농간을 부릴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서문표는 이제 속세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예전 무당이 누리던 영적인 권위마저 얻었다.

수 백 년이 지나 한나라 때에 이르러, 서문표가 만든 도랑이 황제의 전용도로를 끊고 있었다. 이 지방 관리가 도랑을 고치려고 하자 업의 부로들이 모두 일어나 서문표와 같은 어진 분이 만든 것을 함부로 고치지 못하게 반대했다. 과연 서문표가 훗날을 예견한 그대로였다. 마침내 업의 관리도 부로들의 뜻을 존중했다. 서문표의 도랑과 저수지는 오늘날에도 서문거(西門渠), 즉 시먼치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구글을 이용해 서문거의 현지발음을 찾은 이유는 1912년 신해혁명 이후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중국 명칭은 현지음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편집원칙에 따른 것이다.
 

전국시대는 춘추시대와 비교해 인류 문명의 진화단계상으로도 뚜렷한 차이를 갖고 있다. 이 시대 중국은 철기 문명으로 접어들었다. 전쟁은 더욱 치명적이 됐고 생산에 쓰이는 도구는 급격히 상승한 생산력을 갖췄다.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됐다. 더 많이 낳기도 하지만 더 많이 죽이기도 하는 세상이 됐다. 전 시대 왕도의 궁극적 상징인 주나라 천자가 필요한 이유는 점점 더 희석돼 갔다.

한편으론 품종이 개량된 말도 보급됐다. 춘추시대의 말은 작아서 사람을 태운 운송수단이 될 수 없었다고 한다. 기마전투가 불가능했던 이 시대 전쟁은 전차전으로 이뤄졌다. 말 네 필이 이끄는 전차 한 대마다 최대 10여명의 정예갑사와 75명의 보졸이 편성됐다. 도시국가 형태의 춘추시대 제후국들은 100승 전차부대를 편성하는 것조차 상위 15개 국가 정도나 돼야 가능했다. 병력 뿐만 아니라 이들을 태울 말과 튼튼한 수레를 만들 만한 국력이 있어야 했다.

강대국인 진(晉)이나 초(楚)가 원정 때 편성하는 규모는 주로 500승으로 일컬었다. 춘추시대 최대 전투인 성복의 싸움에서 진, 초가 투입한 규모는 양쪽 모두 합쳐 10만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전국시대는 일인 기병이 가능해졌다. 이동수단이 크게 개선돼 국가의 행정력이 말단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몇몇 도시를 기반으로 했던 국가들은 이제 국경선을 그리고 맞닿을 정도로 커졌다.

전쟁은 더욱 살벌해졌다. 전국시대 최대 전쟁인 진(秦)과 조(趙)의 장평전투에서 진나라 백기가 살상한 조나라 군대만 45만명이라고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했다.

전한 후한의 400년 안정된 시기를 맞을 때까지, 중국은 전국시대라는 200년의 성장통을 거쳤던 것이다. 이 성장통은 기술 혁신이 중국 대륙에 새로운 해답을 찾으라고 요구한 것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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