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망치기 전에 임금부터 변심해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미인을 뜻하는 4자 성어 경국지색(傾國之色)은 어감이 별로 좋은 단어가 아니다. 여자가 너무 예뻐서 나라를 망칠 정도라는 뜻이다.

현대인들로서는 약간의 의문도 가질 수 있다. 대개 남녀 간 폭풍 같은 열정은 짧고 굵게 지나가기 마련인데, 어떻게 나라를 망칠 정도로 수 십 년간 지속될 수 있을까. 평생 연예를 못 해본 사람은 그게 무슨 말인지 실감하기 어렵지만, 좀 사귀어 본 사람들은 그리 얘기를 한다.

 

▲ 중국 경극에 등장한 양귀비의 모습. /사진=뉴시스

 

상고시대 중국사는 국가 성쇠의 과정에 꼭 경국지색의 미녀가 결부됐다. 하나라를 망하게 한 걸왕의 애첩 말희, 은나라 마지막 주왕의 애첩 달기는 중국 상고사에 악명을 크게 남긴 미녀들이다.

역사와 전설이 혼재되기 시작한 주나라 유왕의 애첩 포사도 이들과 비슷하다. 유왕이 푹 빠진 미인 포사는 웃지를 않았다. 오직 비단 찢는 소리를 들을 때와, 봉화를 보고 달려온 제후들의 허둥거리는 모습을 봤을 때만 웃었다. 그래서 무수한 비단을 찢어대는 바람에 왕실 재정이 궁핍해졌다. 아무 일도 없는데 시도 때도 없이 봉화로 제후들을 소집해 왕의 신뢰가 떨어졌다.

마침내, 서쪽의 오랑캐 견융이 쳐들어왔을 때 대부분 제후들은 왕실의 봉화를 무시해 버렸다. 유왕은 견융에게 살해됐고 포사는 자결했다. 주나라는 이때 망할 뻔 했지만 뒤늦게 근왕한 제후들이 새로 평왕을 옹립해 동쪽의 낙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러나 왕의 권위는 크게 추락해 대륙은 춘추시대로 접어들었다.

걸왕이나 주왕, 유왕은 한 여성한테 싫증도 안 느끼고 죽도록 좋아하다 정말 죽었다.

이후 중국사에는 우희, 견씨 부인 등의 미녀가 등장하는데 나라를 망치게 한 요부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초패왕 항우의 부인 우희는 엄청난 미인이어서 항우가 이 여인 말고 다른 여인을 취했다는 얘기는 전혀 전하지 않는다. 워낙 우희만 사랑해 라이벌인 한고조 유방의 부인 여씨(여태후)를 항우가 3년 동안 포로로 잡고 있을 때도 정말 잘해 주기만 했다고 한다. 여씨가 함께 포로가 된 시아버지 모시는 데만 전념할 수 있도록. (관련기사: 박씨부인의 성공반전, 척씨부인의 처참한 운명)

여씨를 격분시킨 건 포로로 잡혔던 3년이 아니다. 석방돼 돌아와 보니 남편 유방이 척씨부인에 푹 빠져있던 사실에 여씨는 효부에서 분노의 화신으로 변해갔다. 한(漢)나라에서는 척씨 부인이 하마터면 옛날의 나라망친 여인이 될 뻔했다. 그러나 이 때는 유학이론으로 철통같이 무장한 신하들이 존재해서 정치와 임금의 사랑은 별개로 끝났다. 그 대신 원한에 사무친 여태후의 무시무시한 ‘사람돼지 보복극’이 이어졌다.

삼국지 시대에는 원소의 며느리였던 견씨가 미인으로 유명하다. 조조가 원소의 세력을 멸망시킨 후 조조 아들 조비가 이 여인을 부인으로 삼았다. 이 소식을 듣고 조조는 “이번 전쟁은 아들 녀석 좋은 일만 했다”는 한마디를 남겼다. 견씨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견씨는 나라를 망칠 경국지색과는 거리가 멀었다. 견씨의 미모가 부족했다기보다는 조비의 변덕 때문이다. 견씨에게 싫증을 느낀 조비는 참소까지 믿고 견씨를 죽였다. 하지만 이 때문에 견씨 소생의 아들 조예를 더욱 불쌍히 여겨 제위를 물려줬다.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낸 위나라 황제가 바로 조예다.

혹자는 삼국지에 초선도 있지 않냐고 반박할지 모르지만, 초선은 소설 삼국지연의에만 등장하는 가공인물이다.

임금이 단 한명의 여자 때문에 나라 망치는 건 상고시대나 통할 얘기라고 방심할 무렵에 등장한 여인이 당나라의 양귀비다. 한 때는 ‘개원의 치(開元之治)’라고 해서 성군으로 이름을 날렸던 현종이 며느리를 보고 ‘꽂혀서’ 벌어진 일이다. 이 여자 때문에 양씨 인사들을 무분별하게 중용했다. 안녹산의 반란이 생긴 원인이다. 반군에 쫓겨 피난을 갈 때도 현종은 양귀비를 버리지 못했다. 마침내 왕을 호위하는 병사들이 양귀비를 죽여야 임무를 다하겠다고 파업을 하는 바람에 눈물을 흘리며 애첩을 처형했다니, 경국지색의 국가 흥망사가 상고시대 일만은 아님을 입증했다.

한국사는 상고시대의 역사가 전설로나마 전해지는 것이 극히 드물다. 주요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전하기 시작한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고 전사한 백제 개로왕은 아둔한 혼군으로 비판받는다. 무고한 백성 도미의 아내를 탐하기도 했다지만, 도미의 부인은 나라 망치는 요부와 거리가 먼 남편과의 정절을 지킨 여인이다.

고려 때는 무인반란으로 쫓겨난 의종의 무비와 같은 여인들 이름이 전하기도 하지만 경국지색의 국난과는 거리가 멀다. 인종 때 이자겸의 발호가 심했을 때도 그의 두 딸인 왕비들은 아비의 뜻과 달리 남편을 극력 보호한 착한 여인들이다.

한국사에서 정치를 흐린 것으로 유명한 미인은 단연 조선시대의 장녹수와 장희빈이다. 특히 장희빈은 사극이 나올 때마다 윤여정 이미숙 정선경 김혜수 김태희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캐스팅되는 한국사 최고의 미녀 캐릭터다. 두 사람 다 인동 장씨라고 하니 이 만필가의 조상 할머니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장씨는 인조 때의 도원수 장만 등 주로 무인들을 배출한 집안인데 아마 두 사람은 가세가 쇠락해 중인이 된 집안 출신인 듯하다.

 

▲ 숙종과 장희빈을 연기한 유아인과 김태희. 장희빈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가 아니면 배역을 맡기 힘든 한국사 최고의 미녀 캐릭터다. /사진=뉴시스

 

하지만 장녹수와 장희빈 모두 달기 포사와 같은 경국지색과는 차이가 있다.

우선, 장녹수는 그녀 때문에 연산군의 폭정을 초래한 것이 아니다. 기득권 사회를 능욕하려는 연산군의 분노가 이리저리 발산한 가운데 장녹수가 연산군의 눈에 띄어 생사를 함께 한 것이다. 왕실에 들여서는 안되는 여인이라니 연산군의 오기가 더욱 발동하고 호감을 갖게 됐는지도 모른다.

장희빈은 나라를 망치기에는 남편인 숙종의 변덕이 너무나 극심했다. 숙종은 장희빈 때문에 어린 정궁 인현왕후를 6년 동안이나 황폐한 집에 가둔 냉혈한이다. 그러다가 마음이 급변해서 어린 아내를 다시 불러들였지만 이미 신체를 훼손한 인현왕후는 오래 살지 못하고 요절했다.

왕후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면피하는 길로 숙종은 죄를 장희빈에게 뒤집어씌웠다. 명목상 왕후를 저주한 죄이지만 정서적으로는 왕후 시해죄에 해당하는 보복이 가해졌다. 젊어서는 어머니 반대도 무릅쓰고 한밤중 도둑사랑까지 나눴다는데 이 사랑의 결말은 유혈극이었다.

이렇게 살펴보면 웬만해서는 임금이 여인 하나 때문에 나라를 결단 낼 지경까지 갈 가능성은 극히 낮아보인다. 나이 60이 넘어 피로한 심신을 젊은 양귀비에게 넘겨버린 당나라 현종이 예외일 뿐이다.

그렇다면 상고사의 말희 달기 포사는 어찌된 연유인가.

우선 하나라 말희는 어쩐지 이야기 구조가 은나라 달기와 너무나 흡사해 보인다. 기록도 남은 것이 없는 하나라에 대해 중국 사람들이 은나라 주나라 전환기 비슷하게 이야기를 조금씩 전해 넘겨온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은나라의 주왕과 달기에 대해서는 힌트가 될 만한 역사소설 대체지의 ‘강태공’이 있다. 신화나 비현실적 무협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실증적으로 풀어나간 점이 매우 돋보이는 소설이다.

주왕은 은나라 권력의 큰 비중을 차지한 무속인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는 조상 임금이 하늘을 믿지 않다가 사냥을 나가 벼락 맞아 죽었다는 것도 무속권력자인 태축의 작위가 아닐까 의심한다.

마침내 그는 무녀 출신인 달기를 얻고 점복을 태축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행한다. 왕후를 내쫓고 달기를 정궁으로 삼는 과정에서 많은 대신과 제후들이 주왕에게 살해당한다. 그 가운데는 전설의 충신으로 이름을 남긴 비간도 포함된다.

달기 또한 단지 여인 하나의 농염함으로 임금의 혼을 홀린 것이 아니라 청동기 진입 격변기 중국의 이해 상충한 집단들의 대결이 배후에 작용한 것이 아닐까. 전 시대 여러 가지 모순이 중첩돼 격변의 시기가 닥친 것을 간편하게 여인 하나 욕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다보니 경국지색이란 말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남자가 단 한 명의 여자에게만 평생 저토록 이성을 잃을 것이라고 믿어주는 자체가 너무나 순수한 생각일 것이다. 여태 누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긴 하지만 연애 감정이란 것이 좀 그럴 거 같다. 이렇게 불성실한 생각을 갖고 있어서 혼자 지내는 지도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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