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조선 대한민국 810년의 정변을 일으킨 두 사람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2014년의 사극 ‘정도전’은 1996년 드라마 ‘용의 눈물’ 시즌2라고 할 만하다.

둘 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개국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단, 작품의 무게감에서는 159회나 방영된 ‘용의 눈물’이 50회에 그친 ‘정도전’을 압도한다. 분량이 무게감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방송국이 근 3년을 쉽게 종영 못한 것은 예사롭지 않은 점이다.

‘용의 눈물’에서는 유동근이 태종 이방원으로, 선동혁이 태종의 측근 이숙번으로 등장했다.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은 것으로 각색됐다.

▲ 1996년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 유동근과 '이숙번' 선동혁.


‘용의 눈물’에서 태종-이숙번 갈등을 암시하는 대화는 참으로 일품이었다.

유동근: 숙번이, 자네도 내가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나?
선동혁: 아직 50도 되지 않은 전하께서 물러나시다니요!
유동근: 50이면 물러나야 하나? 그렇다면 내후년에 선위해야 되겠군.
선동혁: (아차! 내가 이런 말장난에 넘어가다니...)
 

유동근과 선동혁은 18년 후 작품 ‘정도전’에서 또다시 의형제로 등장했다. 유동근은 전작 인물의 아버지 이성계로, 선동혁은 여진족 장수 이지란을 맡았다. 이번 의형제는 이방원-이숙번 간의 ‘토사구팽’이 없는 진정한 우정이었다. 이성계와 이지란의 의형제는 실제로도 전해지는 얘기다.
 

▲ 2014년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성계' 유동근과 '이지란' 선동혁.

 

‘정도전’의 배역이 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이방원으로 등장한 인물이 안재모라는 점이다. ‘용의 눈물’에서 세종으로 나왔었다. 두 작품에서 모두 유동근 안재모는 태조와 태종, 태종과 세종 부자지간인 것이다. 단 성격은 두 배우가 맞바꾼 모습이다.

‘용의 눈물’에서는 안재모가 아버지 유동근에게 “장인어른을 살려 달라”며 눈물로 애원했지만 유동근은 매몰차게 이를 뿌리쳤다. 이번엔 안재모가 왕자의 난으로 이복형제를 죽여 유동근에게 피눈물을 쏟게 했다. 무학대사로는 18년 전과 변함없이 박병호가 등장해 두 작품의 연관성을 높였다.

유동근의 호쾌한 이미지가 태종 이방원에 흡사한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역사 기록으로는 안재모의 호리호리한 모습이 글에 밝았던 태종에 더 비슷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런데 조선 개국과 왕자의 난 등 두 차례 정변을 합작한 유동근-선동혁 듀오를 훨씬 압도하는 막강한 쿠데타 컴비가 있다. 서인석, 이덕화다.

두 사람은 고려 조선 대한민국 3개 시대 810년의 역사를 뛰어 넘어 정변을 일으켰다.

서인석, 이덕화가 벌인 최초의 쿠데타는 1994년이다.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 서인석은 수양대군, 이덕화는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로 나왔다. 이 드라마는 한국 사극의 고전 신봉승 작품이다.

앞서 신봉승은 같은 내용을 토대로 1980년 MBC 일일드라마 ‘고운 님 여의옵고’, 1984년 MBC 기획 ‘조선왕조500년’의 ‘설중매’에 이어 세 번째로 ‘한명회’를 제작했다. 수양대군과 한명회는 이정길-오지명, 남성우-정진에 이어 서인석-이덕화로 대를 이었다.

두 번째 정변은 9년 지나서다. KBS 사극 ‘무인시대’에서 서인석은 이의방, 이덕화는 이의민으로 등장했다. ‘한명회’때보다 시대는 283년을 거슬러 올라간 고려 의종 때다. 이의방은 정중부와 함께 무신정변을 일으켜 100년을 지속한 무신정권을 시작했다. 이의민은 이의방 수하의 맹장이었지만 이의방과 정중부가 암살된 후 권력을 차지했다.

두 작품에서는 모두 서인석이 이덕화의 ‘보스’로 나왔다. 이런 상하관계는 현대사에 들어와서 역전됐다.

무인시대에서 고려 무장들의 병장기가 너무나 무거워 고생을 한 이덕화는 3년 후 두피도 드러낸 시원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2006년 MBC 정치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전두환을 맡았다. 신군부의 2인자 노태우로 나온 사람은 서인석이었다.

전두환-노태우는 주종관계라기 보다 1대주주와 2대주주에 비슷하지만 어떻든 두 사람의 서열은 뒤바뀌었다.

 

▲ 드라마 '제5공화국'의 '전두환' 이덕화와 '노태우' 서인석.

 

전두환 시대 대학시절을 보낸 386세대(이제 586으로 접어드는)의 한 사람으로 전두환이나 노태우나 절대 그 누구도 좋게 평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제5공화국’은 실록이 아닌 드라마였다.

드라마로서 시청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통상적인 선악의 대립구도가 필요하지만, 이 드라마는 후반부로 가면서 이걸 상실했다. 마치 5공 청산 특위의 기록물처럼 신군부 정권의 죄상을 나열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해서는 드라마 특유의 흥미를 일으키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전반부 청와대의 허화평-허삼수-허문도 강경파와 노태우가 갈등을 일으키는 부분은 시청자들의 상당한 몰입을 유발했었다.

서인석과 이덕화는 여기서 앞선 작품들과 전혀 다른 자신들의 연기력으로 극중 인물을 훌륭하게 묘사했다. 마지막회 옥중에 갇힌 두 사람의 식사장면은 뚜렷이 대비된다.

이덕화는 심기가 매우 불편해 식판에 놓인 식사를 외면해 버린다. 반면 서인석은 차분하게 앉아 반찬을 남김없이 꼭꼭 씹어 먹고 국물까지 후루룩 다 마셔서 비운다.

1949년생 서인석과 1952년생 이덕화는 40대에서 50대를 지나가는 12년 세월 동안 함께 무수한 정변을 벌였다. 전부 역사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못 받는 인물들이지만 정상급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력으로 소화해 냈다.

두 사람 모두 환갑을 지나 이제 또 한번 쿠데타 컴비로 나서보라고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굳이 있다면 중국 춘추시대의 두 번째 패자 진문공 중이 정도가 어떨까. 수 십 년 망명 생활 끝에 60이 넘어 임금이 되고 또 천하 제후를 호령하는 패자로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중이를 보좌했던 조쇠 위주도 모두 자손들이 전국시대의 임금이 됐다.

두 사람이라면 누가 어떤 인물을 맡든 저마다의 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지나온 세월의 무게가 있다 보니 배역의 아역 뿐만 아니라 청년기까지는 다른 배우가 나오는 편이 자연스럽겠다.

예전 배우들의 연기가 그리운 것은, 보는 사람 저마다 그 작품을 보던 시절의 추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은 아무리 더 뛰어난 배우가 등장해도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자는 ‘올드 팬’과 함께 늙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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