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변명 "친구 앞에 노래도 뻘쭘한데 어떻게 왕 앞에서..."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1398년 윤 5월 11일, 조선의 간관들은 태조 이성계에게 “토목 공사를 빨리 그만두고 여인과 환관의 관직을 제거할 것이며,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정사를 들으시라”는 상소를 올렸다. 지중추원사 이지는 “전하께서 대신을 접견하는 날이 적은 까닭으로 경륜의 말이 위에 통하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임금이 물리칠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이성계는 “경 등의 말한 것이 간절하다”라고 수긍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반응이 좀 의아하다.

“그 사실을 바로 쓰지 않고 그 사람을 바로 가리키지 않고는 은근히 풍자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국가지도자들 중에는 꼭 찍어 “누구를 쫓아내시오”라고 하면 신경질을 내는 사람이 있는데 이성계는 반대의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이런 경우는 대개 “너 지금 이렇게 돌려서 비꼬는 게 내 얘기하는 거지!”라고 다그칠 때다.

이성계는 학문보다 무예가 크게 앞서지만 어찌됐든 명암의 이분법에서는 밝은 군주에 속하는 임금이다. “내가 지난날에 아침 일찍 조정에 나가서 정사를 보지 않은 것은 질병이 있어 능히 일찍 일어나지 못한 까닭이었으니, 지금부터는 내가 마땅히 병을 견디어 조회를 보도록 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 조선태조 이성계 어진.

 

아프다는 것은 괜한 핑계가 아니었다. 이 해들자마자 이성계는 1월4일부터 아프다가 낫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2년 전 평생의 사랑한 여인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버린 후 극심한 무기력에 빠졌다. 한양 시내에 조성한 왕후의 정릉, 왕후를 위로하는 흥천사를 찾는 것이 오로지 위안인 날들을 보냈다. 조회는 이런 과정에서 뒤로 밀렸다.

하지만 무심한 신하들이 길고 긴 상소를 통해 비꼬기까지 하니 근성이 나기 시작했다. 이 때 조회는 5일마다 한번 열렸다. 아일(衙日)이라고 하는 1일, 6일, 11일 등에 열린 것이다.

5월26일, 태조가 경복궁 근정전 어탑에 앉아 조회를 열었다. “그래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조회 안한다고 불평이냐”는 기세가 가득했다. 의식을 진행하는 예관이 배례를 올리라고 목청을 돋우자 바로 심기를 드러냈다.

“배례 받으려고 5일마다 조회 여는 것 아니다.”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각 관사의 자질구레한 사무까지 내가 다 할 일이 아니고,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가운데 여기서 얘기할 만한 일은 마땅히 면전(面前)에서 아뢰게 하라”고 예조에 지시했다.

“조회 좀 여세요”라고 아우성치던 신하들이지만 임금이 이렇게 바짝 들이대면서 “할 말 있으면 해봐”라고 나서자 분위기가 급랭했던 모양이다. “황공해서” 나오는 관원이 아무도 없었다.

급기야 왕이 엉뚱하게도 정도전에게 화살을 돌렸다.

“여러 신하들이 일찍이 내가 조회를 보지 않는다고 책망하더니, 오늘은 어찌 한 사람도 면전에서 아뢰는 이가 없는가.”

독대 기회가 많은 정도전이야 조회가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지만, 신하들의 대표 격으로 나서야 했다.

“신은 속된 말로써 이를 비유한다면, 벗들이 연회할 적에 서로 창화(唱和)하고자 하더라도 먼저 노래를 부르기란 실로 어려운 것이온데, 하물며 임금 앞에서 정사를 아뢰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그럴 거면 뭐 하러 조회 열자고 했냐고! 이성계의 본심이 이랬을 것이다.

난감한 분위기를 탈피하기 위해서 대사헌 성석용이 뭐라도 하나 건수를 마련해 나섰다.

“늘 사용하는 오승포(五升布)는 너무 무거워서 촘촘히 짠 10척(尺)을 1필로 삼는 게 좋겠는데요?”

“그런 건 글로 써서 올리라!” 바로 임금이 면박을 줬다.

대사헌이 총알받이로 시간을 벌어준 덕택에 형조전서 유관이 드디어 얘기가 좀 되는 제안을 내놓았다. 죄인에 대한 형벌은 형률조문에만 의거하도록 하고 법에 없는 고문을 없애서 억울한 죄인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태조는 이에 대해 옳다고 여겨서 시행하라고 명을 내렸다.

요란을 떨며 마련한 조회가 드디어 면피를 했던 것이다.

이성계는 자신을 마치 조회도 게을리 하는 혼군처럼 여긴 신하들을 이렇게 격퇴하자 기분이 고양된 듯하다. 좌우 정승인 조준 김사형과 정도전 남은을 불러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이들은 술을 마시면서 조선을 세운 얘기를 주고받았다고 하니 기세등등한 사람들의 취중 방담이 쉽게 연상된다.

이로부터 5일 후, 또 다시 조회를 여는 날이 됐다. 백관들이 모두 도열했는데 왕은 조회를 열지 않았다. 대신 지난번 술을 같이 마신 네 사람만 서루(西樓)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술은 안마시고 진짜로 국정을 의논했다.

막상 모아놓고 보니 할 얘기도 없었던 신하들이라, 조회를 안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가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이 날은 엉뚱한 일도 벌어졌다. 조선시대의 하급이나 지방 관원들이 본부 부서에 인사를 가는 참알이란 제도가 있었다. 3품 이하 관원이 도당에서 참알을 하는데, 문하시랑찬성사 우인열이 평상에 걸터앉아 코를 골며 잠을 자서 간관이 그를 탄핵했다. 이 때 61세의 고령이었던 우인열은 고려 말부터의 무장으로 여러 차례 왜구를 격퇴한 사람이다.

태조 이성계나 우인열이나, 전쟁터에서 뼈가 굵은 원훈들이 새롭게 안정되는 국정제도가 체질에 안 맞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또 5일이 지난 6월6일, 이번에도 백관들은 조회에 나와서 정렬했다. 그러나 왕은 6월1일보다 한 술 더 떠, 저 세상의 아내를 위로하러 흥천사로 거둥해버렸다.

최고 권력자를 만나는데 있어서 절대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얘기 하느냐 이지, 언제 보느냐가 아닐 것이다.

그 해 여름, 이성계는 다시는 조회를 열지 않았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어 가을이 됐다. 연 초부터 조금씩 앓던 이성계는 마침내 큰 병으로 쓰러져 좌정승 조준이 목숨을 기원하는 제사까지 열었다. 이 와중에 이성계는 생애 단 한 번의, 너무나 처참한 군사적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친아들 이방원으로부터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