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자손을 모두 재상 만들어주겠소" 약속이 실현되려면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이천서씨의 시조인 서신일은 신라말 고려초의 인물이다. 어느 날 그의 집에 사냥꾼의 화살을 맞은 사슴이 뛰어들었다. 화살을 뽑아내고 사슴을 숨겨주자 사냥꾼이 이를 알지 못하고 지나갔다.

야생동물이 이와 같은 상처를 입으면 잡히지 않더라도 살아남기 힘든 법인데 이 사슴은 예사롭지 않은 존재였던 모양이다. 서신일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됐다.

그날 밤, 그의 꿈에 신령한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서신일에게 “사슴은 나의 아들이네. 자네의 힘을 입어 죽지 않았으니 마땅히 자네의 자손을 대대로 재상이 되게 해 주겠네”라고 말했다.

그 때 서신일의 나이 이미 80이었지만 부인은 그보다는 상당히 젊었던 듯하다. 아들 서필을 낳게 됐다. 서필은 고려 광종 때의 대쪽재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광종의 공포정치로 많은 왕족과 신하들이 두려운 세월을 보냈지만 서필은 소신대로 왕의 정책에 반하는 간언을 해서 이를 관철시켰다.

서필의 아들은 고려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상 최고 외교관으로 존경받는 서희다. 거란의 1차 침략 때 적의 총사령관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단 한 번의 싸움도 없이 침략을 물리치고 강동6주의 경영권을 확보했다. 서희의 아들 서눌도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 드라마 속 고려의 명외교관 서희의 모습. 그는 서신일의 손자다. /KBS 방송화면 캡춰.

서신일 노인이 다친 사슴을 보고 “이게 웬 떡이냐”는 탐욕을 부리지 않고 자비를 앞세운 공덕이 이렇게 대대로 이어졌다. 오늘날에는 내셔널지오그래픽과 같은 다큐멘터리 채널을 통해 사람들이 생물을 아끼는 심성을 나눠 갖고 있지만 이 때는 먹을 것이 부족한 시절이다. 특히 후삼국의 전란으로 더욱 식량이 부족할 때다. 그럴 때일수록 자비심을 앞세운 것이니 신도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도망쳐 온 사슴을 잡아먹었거나 사냥꾼에게 팔아넘겼다면 어찌될 것인가. 대대손손 정승을 만들어 주는 신령님의 실력으로 절대 그냥은 안 넘어갈 것이다. 끊이지 않는 미스테리 사건은 오늘날 과학수사의 힘으로도 풀지 못하고 있다. 비정한 인간이 지금 현재 뜻밖의 장소에서 초식동물로 변신해 도망다니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이 얘기의 행간에는 또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요소가 있다. 서신일의 자손들이 신령님의 도움을 받을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들을 살려줬다고 해서 자질이 안 되는 자손을 재상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신은 없다.

그러나 신과 인간의 대화에서 두 세계의 언어가 다른 탓인지 약간의 차질이 발생한 사례도 있다.

서신일의 시대에서 300년쯤 세월이 흘렀다. 통해현의 바닷가에 거북처럼 생긴 동물이 밀물에 왔다가 썰물에 나가지 못하고 묶여 있었다. 사람들이 이 짐승을 잡으려고 하자 보고를 받고 달려온 현령 박세통이 이를 말렸다. 박 현령은 앞선 서신일의 고사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사를 몰랐어도 거북 같은 이 동물이 신령한 생명임을 알아봤을 수도 있다.

그날 밤, 박세통의 꿈에도 노인이 찾아왔다. “우리 아이가 날을 가리지 않고 나가 놀다가 하마터면 솥에 삶아질 뻔 했습니다. 공의 덕택으로 살았으니 공과 아들, 손자 3대를 재상이 되도록 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신들도 아이를 키우는 일에 이렇듯 지극하고 애틋한 정성을 기울이고 있으니 우리 인간은 아무 까닭 없이 무고한 생명을 마주할 때 더욱 삼가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박세통에게는 서신일 때보다도 더욱 구체적으로 3대라는 혜택의 기간이 전달됐다. 과연 박세통과 아들 박홍무는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손자 박감은 할아버지의 꿈 얘기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은 당연히 재상까지 올라갈 것이라 믿고 관직을 시작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소식은 들리지 않고 세월만 흘러 치사를 할 나이가 됐다. 계급정년에 걸렸다는 뜻이다. 박감의 관직은 상장군으로 재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할아버지 꿈 다 소용없다는 한탄으로 “3대 재상 다 헛된 말”이라고 시를 읊었다. 박감의 도발이 신령노인을 제대로 불러내게 됐다.

그날 밤, 예전 은인의 손자를 찾아온 노인은 우선 따끔한 쓴 소리부터 했다. “그대가 주색에 빠져 스스로 복을 감한 것이고 내가 은덕을 잊은 것이 아니다.”

저 인간을 재상을 만들어 박세통과의 계약을 완료하려던 신령님은 박감이 룸살롱을 전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좌절의 세월을 보내왔던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박감에게 위로가 될 만한 얘기를 덧붙였다.

“장차 한 가지 즐거운 일이 있을 것이니 기다려 보라.”

과연 며칠 후 계급정년인 치사가 해제되고 박감은 복야로 승진했다.

바다의 신령인 노인은 박세통과의 약속을 완수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지만 손자인 박감의 자질이 재상에 크게 부족하다는 뜻밖의 걸림돌에 부딪혔다. 당사자인 박감과 직접 만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복야를 제시했으니 이러한 상황에서 신령님은 정말 계약 관계의 이행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음이 인간인 우리의 판단으로도 분명하다.

▲ 역옹패설의 저자 이제현의 초상화.

박감은 비록 재상의 자질은 못됐어도 조부가 받아낸 혜택을 조금이라도 더 실현되도록, 인간의 몸으로 감히 신령을 대하는 두려운 일을 자초했으니 박세통의 자손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이상의 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구조조정으로 집에 앉아서 마누라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시 출근하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나가보니 승진해서 사무실에 관용차까지 제공받았다. 재상은 아니지만 만년에 이 같은 관운은 오로지 신의 도움일 따름이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교훈은 잊지 말아야 한다. 방탕한 삶에는 신령님도 구제불능이란 것이다.

이 얘기는 고려 말의 위대한 유학자 이제현의 역옹패설에 전한다. 민족사상 보기 드물게 국가가 타민족의 속국 비슷한 처지가 됐을 때 이제현은 유배 간 충선왕을 구하기 위해 중국 대륙 곳곳을 찾아다닌 충신이다. 그의 뛰어난 유학 식견은 조선의 사관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아 고려사 곳곳에 그의 평론이 소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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