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의 독립적 판단과 '선배' 총재는 무관한 듯

▲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한국은행 사람들과 역대 총재에 대해서 얘기하다보면 금융시장 일반의 정서와는 약간 다른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박승 전 총재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후하다는 점, 그리고 사상 최고로 평가받는 고 전철환 총재에 대한 체감 존경이 일반과는 좀 다르다는 점이다.

박승 전 총재는 재임 중 기자회견에서 금리 인하 가능성에 대해 “황당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러고 나서 바로 다음 달에 금리를 내렸다. 그 때 금융시장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박 전 총재가 국회에 출석하면 국회의원들은 “박승자박이란 말 들어봤나”라며 갈팡질팡하는 언행을 비판했다. 박영선 열린우리당 국회의원(현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은 “발언에 관한 태스크포스를 구성해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전임 전철환 총재 시대 때 ‘한은 총재의 발언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매뉴얼에 익숙해진 투자자들은 전 총재의 식견보다도 시장에 주는 일관된 신호체계에 환호했다. 고 전철환 총재의 일관된 신호는 총선 코앞에 금리를 올리는 소신으로도 나타났다. 2000년 2월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린 것은 4월 총선 두 달 전이었다.

그러나 한은 사람들이 역대 총재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통화정책 뿐 만이 아닌 것 같다. 박승 총재 임기 중에는 한국은행법이 개정돼서 한은이 금융기관을 조사할 수 있는 힘이 더 커졌다. 외환위기 직전 은행감독원을 정부에 ‘뺏긴’ 한을 어느 정도 만회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박승 총재는 부임 당시, ‘선배님의 귀환’으로도 각별한 정서를 이끌어냈었다. 교수가 되기 전 한은 직원으로 상당히 촉망받는 인재였다고 한다. 금융통화위원을 지낸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 장관은 사무관 시절, 한은의 박승 대리가 방문해 경제 강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기억했다. 김 전 장관은 “가만 따져보니, 그 때 박 총재가 대리가 되기 힘든 나이였다”고 덧붙였다.

혹자들은 박승, 이성태 전 총재가 한은 출신 선배이기 때문에 직원들의 호감을 더 사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한은 출신 선배 총재에는 지금의 이주열 총재도 포함된다.

2000년부터 한은 출입을 했지만 한은 직원들이 자기들 선배 총재만 존경하는 사람들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개인적으로, 한은 출신 총재들에 대한 공통인상은 하나 가지고 있다.

절대로 정부와 싸우려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성태 전 총재의 부총재 시절이다. 한나라당의 국회의원 한 명이 한은의 힘을 실어주기 위해 정부 측 인사와 이 부총재를 불러 대화를 가졌다. 이 의원은 이 전 부총재가 “정부 인사가 있는 자리라서 그런지 전혀 얘기를 안하더라”고 개탄했다.

이 의원은 당시 재정경제부가 금융시장에 혼란을 초래한 사실을 들어 국회에서 경제부총리에게 조목조목 따지기도 했었다. 경제부총리는 엉뚱하게도 한은 총재의 발언 실수로 핑계를 돌렸다.

김중수 전 총재는 부임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친분으로 인해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에 대해 지금도 유명한 것은 이명박 정부의 지속적인 금리 인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면서 물러났다는 점이다. 김 전 총재 재임 시절의 ‘금리 정상화’는 이성태 총재 시절 내려간 금리를 다시 올린다는 것이었다. 물론 금리 인상만이 중앙은행 독립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정책 현실에서 올려야 할 금리를 올리는 것은 한은의 가장 심각한 존립 이유다.

그럼에도 김 전 총재에 대한 한은 내 평가에는 이런 소신의 효과가 잘 안 먹히는 듯하다. 직원들 게시판을 뒤지는 등의 쓸데없는 소동 탓인지도 모르겠다.

4월1일 취임 1주년을 맞는 이주열 현 총재는 3월 초 예상 밖의 금리 인하로 금융시장을 뒤흔들었다. 이 때 회의를 앞둔 그 어느 시점에서도 금리 인하의 힌트를 주는 한은 총재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특이하게 여당까지 나선 정부의 요구가 드높더니 과연 한은 출신 총재는 또 한 번 싸우기를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은 출신 총재가 바람직하냐 아니냐는 질문은 쉽게 대답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한은 출신 총재니까 중앙은행의 소신이 더욱 살아날 것이란 기대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사례가 그러하다. 앞으로 일은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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