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부터 초등학생까지, 국민 70% '번아웃 증후군' 겪는다

▲ 출처=KBS '추적 60분' 홈페이지

 

[초이스경제 김슬기 기자] 우리나라의 근로시간은 세계 최상위 수준이다. 입시경쟁, 취업준비에 이어 끊임없이 경쟁에 내몰리는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지수는 낮을 수밖에 없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갤럽의 세계 행복지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지수는 조사대상 143개국 중 118위다.

이런 가운데 KBS '추적 60분'이 극심한 스트레스로 나타나는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에 대해 경고해 눈길을 끌었다.

21일 방송계에 따르면 '추적 60분'이 만성 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이 늘면서 '번아웃 증후군'에 대한 전사회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개인 미용실을 운영하는 38살 주경아씨는 "사람 많은 곳에서 식은 땀이 나고 호흡이 곤란해지는 공황장애 같은 것을 느낀다. 3년 전부터 시작된 불면증 때문에 낮에 생활하는 것도 힘들고 매일 몸이 아프다"고 말한다.

32살 회사원 김미연씨는 "지난 여름부터 불면증 때문에 무기력하다. 이전에는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이었고 야근을 해서라도 주어진 일을 다 끝내는 성향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업무를 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 정시 퇴근을 하고 집안일도 모두 미룬다. 빨래, 청소, 요리 모든 게 귀찮다"고 전했다.

50대 주부 강형주씨는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 가스렌지 위에 냄비가 타서 집안에 연기가 날 때까지 인지를 못하는 등 심각할 정도의 건망증까지 생겼다. 삶에 의지가 없어졌다"고 호소했다.

한편 식품회사 영업팀장인 김용환씨는 "한번 화가 나면 답답하고 심장이 심하게 요동쳐서 잠을 못 잔다. 특히 운전할 때 분노 조절이 힘들다. 전에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에 쉽게 화가 나서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된다"고 털어놨다.

이들은 모두 ‘번아웃 증후군’의 증상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번아웃 증후군'이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신체적·정신적 피로로 인해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는 증상을 말한다. '번아웃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흥미가 없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잠을 제대로 잘 수 없게 된다. 신체적으로도 스트레스에 대응할 수 있는 회복기제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서 극도의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된다.

스트레스 상태에 놓이게 되면 우리 몸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에너지 공급을 촉진하는 코르티솔 호르몬을 분비시킨다. 정상인의 경우 기상시간을 기점으로 코르티솔 분비량이 최대로 올라간다. 잠들어있던 신체를 깨워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들기 위함이다. 이후 코스티솔 분비량이 점차 줄어들지만 스트레스로 심신이 지쳐있는 경우에는 기상시간이 아닌 오후 12시에서 6시 사이에 가장 높은 분비량을 보인다. 전반적인 분비량도 정상인에 비해 낮은 편이다.

전문가들은 신체적, 심리적으로 제대로 쉴 수 없는 환경이 '번아웃 증후군'을 촉진시킨다고 말한다.

토마스 뢰브 독일 레겐스부르크대학병원 심신의학과 교수는 "번아웃의 경우 사회적으로 격리된 사람들이 자주 겪는다. 자기 일에만 집중하고 그 외의 삶은 존재하지 않게 되면서 성격 장애를 갖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가톨릭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채정호 교수는 "번아웃 증후군은 일명 소진 증후군이다. 어떤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특히 일 중독에 빠질 우려가 많은 성향이거나 업무강도가 높은 직무를 맡은 사람의 경우 자기 자신을 끝까지 소진시키지 않을 장치들을 여러 영역에서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김용환씨는 “3년 전 팀장 자리에 오르면서 업무에 대한 압박감이 심해졌다"고 말한다. 휴일에도 업무상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가하면 운전 중에도 끊임없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전화를 받으면서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는 “팀원 잘못도 내 잘못이다. 역할 자체가 그렇다. 남들에게 좋은 선배, 능력 있는 팀장으로 인정받고 싶다. 그런데 정작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풀 데가 없다. 누군가에게 털어놔봤자 해결도 안되기 때문에 그냥 혼자 삭힌다"고 말한다.

김현정 국립중앙의료원 교수는 "번아웃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 중 완벽주의자나 책임감이 강한 경우가 많다. 뭔가 해내야만 하고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여기면서 자신을 더 소진시키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자신이 몰두했던 일에서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을 경우에도 허탈감으로 인해 무기력증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주부 강형주씨는 "신랑, 아이들, 시부모님을 위해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다. 그러다보니 정작 내 삶은 없었고 아이들과 신랑이 내 삶인 줄 알고 30년간 살았다.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는데도 보이는 게 없다. 사람들 만나며 얘기를 들어보면 내 인생이 초라해보인다"면서 눈물짓는다.

김현정 교수는 "주부라는 타이틀이 보상이 없음에도 요구되는 건 굉장히 많다. 남편 내조는 물론 아이들 양육, 며느리까지 여러 역할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엄마들이 많다. 그런 것들이 큰 압박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의 야수 /출처=네이버 영화

 

무기력증과 더불어 '번아웃 증후군'을 겪는 사람의 경우 공격적이고 위협적인 행동을 보이기 쉽다. 이주희 이완연구소 소장 "심신이 소진해버리면 능동적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따라서 별 일이 아닌 상황에 대해서도 위기 상황으로 인식하고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고 여기고 공격하게 되는 것이다"고 말한다.

최근 한 운전자가 고속도로에서 다른 차량을 위협했던 사건이나 어린이집 교사가 원생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둘렀던 일 역시 분노 조절을 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는 게 범죄분석 전문가들의 견해다.

한편 윤대현 서울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소진 증후군에서 가장 우려되는 점은 자살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심한 우울감이 죽는 것과 사는 것이 별 차이가 없다고 느끼게 하고 결국 자신에 대한 가치를 잊어버리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속적인 스트레스에서 오는 번아웃 증후군을 인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만성적인 피로와 스트레스에 대해 별다른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은 물론 일부 대학생과 초등학생도 학업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번아웃 증후군을 겪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들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편이라고 답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70%는 번아웃 증후군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지만 여전히 개인적으로 극복해야하는 문제로만 여겨지고 있다. 반면 전 국민의 25%가 번아웃 증상을 보이고 있는 독일에서는 예방과 치료를 위해 각종 보호장치를 마련해놓고 있다.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고용불안과 경쟁심화에 시달린 독일 국민들은 심각한 번아웃 증후군을 겪었고 이는 범사회적인 문제로 떠올랐다. 이에 독일 정부는 번아웃을 겪고 있는 이들이 쉽게 치료받을 수 있도록 지역사회마다 필요한 시설을 마련해 놓는가하면 독일 직장에선 번아웃 진단 환자가 잠시 업무에서 벗어나 치료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독일 정부는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연금보장과 의료보험 적용이 가능한 법 체계를 마련해놓고 노동보호법과 사회법 분야에서 관련규정을 세밀하게 명시하고 있다. 독일 의회는 직장 스트레스로부터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 고용주는 근로자가 정신적 부담을 느끼는 작업장의 환경을 개선해야 하고 정부가 이를 감독하는 내용이다.

채정호 교수는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중독은 말리는 사람이 있지만 일 중독은 오히려 칭찬받는다. 물신주의 사회에서 사람 중심의 가치관으로 변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추적 60분' 제작진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쌓여가는 스트레스와 피로에 몸과 마음이 소진돼간다"면서 "휴식은 개인에게 주어진 보상일 뿐 아니라 이 사회를 나아가게 만드는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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