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임금 예물로 한반도 최초 이주한 낙타들의 수난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고려는 우리 민족사에서 위대한 고구려를 정통으로 만들어주는 중요한 고리다. 삼국의 통일은 신라가 아니라 고려에 이르러 완성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간혹 배웠음을 내세우려는 사람들은 이런 얘기가 다 허세일 뿐이고 현실은 고려 또한 신라 체제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신라 정통을 시사하는 여러 자취를 남긴 것이 이들에게는 하나의 근거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하루만 살펴보는 근시안만 가진 사람들의 비좁은 소견이다. 역사관이 없는 이런 주장으로 인해 중국의 동북공정이 우리에게는 역사침탈처럼 악용될 소지가 발생한 것이다. 동북공정이란 원래 다민족 국가인 중국이 체제통합을 위해 만든 것으로, 공산주의를 통해 유지하던 다민족 통합이지만 이념의 힘이 약해지면서 다른 수단을 찾게 됐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동북공정이 아무리 내부 통합의 목적이라도 우리 스스로 고구려 종가임을 마다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역사 침탈의 여지가 비롯될 수 있는 것이다.

▲ 고려태조 왕건의 초상화. /사진=퍼블릭 도메인.

고려는 개국군주 왕건의 통치에서부터 건국과정, 국가 형성과정에서 고구려의 후예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왕건이 거란과 외교 마찰을 자초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지 6년이 되는 942년, 거란이 사신과 낙타 50필을 선물로 보내면서 화친을 제의했다. 거란은 926년 우리 민족국가인 발해를 무너뜨리고 동북아시아 북방의 새로운 패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태조 왕건은 거란의 화친 제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발해를 무너뜨렸다는 이유에서다. 사신 30명은 귀양 보내고 낙타들은 만부교라는 다리 아래 묶어두고 먹이를 주지 않아 끝내 굶어죽게 만들었다. 역사를 배운 사람들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왕건은 일찍부터 지금의 평양에 서경을 건설해 고구려 고토회복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후삼국 쟁패 과정에서는 한 때 신라를 상국으로 모시는 정책도 취했지만 이는 오로지 고구려 패망 후 200여년 세월의 현실을 감안한 방편이었을 뿐, 그의 원대한 민족사관은 절대 고구려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고구려가 망하고 211년이나 신라 통치를 받던 877년 태어난 왕건이 이러한 민족 개념을 가졌다는 것은 고구려가 한국인들에게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DNA의 뿌리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사신을 귀양 보낸 것은 당시 외교 상식에 비춰볼 때 상당히 이례적이고 적대적인 조치다. 훗날 현종 임금 대에 세 차례나 전쟁을 치른 갈등이 이때부터 비롯됐다.

살아있는 낙타를 굶겨 죽인 것 또한 이미 그 때 한민족의 양식에서는 좀 심한 조치에 해당한다. 당시 민족 신앙인 불교뿐만 아니라 점차 확산되고 있는 유교의 관점에서도 산 짐승을 헤치는 일이 결코 사람의 도리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개국 임금이 벌인 일을 누가 함부로 옳다 그르다 평하겠는가. 사관이 냉정하게 기록한 사실을 저마다 배우기는 하되, 그에 대한 평가를 입 밖으로 드러낼 수는 없는 세월이 흘렀다.

이것을 다시 거론한 것은 그래도 되는 사람, 즉 왕건의 후손 임금이다.

고려 26대 임금 충선왕은 ‘충’자로 시작하는 몽고침략기 왕 중에서는 계몽군주에 속하는 사람이다. 중국을 통일한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고려의 문물 진흥을 위해 많은 정책을 펼쳤지만, ‘외가집’에 해당하는 원나라 심양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폐습이 있었다.

충선왕이 아끼고 신뢰하는 고려의 대신으로, 유명한 학자이기도 한 이제현이 있다. 오늘날 많은 저술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는 큰 선비다.

이제현은 자신의 저서 역옹패설에서 어느 날 왕과의 대화를 회상하고 있다. 정황으로 봐서 심양에 머무른 충선왕을 찾아간 자리가 아닐까 한다. 충선왕은 이곳에서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들과 이제현 등 고려 학자들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덕릉(충선왕)이 일찍이 신 제현에게 ‘우리 태조 때에, 거란이 탁타(橐駝. 낙타)를 보낸 것을 다리 밑에 매어두고 꼴이나 마태를 주지 않아 굶어죽게 하였다’고 말했다.”

왕은 “낙타가 중국에서 생산되는 건 아니지만 중국에서 양축하지 않은 적이 없고, 나라의 군주가 수 십 마리 낙타를 가지고 있으나 그 폐해가 백성을 상하게 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며 “물리치고 안 받으면 그만이지 어찌 받아가지고 굶겨서 죽이는 데에 이르게 하였을까”라고 질문했다.

배운 것 없는 무식한 사람도 이런 질문에는 “너희 할아버지 한 일을 왜 나한테 물어?”라며 조심스러워 지게 된다. 하물며 이제현은 당대의 제일인 도학자이며 국가의 개국 태조에 관련된 일이다. 함부로 대답했다가는 용서 못 할 불경을 저지를 일이다.

“왕업을 창시하여 왕통을 자손에게 영원히 전하는 임금은 그 보는 것이 멀고 그 생각하는 것이 깊어서 후세에서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이제현은 어려운 말문을 열었다.

학문이 깊은 신하답게 옛날 임금들의 고사를 우선 제시했다. 송나라 개국태조 조광윤이 궁궐 안에서 산돼지를 길렀다는 얘기다. 4대 임금인 인종이 산돼지를 궁에서 내보냈지만 나중에 요인(妖人)을 얻었을 때 생피를 채취할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현은 조광윤이 이것까지 내다본 것이라고 하자니, 너무 실없다고 깨달았는지 “이 또한 정론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한걸음 물러섰다. “송 태조의 돼지 양축이 피를 채취하는 것보다 더 큰 것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우리 태조가 이러한 일(낙타를 굶겨 죽인 일)을 한 까닭은 장차 오랑캐들의 휼계를 꺾으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또한 후세의 사치심을 억제하려고 한 것인지 아마 반드시 미묘한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제현은 “이것은 전하께서 공손히 묵묵히 생각하여 힘써 행하여 몸소 본받을 것이고 어리석은 신이 감히 경솔하게 논의할 바가 아닙니다”라고 말문을 닫았다.

태조의 일은 신하가 함부로 말할 일이 아니거니와 임금께서도 뭐든지 본받기를 우선하라는 얘기의 행간에는 ‘대답 잘못했다가 제 목이 달아날 일은 묻지 마소서’라는 뜻도 있지 않을까 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왜 선비들이 공교육제도를 외면하고 절에 가서 스님들에게 사교육을 받고 있는가로 옮겨간다. 이제현은 무인시대를 거치면서 무인들이 선비를 멸살한 까닭에 학문이 높은 선비가 승려행세를 한 까닭이라며 이것이야말로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고 학문부터 장려한 뜻을 본받으셔야 한다고 또 한번 강조한다.

이제현이 애써 가부의 판단을 모면하려는 것은 사실 태조 왕건의 낙타 아사 조치가 도리에 부합하지는 않는다는 비판을 감추려한 것으로 보인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아끼는 마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의 가치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 낙타가 서울대공원 내 낙타 방사장에 격리돼 있다. /사진=뉴시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의 여파로 서울대공원의 낙타도 격리조치 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낙타는 태조 왕건 때 거란이 보낸 낙타와는 태생부터 다르다. 한국에서 낳고 자란 짐승으로 중동이나 사막구경 한번 한 적도 없다하니 낙타에게 생각이 있다면 참으로 억울할 일이다. 또 한편으론 구경거리 스트레스를 벗어난 것이 낙타에게 더 좋은 것인지, 동물 전문가가 아니어서 판단하기는 어렵다.

인터넷에서는 낙타 격리를 두고 조롱하는 게시물도 넘쳐나고 있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정부 대책에 대해 공감보다 비판과 조롱이 갈수록 앞서가고 있다. 이것은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다.

각자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지금 당장, 그리고 근본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나의 본분인가를 따지기보다 윗분에게 “이거 큰 일 아닙니다”라는 보고부터 하려고 소임을 저버린 결과가 누적돼 이런 불신이 깊어졌음을 지적한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