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사구팽을 감수한 명군들과 간신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정묘 병자호란 시기에 등장하는 명나라 장수로 모문룡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조선의 가도에 독자적인 기지를 건설하고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에 대항했다. 조선에 대해 무리한 곡식 요구를 했지만 명나라 관점에서는 그는 혼자서라도 적에 대항한 장수다.

명 청 두 나라의 운명을 알고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로서는 모문룡이 청나라 군대에 최후를 맞았을 것으로 추측하기 쉽다. 그러나 그를 죽인 것은 명나라 산해관의 총사령관 원숭환이다.

그렇다면 원숭환은 제 나라 장수를 죽인 나쁜 사람으로 여기기 쉽겠지만, 원숭환이야말로 명나라 최후의 충성스런 명장이다. 몰락한 간신 위충현 계열의 모문룡이 발호가 심하다하여 그를 처단한 것이다.

▲ 명나라 말기 산해관의 명장 원숭환의 초상화.

원숭환 또한 청나라 군에 패해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명나라 황제 숭정제에 불려가 처형당했다. 숭정제의 까닭 없는 의심과 시기는 원숭환에 대한 분노로 폭발해 그를 능지처참했다.

하지만 숭정제 또한 주색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한 혼군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의심이 지나친 용렬한 군주로 끝내 패망을 초래하긴 했으나 그의 형 천계제의 통치를 어지럽힌 간신 위충현을 숙청하고 검소한 자세로 통치에 임했다. 단지, 자신의 그릇으로 감당할 수 없는 난세를 만난 탓에 이자성 반군의 입성 직전에 아들딸을 모두 죽이고 자신도 자결했다.

충신이 충신을 죽이는 것이 명나라 말기에 반복된 일이다. 한 두 사람 역적에 의해 망한 것이 아니다. 국가 시스템이 아예 망가져 버린 것이다.

애초 개국태조 주원장과 명나라 최고 명군 성조 영락제부터 환관들이 비밀 정보기관으로 대신과 장수들을 감시하는 나라였다. 순리를 어기는 이런 국가가 300년 가까이 이어진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중국 대륙의 민중들에게는 불운한 일이었다.

명나라보다 앞선 송나라도 명나라처럼 북방 민족에게 패망한 중국 왕조다. 청나라 조상인 금나라에 밀려 남송으로 쫓겨났다가 몽골족의 원나라에게 완전히 망했다.

남송의 악비는 줄곧 밀리던 송나라 군세를 일시 회복시켜 실지 회복의 꿈을 갖게 했다. 그러나 재상인 진회의 모함으로 불운한 최후를 맞았다. 오늘날에도 악비 묘역의 진회 동상은 중국인들이 침 뱉고 모욕하는 명소(?)가 되고 있다.

전선에 나가 적을 상대하는 장수를 도망만 다니는 간신들이 모함하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한국도 조선의 영웅 이순신이 하마터면 내부의 적에 의해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있다.

이런 어리석은 일은 왜 자꾸 반복되는가. 근본 원인은 간신이 자기 자신을 간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나야말로 가장 애국자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기를 쓰고 진정한 충신을 모함해 끌어내리는 것이다. 여기에 공을 세운 장수에 대한 임금들의 의심이 더해져 끝내 국가에 불행한 일을 초래한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스러운 점이 있다. 간신들의 충신 모함, 용렬한 군주의 명장 의심을 성공한 군주들의 ‘토사구팽’과 어떻게 구별하느냐는 것이다.

간신은 스스로 간신이라 생각하지 않고, 혼군은 스스로를 명군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자기는 지금 명장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토사구팽’을 한다고 생각한다.

“저놈은 공이 많아 교만해 졌으니, 이제 적도 토벌한 터에 없애버려야겠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는 토사구팽은 기원전 201년 한나라의 명장 한신이 남긴 말이다.

성공한 군주의 ‘토사구팽’ 교본에 해당하는 것은 소설 ‘옹정황제’ 전 10권 가운데 제6권이다.

▲ 청나라 세종 옹정황제.

앞선 5권말에 서쪽 몽고족 반란에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출정한 연갱요가 장차 임금의 권위에 도전할 인물로 여겨서 단계적으로 제거하는 과정이 책 한권으로 펼쳐지고 있다.

토사구팽이란 말 자체를 생겨나게 한 한고조 유방은 한신 뿐 아니라 팽월, 영포, 진희, 노관 등 무수한 인물을 토사구팽했다. 거병 기간 군사 좀 부려본 공신은 전부 제거한 것이다.

한국 역사에서 고려 마지막 희망이었다던 공민왕도 마찬가지다. 특히 외침이 많았던 그의 치세에서 외적을 물리친 장수는 거의 살아남은 자가 없다. 홍건적 20만 대군을 물리친 정세운, 이방실 등 장수들이 승전 후 참소로 목숨을 잃었다. 공민왕 시대에는 외적을 물리치고 나면 곧바로 공을 세운 장수들이 최후를 맞았다.

만약 공민왕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충분히 왕의 시선을 집중시킬 만큼 성장한 이성계 또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사극에서는 김용이나 이인임 같은 간신들이 왕의 총기를 흐리고 충신을 모함한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큰 틀에서 이 때 역사를 살펴보면, 의심 많은 왕이 김용 이인임 등을 도구로 활용한 것으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임금들이란 원래 그런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토사구팽을 해서라도 나라를 지키는 임금과 충신을 죽인 망국 군주의 차이는 무엇인가.

장수를 죽이더라도 적을 이기고 난 후냐 아니냐는 차이인 것이다.

▲ 조선태조 이성계도 공민왕 생전에 임금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장수로 더 빨리 성장했다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유방이 무수한 토사구팽을 한 것은 항우가 죽고 초나라가 완전히 패망한 뒤다. 옹정황제가 연갱요를 죽인 뒤에도, 연갱요가 평정한 서부 몽고 접경에서 더 이상 소란은 없었다. 공민왕은 하나의 적을 토벌하면 토벌한 장수를 죽였고, 새로운 적이 나타나면 새로운 장수를 발탁해 토벌했다. 새로 발탁한 장수가 어느 정도 성장해 또 공을 세우면 그 때 죽였다. 물론, 공민왕의 지나친 의심 또한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는 고려 중흥 군주가 되지 못했다. 의심할 바에는 없애 버리자는 강박관념이 너무 심해 충역의 구분을 못한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결과를 알고 역사를 보니 간신을 욕하는 것이다. 그러나 간신과 혼군들은 제멋대로 ‘이미 적은 다 사라졌다’며 자축하고 벌써 그 다음 잿밥 다툼에 골몰해 들어간다.

나라에 우환이 아직 다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앞장 서 싸우는 사람을 뒤에서 헐뜯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적이 아직 눈 앞에 남아있는데 이들의 눈에는 이 난리가 끝난 후 저 인간이 잘난 척 할 모습만 들어온다.

차라리 내 국민들을 적에게 내줄지언정 내 자리를 저 인간에게는 못 준다는 심보가 발동한다. 그래도 그들 스스로는 자기가 나라 지키는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따지고보면 착각을 해야 이런 짓이 가능한 법이다. 멀쩡한 정신으로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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