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정치싸움보다 '가격 왜곡'의 부작용에서 교훈 얻는 것이 어떨지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독일 친구가 그리스 사태에 대한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를 페이스북에 올렸다. 독일 같은 북유럽 국가들이 순진한 그리스를 부추겨 막대한 이익을 얻은 후 지금의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내용이다.

그리스의 유로존 가입은 2002년 이지만 독일 투자자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이를 예상해 그리스 채권을 대거 사들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유로가입 이전부터 그리스의 드라크마 채권금리가 크게 떨어져 독일 투자자들은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고 지적한다.

독일 친구가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나는 “너도 1990년대에 그리스 채권을 산 게 있으면, 지금 네가 독일에 내는 세금을 그리스에 쏟아 부어도 억울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런 채권 하나도 산 것 없이 세금만 내고 있으면... 안됐네. 친구”라고 대답했다.

그는 “다행스럽게도 나는 지금 독일이 아니라 한국 정부에 세금을 낸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에 있는 남북 평화와 관련된 독일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 /사진=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 페이스북.

최근 며칠 국내 언론에서는 그리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제시되고 있다. 그리스 국민들이 억울하다는 것이다. 마치 복지파티로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은 사람들로 비난받는데 유럽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 편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런가하면, 사태 초기부터 여전히 복지 방만으로 위기에 빠진 그리스를 거울삼아 한국도 절대로 복지를 남발하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릴 높이는 언론도 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언론이 어딘지는 굳이 기사를 보지 않아도 대부분 독자들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평소 한국 정부에 대한 보도 성향이 어땠는지에 따라 그리스 보도의 어조도 갈리고 있다.

‘진영 논리’ ‘정파 논리’에 따른 흑백의 잣대로 저 멀리 떨어진 외국의 경제 위기를 재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웃나라도 아닌 먼 나라 위기야 어떻게 해석하든 무슨 상관이겠냐 할지 몰라도, 경제위기란 찬찬히 뜯어보고 살펴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이마저도 이렇게 ‘친박’ ‘비박’ ‘반박’ ‘배박’하는 식으로 덤벼들어서 뭘 배우고 남길지 좀 심난하다. 자본의 속성이 실제 경제에서 벌이는 파란을 직접 겪지 않고 남의 나라 사례를 통해 교훈을 얻는 것은 이 나라 관료와 학자들에게는 ‘횡재’인 것인데, 배가 산으로 가는 논쟁은 이런 기회를 걷어차는 일이다.

그리스 복지 체제가 경제 위기와 전혀 무관하다는 식의 최근 일부 시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런 주장 펴는 사람들도 본심으로 ‘전혀 무관하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편향된 시각을 바로잡겠다는 의도일 것으로 본다.

50대 초반에 은퇴해 연금으로 생활해 더 이상 일할 생각이 안 나도록 하는 연금제도는 분명히 지나친 것이다. 그리스와 채권단 또한, 연금 수령 연령을 60대 중반 이후로 늦추기로 합의했었다.

더구나 그리스 정부가 이웃 모든 나라와 경제위기 타결에 매진해야 할 때, 섣부른 ‘정치 게임’을 벌이는 것도 신뢰를 얻는 것과는 정반대 행동이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전문가들이 아니라 정치인들이 나서서 해결하자”는 주장을 하는 데, 1997년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김대중 당선자는 후보 시절, 국제통화기금(IMF)과의 재협상을 주장해 그의 당선과 함께 한국의 구제금융 약속 준수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됐다. 그러나 그는 직접 국민들 앞에 나서 “채무불이행(디폴트)이 발생하면 뭐든지 직접 현금을 주고 사와야 한다. 겨울철 에너지도 현금이 있어야만 살 수 있다”며 체결된 협정에는 철저한 준수를 약속했고 위기 극복의 국민적 합의와 합심을 이끌었다.

▲ 뉴시스가 정리한 그리스 관련 각국 정상 입장. /사진=뉴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채권단과 협상을 하는 와중에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만나고 엄청난 환대를 받는 모습을 보였다. 치프라스의 주머니에 유로화가 떨어지더라도 ‘루블화 플랜B’가 있는 듯한 액션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리스 본국에서는 장관과 주요 당직자들이 틈만 나면 1980년대 제3세계 이론 교과서에 등장하는 “제국주의 협박”과 같은 단어를 쏟아냈다. 노년에 접어든 유로 관계자들이 이제 마흔 살 젊은 그리스 지도자들로부터 ‘착취적인 자본가’ 취급을 받으며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스와 협상 전면에 나섰던 사람들이 지금 질색한 모습으로 돌아앉은 것이 전혀 이해 안 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최소한 정치적 기술만큼은 탁월한 것으로 보이는 치프라스 총리 입장에서, 그의 행보는 불가피한 면도 있기는 하다. 지난 5년 긴축정책 타파를 이유로 집권했으니 갑자기 입장을 전환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스 국민들이 ‘아무리 그래도 디폴트는 면하자’는 분명한 신호를 주기 전엔 ‘변덕스러운 마르크스주의자 코스프레’를 계속해야 하는 입장이다. ‘erratic Marxist’는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이 자신을 묘사한 표현이다.

하지만, 당초 다른 국내 언론이 주장한 ‘복지망국론의 교훈’ 또한 퍽이나 공감하기는 어렵다. 생각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80% 이상 정치적 주장으로만 들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사람 의식구조에, 한국의 정치구조, 역사성에 복지 방만으로 국가가 파탄 나는 일을 실감나게 설득하려면 그렇게 아무나라 일 하나 덮어놓고 들고 오는 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50살이 돼서 연금 받으려고 일손을 놓기는커녕, 한국은 70 80대 노인들조차 생계 돕겠다고 파지를 걷으러 다니는 사람들이다. 학교 무상급식 때문에 나라가 거덜 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복지망국론’인지. 심지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전염병에도 공공의료원을 폐쇄하기까지 한 나라다. 마침 그리스 망국론이 제기된 것이 2012년 대통령선거철이었다. 요즘 ‘그리스 국민들 억울하다’는 식의 보도 행태는 이런 순수하지 못한 기존 접근에 대한 반론의 범위 내에서 이해하면 되겠다.

그리스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 중에서 가장 와 닿는 얘기가 있다면, ‘가격의 왜곡’이다.

지난 5년 긴축조치를 했는데도 왜 해결을 못하고 위기는 더욱 심화됐나. 그리스 통화에 대한 절하를 통해 위기가 ‘가격’에 반영돼야 하는데 유로화 통합에 묶였기 때문에 그런 경제의 자연치유 기능이 작동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최근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가 이런 주장을 내놓았다.

손상된 경제는 그에 따른 가격 하락으로 재평가를 받아야 바닥을 치면서 위기 극복이 시작되는데, 지금까지 위기를 극복한 대부분 나라의 사례는 그 나라 통화에 대한 절하로 시작했었다. 그리스가 과연 유로화도 유지하면서 위기도 벗어날 지 주목되는 일이다.

무식한 사람들의 ‘진영논리’ ‘정파논리’가 유식한 사람들까지 전염된 한국에서는 그리스 문제까지 정치대립 소재로 삼고 있지만, 어느 한 구석에서 핵심을 다루는 사람들은 냉철하게 이 문제를 분석해서 필요할 때 꼭 쓸수 있는 지혜주머니로 만들어주기를 기대한다.

살다보면 혹시 어떤 얼치기가 나서서 “달러권으로 통합해 들어가자”는 헛소리를 할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때 지금 만들어놓은 ‘지혜주머니’로 두 번 다시 튀어나오지 못하게 싹을 잘라 버리면 그것이 현재 그리스 사태가 ‘타산지석’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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