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연기금의 주식투자 확대에 '연기금 사회주의' 비판 제기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국민연금의 권위가 이토록 높아진 적이 없다. 삼성그룹과 해외 펀드가 삼성의 지배구조를 놓고 대결을 하게 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에서다.

한 때는 정부의 쌈짓돈 노릇만 한다고 조롱을 받던 국민연금이다. 그러나 최근 재벌 계열사 간 합병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거대 연금에 걸맞는 투자 결정 과정을 과시하고 있다.

국민연금 투자위원회는 이번에 합병 성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일가가 삼성의 최대주주라고 해도 계열사 합병도 이제 국민연금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한 세상이 됐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이렇게 또 하나의 ‘최대 주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혹시라도 여전히 국민연금에 ‘정부 대리인’의 성격이 남아있다면 어찌되는가. 정부가 기업들 길들이는 데 국민연금의 보유 지분을 동원한다면 어느 기업이 견뎌낼 것인가.

이런 주장을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에 내놓은 사람이 있다.
 

▲ 17대 국회에서 한나라당 소속 초선 국회의원이었던 유승민 의원(오른쪽)과 이혜훈 의원. 두 사람 모두 경제 분야에서 활약했다. /사진=뉴시스

 

2004년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의 초선 국회의원인 유승민 의원은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선봉장’으로 날카로운 경제식견과 정치 감각을 자랑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정부는 주식시장 투자기반 확충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사모펀드(PEF) 관련법이 마련되고 연기금의 주식투자 비중이 확대됐는데 이런 일들이 그 해 하반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이런 정부의 작업에 대해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김무성 재정경제위원장이 이끄는 재경위의 이혜훈 이종구 의원 등은 PEF에 대해 산업은행 민영화하려는 것이냐며 반발했다. 법안이 통과되던 날 이헌재 경제부총리를 대신해 참석한 김광림 재정경제부 차관은 “절대 산업은행 민영화에 쓰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며 법안을 통과시켰다. 김 차관은 지금 새누리당의 국회의원으로 변신해 자신의 발목을 잡던 국회의원들과 같은 정당에 속해 있다.

정무위 의원들이 나선 연기금 문제는 더욱 치열했다. 특히 유승민 의원은 ‘연기금 사회주의’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었다.

정치권에서는 옳고 그름을 떠나 유 의원의 정치적 수사(修辭)술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나라당이 참여정부에 대해 색깔론 공세를 지속하는 마당에 경제문제까지 색깔론을 연상시키는 어휘를 동원해 다양한 효과를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우려와 달리 노무현 대통령이 연기금으로 사들인 주식으로 기업 경영에 간섭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유승민 의원이 여당의원이 된 2011년 이명박 정부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느닷없이 국민연금의 주주권 강화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이 또한 곽 위원장의 돌출 발언뿐이었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이슈가 된 것은 최근 SK C&C와 주식회사 SK의 합병을 반대한 것이 처음이다. 삼성물산 합병에서 국민연금의 행보가 더욱 주목받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국민연금이 순전히 주요 투자자 관점에서 판단해 대주주의 부실한 경영을 견제한다는 건, 사실 당연한 일이고 국민연금의 의무기도 하다. 또, 투자차익만을 노린 투기 펀드의 공격에서 국적 기업의 경영권을 지원하는 것도 큰 틀에서 국민재산 관리 목적에 부합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모든 결정이 과연 언제나 주요 투자자의 관점에서 이뤄질 것이냐. 이게 관건이다. 혹시라도, 고위 간부들의 인사와 관련해 정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결정을 할 소지는 전혀 없느냐. 현실적으로 국민연금은 아직 이런 의구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연기금 사회주의’라는 11년 전의 시사용어를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연기금 관치경제’의 우려인 것이다.

 

▲ 2012년 순환출자 해소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남경필 새누리당 국회의원(현 경기도지사). 남 의원은 2004년에는 기업 경영권 수호를 이유로 지배구조 개선에 비판적이었다. /사진=뉴시스

 

2004년 얘기로 돌아가자면,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 작업을 ‘좌경화 정책’인 것처럼 몰아붙이고 있었다. 남경필 의원(현 경기도지사)은 “국방비를 들여 나라를 지키듯, 삼성과 같은 기업의 경영권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12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남경필 이혜훈 등은 ‘경제 민주화’운동을 통해 순환출자 해소 등을 요구했다. 야당 시절과는 정반대로 달라진 주장을 했던 것이다.

정치인이 같은 주제에 대해 전혀 다른 입장을 내세운다는 것은 우리가 필요한 개혁을 하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정치인들보다는 재벌기업 스스로가 지배구조에 대해 더 현명한 판단을 해왔던 모양이다. 지배구조 고치라고 아우성치는 정권이 물러났어도, 변치 않는 것은 계열사 지분이 얽히고설킨 이런 매트릭스 구조는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번 삼성물산 합병 논란은 그런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삼성그룹이 괜히 일으킨 평지풍파가 아니라 손대야 할 곳을 조금씩 손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지배구조 개선 작업은 보통 조심스런 것이 아니다. 이번에도 보듯 순환고리가 끊어질 듯한 찰나의 빈틈만 보이면 즉시 대대적인 경영권 공세를 펼칠 투기세력이 전 세계에 가득하다. 2003년 SK그룹과 소버린의 사태에서 익히 경험했던 바다.

지금 대부분 재벌들의 복잡한 지배구조는 ‘적은 자본으로 더 많은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 다시 말해 ‘적은 자본으로 더 많은 회사를 소유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이런 체제에 불가피한 약점이 따르는데 ‘적대 자본의 작은 공격에 더 많은 회사를 잃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전근대적이고 취약한 지배구조를 놔둘 수는 없고 하시라도 빨리 개선이 바람직한데 섣부른 개선 작업이 오히려 치명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정부 기업 소액 투자자들 간에 신뢰가 있다면 과도기의 위험을 차단할 수 있는 장치 마련도 가능할 것이다.

이번에는 국민연금이 삼성그룹에 큰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면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국가적 방침에 따라 여전히 주주의 권익이 침해되는 시장’으로 간주돼 한국에서 대거 자금이 이탈할 수도 있는 일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2000년 이후, 한국은 이전의 상식과는 너무나 다른 시장경제로 들어섰다. 단적인 예가 2000년 말 현대그룹 유동성 위기다. 작고한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로 정몽구 회장을 방문해 형제간 협조를 이끌어냈다.

두 형제 우애로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를 극복했다는 찬사를 받았지만, 이 때부터 한동안 외환시장은 극심한 원달러 환율 상승에 시달려야 했다. 3년 전 외환위기 재발의 공포도 커졌다.

이 때 환율 상승은 외국 자금이 한국에서 대거 이탈했기 때문이다. ‘우애’를 강조한 국내 정서와 달리 해외 투자자들은 한국에서는 A기업의 부실에 건실한 B기업까지 끌려들어간다고 봤던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시장 경제는 이렇게 다각적인 이해가 교차하는 것이다. 이걸 다 감안하면서 과거에 급조한 것들을 찬찬히 풀어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놔두면 우환을 대대로 상속하는 일인데 그게 한번 터지면 곧 파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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