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도 평정한 무령왕을 굶겨 죽인 것은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전국시대 조(趙)나라는 중국 대륙의 북쪽 변경을 다스린 나라다. 중국에서 애플 제품을 생산하는 팍스콘의 공장 소재지 타이위안이 조나라 영역의 일부였다.

이 곳은 중국 전체로 보면, 북방 기마민족과 접경을 해서 대륙의 방어벽 역할을 한 곳이다. 자연히 무예를 숭상하는 전통을 갖게 됐다. 전국시대의 승자 진(秦)나라와 가장 치열한 격전을 벌인 곳이 조나라다. 한(漢)나라 시대에도 이 곳의 강한 백성들을 기반으로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고, 한 무제 때에는 흉노와의 전쟁을 치르는 전초 기지가 됐다.

조나라는 몇 번 언급했듯, 춘추시대의 최강자 진(晉)나라가 셋으로 갈린 가운데 하나다. 춘추와 전국시대의 분기점이 바로 진의 한(韓) 위(魏) 조, 3국 분할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논할 때, 우리 말로 발음이 같은 秦과 晉은 한자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강대국이었어도 셋으로 갈린 이상, 온전한 국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조나라는 서쪽의 진(秦)과 맞서고 북쪽의 흉노를 막아야 했다.

조나라의 국방에서 획기적 업적을 마련한 사람이 무령왕이다. 그의 업적은 조나라에만 그치지 않고 중국 민족 전체의 국방을 증강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 김구용 열국지에 수록된 조나라 무령왕의 모습.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에서 보듯, 정사에서 한 줄 언급된 임금은 소설에서 한 장(章)에 걸쳐 소개된다. 조 무령왕은 이와 반대로, 소설 열국지보다 정사인 사마천의 사기에서 소개된 분량이 더욱 많다.

사마천은 조나라 세가에서, 무령왕이 중국 전통의 거추장스런 복장을 버리고 기마에 간편한 오랑캐 복장, 즉 호복(胡服)을 채택하는 과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랑캐의 장점도 배워야 한다는 무령왕의 생각은 복장만 바꾼 게 아니라 조나라의 군사력도 증강시켰다. 훗날 한 무제 흉노 원정의 최일선 기지가 되는 운중을 비롯해 북방의 드넓은 땅이 조나라 영토로 확장됐다.

어려서 임금이 됐던 무령왕은 세자가 일찍 군주의 자질을 배워야 한다는 믿음으로, 임금자리를 일찌감치 물려주고 자신은 주부(主父)의 자리로 물러났다. 그러나 실질적인 통치는 무령왕이 지속했다.

그래도 어떻든 임금 자리를 물려준 홀가분함 때문인지, 그는 대단한 기행을 벌이게 된다. 임금의 아버지인 주부가 아니라, 조초라는 일개 사신으로 가장해 진(秦)나라에 입국해 진 소양왕까지 만나고 왔던 것이다. 소양왕은 진시황제의 증조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으로 무려 56년의 통치를 한 사실상의 천하제일의 맹주였다.

조나라 사신이라는 조초를 면담한 소양왕은 그의 거침없는 언사를 보면서 의문을 갖게 됐다. 사람이 아무리 잘나도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자는 어딘지 다른 법인데, 조초라는 자는 누구를 섬겨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바로 조나라의 유명한 주부라는 것을 알고 소양왕은 한동안 불안해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열국지의 시인은 주부, 즉 무령왕의 이런 처사를 혹평했다. 그저 용상에 높이 앉은 진왕을 우러러 보고 온 객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국본(國本)을 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무령왕은 어처구니없는 실책을 연발했다.

 

요즘 드라마에서 국본을 세자의 동의어로 간주하는 경우를 보는데, 예전 사극에서는 볼 수 없던 ‘국본’의 남용이 벌어지고 있다. 국본이란 말 그대로 나라의 근본인데, 어떻게 살아있는 부왕을 놔두고 세자가 “내가 국본이다”라고 큰 소리 칠 수가 있는가. 정확한 의미로는, 태자나 세자, 즉 저군(儲君)을 정하는 건저(建儲)행위가 국본을 정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국본이란 ‘세자 한 사람’이 아니라 ‘대대손손 대통의 흐름을 정하는 원칙’에 더 가까운 말이다. 정통 사극을 표방한 드라마에서 세자가 “내가 국본이다”라고 하는 장면은 너무 민망해서 차라리 퓨전사극을 보는 게 더 속이 편하다.

 

한 때 큰아들 장을 태자로 세웠다가 폐하고, 다른 아들 하로 태자를 삼았다. 주부가 되면서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 하다.

어느 날 조회에서 장이 신하로서 동생 하에게 예를 갖추는 모습이 무령왕의 눈에 불쌍하게 보였다. 측근에게 “조나라를 둘로 나눠 장에게도 나라를 만들어 주는 것이 어떤가”라는 한마디를 던졌다. 찬성을 얻지 못해서 이 말은 그냥 내뱉은 한마디로 그쳤다.

하지만, 그의 주변을 통해 맏아들 장에게 이 사실이 전해졌다. 장은 수하들과 야심을 키우다가 무령왕과 새 임금 하가 순시를 나간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

이미 장의 야심을 감지한 새 임금의 측근들이 즉각 진압에 나서 반군 주력을 섬멸했다. 장은 아버지 무령왕의 별궁으로 달아나 숨어버렸다. 진압군은 무령왕의 별궁에 진입해 장을 끌어냈고 무령왕은 북방을 호령했던 임금답지 않게 흐느껴 울었다.

진압군 장수들은 주부 무령왕의 우는 모습에 섬뜩함을 느꼈다. 저 슬픔이 분노로 변하는 날, 자신들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고 아직 어린 임금 하는 아버지 뜻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진압군은 환관을 포함해 무령왕의 모든 측근을 별궁에서 몰아내 무령왕만 남겨둔 채 별궁을 포위했다. 배고픈 무령왕은 참새 알까지 꺼내먹다가 마침내 굶주려 죽고 말았다.

대개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대결은 아버지의 승리였으나, 조나라 무령왕은 예외였다.

대부분은 아버지가 임금으로, 아들을 의심해 갈등이 빚어졌다. 한나라 무제와 여태자, 당태종과 태자 승건, 청 성조 강희제와 태자 윤잉이 이런 경우다. 국권은 여전히 아버지 수중에 있는데 아무리 아들이 수 십 년 태자라 해도 기추의 권력을 가진 아버지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무령왕의 경우는 바로 그 기추의 권력이 아들에게 넘어가 있다는 점이 차이일 것이다.

고려에서는 충선왕이 한 때 아버지 충렬왕과의 갈등을 이기고 왕위를 지켜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주권의 상당부분이 원나라에 넘어간 시기였다. 원나라 대도에서 고려의 왕위를 정할 수 있었던 우리 역사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시기다. 원나라는 충혜왕도 사람을 보내 폐위시켰다.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형제간의 갈등에서 도전자가 잠시 임금을 몰아낸 적이 있다.

주나라 양왕이 책나라 미인을 왕후로 맞이했는데, 이 여인이 양왕의 이복동생인 태숙 대와 불륜을 저질렀다. 이들은 마침내 난을 일으켜 양왕이 주나라 도성에서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불륜의 반란이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천자의 자리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춘추5패의 두 번째인 진(晉)나라 문공이 제후들을 이끌고 근왕해 태숙 대와 왕후를 처형하고 양왕을 다시 도성으로 모셔갔다. 춘추시대의 특성에 비춰볼 때, 태숙 대는 주나라 조정만 장악한 것으로 기추의 권력을 차지할 수는 없었다. 임금을 대신해 천하를 다스리는 제후들을 장악했어야만 그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었는데, 불륜 끝에 형을 몰아내는 자는 감히 바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옛날 왕가의 고사는 오늘날 대기업군의 경영권에도 종종 비유되곤 한다. 너무나 권력이 커서 부자간 천륜도 잊게하는 일이 빈번해, 여염의 정서에만 비춰 탓하기도 어렵게 됐다.

그러나 승부를 가르는 핵심은 이 또한 누가 더 큰 힘을 차지했느냐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힘은 겉으로 드러난 힘이 아니라 숨겨진 지분 구도까지 모두 반영된 것을 뜻하니 오히려 예전 왕가의 일보다 귀추를 내다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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