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효종대왕이 병자호란 때 받은 충격은 부왕인 인조 이상이었다. 그는 친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강화도에 미리 피난 가 있었지만, 그곳에서 북방 기마민족에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강화도에 청나라 군대가 밀어닥치는 참패를 생생히 경험했다.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인조도 항복의 결단을 앞당겼다.

 
소현세자와 효종(봉림대군) 형제는 전쟁 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고초도 겪었다.
 
이때의 수치를 되갚는다는 명분아래 효종은 즉위 후 북벌 준비에 나섰다고는 하는데 실제 북벌의 의도에 대해서는 참여세력마다 약간씩 생각이 달랐던 듯 하다. 골수 서인세력 가운데는 ‘오랑캐 천자를 섬길 수 없으니 우리 군대로 중원을 탈환해 명나라 천자를 복위시키자’는 황당무계한 생각으로 가담한 자도 있다.
 
북벌의 최종결정권자인 효종은 이 정도까지 꽉 막힌 것은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실용적 차원에서 북벌을 활용한 점도 엿보인다.
 
패전 후 뒤숭숭한 국가 분위기를 일신하는 국민 운동 차원에서 북벌이 톡톡이 효과를 가져왔다. 전쟁 준비 명분으로 비축한 재정은 뒷날 영조 정조 시대 국력 신장의 밑바탕이 됐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이 수지타산 적으로는 오히려 손해나는 것이었다고 해도 위기극복의 국가에너지를 결집시키는 역할을 한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임금으로서 냉정하게 북벌에 임한다고는 해도 한 인간으로서 난리 당시의 정신적 충격은 별개 문제였다.
 
북벌운동의 최선봉장으로 유명한 훈련대장 이완은 남한산성의 수어장대가 근무처였다. 어느 날 퇴근을 준비하던 저녁 무렵에 임금이 그를 찾는다는 급한 전갈이 왔다.
 
서둘러 입궐하니 효종이 그에게 물었다.
 
“적의 추격하기가 병자년과 같이 급하다면 경은 무엇으로써 과인을 보호하겠는가.”
 
이완은 “병사들에게 자루를 차고 다니게 하여 급할 때 여기에 흙을 담으면 보루를 만들어 적을 막아내도록 할 것입니다.”
 
또 다시 엄습해 온 끔찍한 기억에 불안한 저녁을 보내던 임금은 “경이 이와같이 준비를 해 둔다면 과인이 무엇이 걱정이겠는가”라며 흡족해 했다.

▲ 훈련대장 이완이 기약없는 북벌의 일념으로 병사들을 조련하던 남한산성 수어장대.
이완은 벼슬이 우의정까지 이르긴 했지만 오로지 무인(武人)의 한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그가 북벌의 시대에 새로이 부각되는 요직 훈련대장에 임명되자 맨 처음 한 일은 이사를 가는 것이었다.
 
지금의 대학로나 삼선교 근처이던 곳에서 안국동으로 급히 이사를 갔다. 이유는 원래 집이 효종의 친동생인 인평대군과 같은 동네에 있다는 것이었다.
 
“군권을 담당한 장수로서 행여 유력한 왕족과 관련된 구설에 올라서는 안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판에는 여러 세력들이 이해를 다투는 법. 임금의 친동생과 같은 거물 왕족은 본인 뜻과 무관하게 따라다니는 자들이 세력을 형성하게 마련이었다.
 
막대한 군사력과 그에 따르는 예산을 만지게 된 장수로서 이완은 정치 다툼에 걸려들 일체의 빌미를 일소했던 것이다. 정치와 철저히 무관해야 백성들의 하나된 신망을 이끌어내 북벌에도 나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국방부장관에 내정됐다가 온갖 비리 혐의로 물러난 인사는 내정 초부터 휴대폰 고리에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을 넣고 다닌다고 해서 화제가 됐었다.
 
대통령을 옛날 왕조의 임금과 동격으로 본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오늘날의 민주세상에서 대통령은 일개 정파에 속한 정치 관계자이기도 하다. 서거한 전임 대통령이지만 지금 대통령의 아버지라면 당장의 현실 정치와 결코 무관한 사람이 아니다. 임명 초기부터 공연히 정치적 분란의 소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다른 사유로 본인이 후보를 사퇴했으니 그의 휴대전화 고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런저런 얘기할 일이 없어졌다.
 
국민들로부터 호평을 받는 국방부장관들의 대체적인 특징이 정권과 무관하게 장수의 소신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방부장관을 지내고 박근혜 정부에서 또다시 중용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같은 경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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