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학정치가 조광조의 벗이었던 갖바치의 지혜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연기자 이정길이 이제 나이 70을 넘었으니 ‘원로 배우’라고 할 만하다.

▲ 이정길의 이미지는 여전히 1970년대 '제3교실'에서 문제학생들을 지도하러 다닐 때의 단정한 모습 그대로다. /사진=뉴시스

그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라면 김종필 전 국무총리라고 답하는 사람이 간혹 있다. 나이 30대 이하 젊은 층이나 예전에 드라마를 잘 안 본 사람들의 반응일 것이다.

김 전 총리는 이정길이 맡았던 배역 가운데 가장 유명한 실제 인물일 뿐이지, 이정길의 연기 이미지와 딱 들어맞는 사람은 아니다.

이정길은 전성기였던 1970~1980년대 초 MBC 일일극의 남자 주인공 역을 도맡다시피 했다. 이 시절 그의 이미지는 학식을 갖추고 건실한 엘리트였다.

그래서 내가 꼽는 그의 대표적 이미지는 1970년대 청소년드라마 ‘제3교실’의 주인공 선생님이다. 청소년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주요 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할 무렵 나온 드라마다.

매주 그는 문제 학생들을 지도하러 맹활약 했는데, 그가 주로 잡으러 다닌 문제아는 ‘모팔모 대장’ 이계인이다.

이정길은 현대극이나 사극이나, 지적이거나 학문이 출중한 역을 주로 맡았지만, 사극에서 조선의 최하위계층 백정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 이 장대한 시리즈에서 앞서 조선의 기틀을 가진 명군 태종 이방원으로 나왔던 사람이 100여년 후에는 백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말이 백정이지, 그 드라마 전체에서 가장 지혜로운 ‘재야의 현인’이었다.

1985년 조선왕조500년 풍란의 첫 장면에서 곱상한 귀부인이 산사를 찾다 갑자기 토사곽란으로 땅바닥에 데굴데굴 구른다. 증상을 알아본 갖바치 이정길이 부인에게 응급요법을 써서 살려낸다. 하지만 지나가던 다른 양반이 이를 갖바치가 양반집 여인을 겁탈하는 장면으로 오해를 하고 이정길은 큰 봉변을 당한다. 살려낸 부인은 ‘풍란’의 여주인공 정난정(배우 김영란)의 어머니다.
 

▲ 이정길은 1996년 SBS 드라마 '임꺽정'에서도 1985년 '풍란'에서와 같은 인물 갖바치로 등장했다. /사진=CNTV 화면캡쳐.

 

갖바치는 피장(皮匠), 즉 가죽기술자다. 가죽은 짐승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니, 사실 갖바치는 조선시대 최하층인 백정과 동급인 사람인 것이다.

비록 최하층민이었지만, 그의 지혜는 참으로 놀라워서 당대의 현인 조광조와도 친교를 맺을 정도였다. 갖바치는 조광조가 중종의 신임을 등에 업고 개혁을 추진할 때도 “공(公)에게 불운이 있다면 임금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광조가 다음날 실각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을 때, 갖바치는 불쑥 나타나 “이제 하직인사를 드리려고 하오”라며 벗의 운명을 예고한다.

풍란의 극본을 쓴 사람은 신봉승이다. 조선시대 사극의 거장이면서 보수적 해석을 중시한다는 신봉승이 어떻게 이런 파격적인 극중 인물을 만들어냈을까.

갖바치는 사실 병해대사라는 실존 인물을 각색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병해대사에 관해 아주 짤막하게 한 두 줄 전하는 사연에 생생한 생명력을 불어넣은 사람은 신봉승이 처음이 아니다.

벽초 홍명희의 1928년 소설 ‘임꺽정’이 갖바치를 400년 만에 부활시켰던 것이다. 한동안 ‘임꺽정’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필독도서였다. 아마 신봉승 또한 젊은 시절,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감명 깊게 읽었을 듯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작품은 출판돼서도 안 되는 소설이 돼 버렸다. 작가 홍명희가 해방 후 월북해 북한에서 부수상까지 지냈기 때문이다. 1987년 민주화가 되고 얼마 후 이 책의 출판금지도 해제됐다.

벽초의 말투가 그대로 살아있는 임꺽정을 읽어보면, 우리가 갈수록 잊어가고 있는 한국말 특유의 멜로디가 느껴진다.

언어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도 이 소설의 말투를 ‘일제에 때 묻지 않은 우리말의 보물 창고’라고 평가하는데, 내가 읽어본 소감은 시골 밥맛에 가깝다.

도시 사람들 휴가 때 소문 듣고 찾아오라고 반찬만 수 십 가지 나오는 그런 상품화된 ‘시골 밥상’이 아니라, 시골 할아버지 집에 갔을 때 밥만 수북하게 나온 그런 시골 밥 맛이다.

장작으로 지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데 별다른 고기반찬 없이 밥만 먹어도 그 맛이 달기 이를 데 없다. ‘밥을 달게 먹었다’는 표현이 우리말에 왜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벽초의 임꺽정에도 ‘밥을 달게 먹었다’는 구절이 어딘가에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걸 읽으면서 밥맛도 생각나지만, 글맛이 또 이렇게 달구나 하는 실감을 했었다.
 

▲ 충북 괴산군 벽초 홍명희 생가앞 임꺽정로. /사진=뉴시스

 

아는 사람이 최근 그의 페이스북에 피장재일(皮匠再日)이라는 4자 성어를 올려놓았다. ‘갖바치 내일모레한다’는 뜻으로, 금새 끝날 것처럼 호언장담하던 것과 달리 약속 날짜를 자꾸 늦추는 행태를 꼬집는 말이다.

피장이란 말을 보자마자, 갖바치의 이정길이 생각나면서 벽초 홍명희에 이르게 됐다.

갖바치가 약속 날짜를 자꾸 늦추는 것도 나름대로는 지혜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최하층민인 갖바치로서 요구받은 날보다 하루이틀 더 걸린다 말하기도 어려웠으니 일단은 시킨 날까지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렇다고 약속날짜 못 지킨들, 갖바치에게 어쩌겠는가. 지체 높은 양반들이 갖바치 연장을 뺏어서 백정들처럼 직접 가죽 손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래저래 갖바치 하는 대로 맡겨야지 별 수 있는가.

그 대신, 양반의 허세는 남아있어서 무조건 피장에게는 서둘러 마치라고 알지도 못하는 날짜를 들이댔으니, 세상 가장 쓴 맛 다 보는 갖바치가 이런 철딱서니 없는 속내를 모를 리 없다.

피장재일에 담긴 불신의 원천은 갖바치가 아니라, 가죽질 알지도 못하면서 다그치기나 하고 허세나 부린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갖바치 백정이 없는 오늘날에서도 여전히 ‘갖바치 내일모레’하는 습성을 당연한 듯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불가피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만 매번 이래서는 곤란하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천민으로 전락시키는 나쁜 습성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