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들의 최고스포츠 사냥, 무수한 정변의 무대였다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사냥은 옛날 사람들에게 오늘날의 골프와 같다. 모처럼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운동을 하는 것이다.

귀족층의 사냥은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노루 사슴 뿐만 아니라 곰이나 호랑이 또한 사냥 대상에 포함되니 장비가 좋아야 한다. 또한 짐승들을 몰아올 몰이꾼도 필요하다. 서민은 이런 사냥을 흉내낼 수도 없다. 먹고 살기 위한 생계형 수렵과는 차원이 다르다.

임금이 정사를 내팽개치도록 유혹하는 것은 주색잡기와 함께 사냥이 주요인이었다. 그런데 이 사냥이 무수한 정변의 무대가 됐다.
 

▲ 사마천 사기 전집(도서출판 까치) 표지의 사냥 그림. 등장한 동물의 형태로 보아 진문공이 초나라 망명 시절, 맥이라는 짐승을 사냥하는 장면으로 추측된다.

은나라는 중국에서 역사적으로 실증된 가장 오랜 왕조다. 이 때 정치는 종교와 분리되지 않았다. 왕은 있으되 태복과 같은 신관(神官)들의 도움 없이 전쟁과 같은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지 못했다.

말기의 임금 무을제는 이런 정교(政敎) 권력 분점에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 신관들의 권력마저 왕이 차지하려면 이들 힘의 배후 하늘을 무력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상을 만들어 ‘천신(天神)’이라 이름 짓고 천신과 도박을 했다. 천신이 지면 사람들이 보는데서 이 우상을 모욕했다. 가죽주머니에 피를 담아 높이 매달고는 이를 활로 쏘았다. 그리고는 “하늘을 활로 쏘았다”고 자랑했다. 그의 치세에 수많은 신관이 권력을 잃고 핍박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무을제는 어느날 황하와 위수 사이로 사냥을 나갔다. 거기서 천둥소리를 듣고 놀라서 죽었다.

왕이 이런 식으로 죽으면, 신관들로서는 잃었던 권력을 되찾게 된다. 후세 왕들에게는 중요한 교훈이라며 “하늘을 무시하면 임금도 이렇게 벌을 받습니다”라고 강조하게 된다.

증손자 제신은 임금이 된 후, 태복과 같은 신관들이 무을제의 고사를 강조할 때마다 의심을 갖게 됐다. 혹시 무을제의 죽음은 신관들이 저지른 정변은 아닐까.

제신은 달기라는 미녀 무당을 얻고 난 후에는 점보는 일을 점차 신관들에게 뺏어 달기에게 줬다. 총명함을 타고났다는 제신이었지만, 아집이 지나친 흠이 있었다. 그리고 이 때 중국 대륙은 청동기 문화가 더욱 확산되면서 정치의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이틈을 타서 크게 융성한 서쪽의 제후국 주나라가 목야의 전쟁에서 제신의 은나라 군대를 격퇴하고 새로운 천자가 됐다. 제신은 자결했다.

왕의 사냥은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이뤄지는 것이어서 전쟁을 치르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특히 백제사에서 사냥을 언급하면서 사실은 정변을 의미한 것으로 간주되는 문장들이 등장한다.

고이왕은 ‘즉위 3년 10월, 왕이 서해의 큰 섬에서 대대적인 사냥을 나가 몸소 사슴 40마리를 쏘아잡았다’고 한다.

즉위 초에 해당하는데, 고이왕은 앞선 사반왕을 정변으로 몰아냈다. 사슴 40마리가 아니라 사반왕계 인물 40명을 숙청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임금의 사냥에는 몰이꾼 뿐만 아니라 많은 경호 인력들이 동원된다. 하지만 가장 높은 수준의 경호체제가 유지되던 궁궐을 벗어난 것이다.

불만세력들은 임금의 사냥이야말로 그나마 실낱같은 정권탈취를 노려볼 기회가 되는 것이다. 특히 영웅의 기상이 지나쳐서 경호 따위 무시하는 임금이라면 이들의 기회는 더 커진다.

삼국지 오나라를 다시 일으킨 젊은 영웅 손책은 홀로 사냥을 나갔다가 앞서 자신이 숙청한 허공의 수하들에게 피습을 당했다. 자객들을 물리쳤지만 손책 또한 너무나 심각한 상처를 입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동생 손권에게 “멀리 땅을 개척하는 일은 네가 나보다 못하지만, 가업으로 일으킨 땅을 지키는 일은 내가 너에게 못 미친다”며 패업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만약 손책이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오나라가 유비의 뒷통수를 노려 관우를 죽이기보다는 북진해서 조조를 공격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뿐이다.
 

▲ 중국드라마 삼국지(三国)에서 사냥을 나간 손책이 기습을 받는 장면.

동아시아 최고의 명장 청나라 도르곤은 어린 조카 순치제의 섭정으로 1644년 청나라를 중국 대륙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1650년 장성한 조카에게 통치권을 돌려주고 사냥을 나갔다가 낙마해 사망했다.

엄청난 영웅 인생을 산 도르곤의 최후는 이 짤막한 한 줄 뿐이다. 나는 그의 사냥 또한 정변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멈출 수가 없다.

우연한 사망이 아님은 그가 죽자마자 거센 격하운동이 벌어져 끝내 부관참시까지 당했다는 점이 시사한다. 도르곤의 사망 1년 전, 친동생 예친왕 다택이 천연두로 사망한 것은 도르곤 세력에 커다란 타격이었다.

사냥 나갈 당시, 순치제의 친정권을 돌려줬는지 아닌지도 여러 다른 얘기가 전하고 있다. 그의 최후의 사냥은 순치제 측 친위쿠데타의 현장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해 본다.

사냥이 이렇듯 많은 정변의 온상이 되다보니 오히려 이를 역으로 이용한 경우도 있다. 사냥에서 다쳤다는 얘기는 역사적으로 한 두 번이 아니니 이걸로 여러사람을 속이기도 쉬운 것이다.

일부러 권력에 빈틈이 생긴 척해서 불만의 소지가 있는 사람들이 표면에 등장하도록 유도하는 책략이다.

태조 이성계의 이런 책략에 희생된 사람이 포은 정몽주다.

이성계가 아직 조선을 세우기 전, 고려의 최고 권력자였을 때 사냥에서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개경의 조정에 알려졌다. 고려 왕실 회복을 위해 은인자중하던 정몽주는 이 때 신속한 대처에 나서 정도전 등 이성계 일파 숙청에 나섰다.

그러나 곧 죽을 거라던 이성계는 멀쩡한 모습으로 개경에 돌아왔고 정몽주의 반격은 한낮의 꿈으로 끝났다. 정몽주는 자신의 저버릴 수 없는 충절이 들통 난 이상, 이성계와 같은 세상에서 목숨 연명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흉악한 자객이 기다리는 선죽교를 향해가면서 일부러 나귀 등에 거꾸로 올라탔다.

많은 사람들은 이성계 아들 이방원이 독단적으로 정몽주를 살해했다고 한다. 다음번 만필에서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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