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란 단어를 들으면 여전히 "민비"라고 고집하는 사람들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한국과 중국에 대해 잔뜩 속이 뒤틀린 일본의 산케이가 최근 칼럼에서 “조선의 민비가 사대주의를 하다 암살됐다”며 이를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과 비교했다.

명성황후를 자기들이 민비라 격하한 말버릇을 여전히 쓰고 있다. 또한 명성황후가 누구에 의해 시해됐는지 일말의 반성도 없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으로부터 사실상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침락이 시작됐다는 것도 반성커녕 언급도 없다.

다시 한 번, 일본은 과거에 대해 전혀 사과할 마음이 없음이 산케이의 칼럼에서 드러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더욱 사악한 심보를 드러내고 있다.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일은 언제든 다시 벌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대통령이든, 국내에서 찬성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외적의 후손들이 또 다시 도발을 벌이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소아를 저버리고 대아를 통해 국민이 뜻을 모으는 것이 제대로 된 나라의 원칙이다. 그런데 산케이 도발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이런 도리가 꽤 오래전부터 실종된 모습이다.
 

▲ 명성황후. /사진=위키백과

1895년, 일본의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조선의 왕후를 시해했다. 전하는 바로는 칼로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신에서 여성의 상징을 도려냈다고도 한다. 알려지지 않았던 더욱 참혹한 일이 새로이 밝혀지게 될 경우에도 우리가 미리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할 정도다.

왕후의 지위에 있던 여성이 이런 일을 겪었음은 이제 이 땅의 민중들이 무수한 학살과 수탈을 당할 것이며 또 이 땅의 여성들이 종군위안부로 끌려가게 될 운명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접하면 접할수록 거듭 민족의 통한이 깊어지는 역사의 상처다.

그런데 일부 한국인들의 태도를 보면, 오늘날에도 우리가 저런 망언을 듣도록 처신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는 산케이의 망언이나 기타 명성황후 관련 기사에 실리는 댓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만필자도 몇 차례 “민비라 하지 말고 명성황후라고 칭하라”는 글만 쓰면 만필자를 여성으로 착각한 일부가 “꼴 페미 X”라는 댓글을 다는 것을 경험했다.

조선 고종 치세에서 이하응이 실각한 후, 명성황후와 그의 민씨 일족이 벌인 세도정치가 조선의 이상 왕도정치에서 크게 벗어난 점이 분명히 있다. 조선 후기 행정체제의 효율성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명성황후는 심각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을미사변과 관련해서 명성황후는 홀로 외적의 침략에 죽음으로 맞선 여인이다. 그런 자리에서까지 온갖 험담으로 폭언을 퍼붓는 자들은 과연 한국인인가.

집안에 도둑이 들어 맞서 싸우다 죽은 며느리를 평소 시아버지를 잘 안 모셨다 해서 “그 X 잘 뒈졌다”고 폭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거기다 그 시아버지는 도둑 무리의 맨 앞에 서서 집으로 쳐들어왔다.

민족사 4200년에 천지가 뒤흔들리는 개화의 한복판으로 조선이 끌려 들어간 지 20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온 천하가 이 땅을 노리는 마당에 군제 행정개편에 누군들 100% 완벽한 해답을 제시했겠는가. 개화의 시기가 쓸데없이 늦어지기 까지 했으니 시행착오는 더욱 심각했다.

설자리 앉을자리 안 가리고 명성황후란 얘기만 나오면 일제의 앵무새들처럼 ‘민비’라고 악을 쓰고 나오는 심보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중학생 시절, ‘운현궁의 봄’이란 소설을 읽고 이어서 이보다 다섯 배는 더 두꺼운 ‘대원군’이란 소설까지 읽었다. 두 작품 모두 이하응이 주인공이다.

읽고 나니 어린 마음에, 뭔가 이하응이란 인물이 권력에서 쫓겨난 바람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됐구나라는 듯한 인상을 깊게 받았다. 두 소설 모두 을미사변에서 이하응이 일본군 낭인의 앞잡이가 돼서 경복궁에 쳐들어왔다는 사실에 대한 얘기는 없다. (1980년 당시 읽은 유주현의 대원군은 이하응이 청나라에서 돌아오는 장면에서 끝난다.)

특히 운현궁의 봄은 김동인이 지은 것으로 한 때는 필독도서나 되는 듯이 유명하던 소설이다. 김동인이 일제침략기에 어떤 행태를 보인 자인지는 법원 판결까지 나온 마당에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고종의 친부 이하응은 무수한 자들의 교활한 글 놀림 속에 마치 대단한 위인인 것처럼 각색됐지만,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조선보다도 전주 이씨 왕실의 부활이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 진안군 이방우를 비롯한 무수한 역사 속 이씨 인물들을 재평가하고 복권하는 것은 이하응 치세 10년의 주요 일과였다.

왕실만 존중한다면 아무 문제없다는 그의 태도는 홀로 외적에 맞서고 있는 며느리를 죽이려는 더러운 개들의 앞잡이로 자신을 전락시켰다. 그것은 명성황후 한 사람만의 죽음이 아닌, 국가 상실 그리고 민족 분단의 근원이 되고 말았다.

공개석상에서 이름 석자 내놓고 “명성황후가 그릇된 표현이고 민비가 아주 옳은 표현이다”라고 감히 주장하는 사람은 여태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속내는 딴판인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생각 고칠 마음이 전혀 없다.

이런 태도는 여태 지켜 본 바에 따르면 보수 성향이냐 진보성향이냐의 차이도 없다. 뭔가 나는 항상 남들을 앞선다는 자아도취가 깊은 사람들일수록 이런 식민적 태도에서 벗어나기 더욱 힘든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선의 마지막 절개를 지닌 선비 최익현이 분연히 의병을 일으킨 것은 명성황후 시해 때문이다.

대한민국 독립의 최대 공로자 백범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 청년 김창수이던 시절, 일본군 장교를 살해해 사형수가 됐던 것 또한 황후 시해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했던 때문이다.

국난의 최전선에서 적들과 싸운 선열들이 이토록 비통해하면서 마침내 거병의 계기로 삼은 것이 명성황후 시해다. 그런데 이 분들 덕택에 더운 밥 먹는 후손들이 여전히 ‘민비 민비’하며 일제 침략자 원수들의 말버릇을 따라하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단순히 호칭만 그런 것이 아니다. 무수히 일제 앞잡이들에게 조작 왜곡됐을 온갖 기록을 죄다 갖다붙이면서 마치 그동안 여성들에 대한 모든 한을 쏟아내는 듯한 악담을 퍼붓고 있다.

이 땅에 이런 사람들이 있으니 산케이가 감히 저따위 입놀림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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