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웅 조조의 '치세의 능신' 버전 진평의 고사

 삼국지에서 조조의 관상을 본 허소가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이라고 했다. 이 말에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

 
그가 난세의 간웅인 것은 역사가 입증했지만, 만약 훌륭한 한나라 황제를 만났다면 과연 능신이 됐을까. 이 말 또한 사실일 가능성이 높음을 입증하는 인물이 있다.
 
조조보다 400년 정도 앞선 시대, 한나라 개국황제 고조 유방의 참모 진평이다. 꾀가 많고 과감해 위기에 빠진 고조에게 여섯 번이나 해결의 계책을 제공한 인물이다.
 
여러모로 삼국지 조조와 흡사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 때 조조의 실제 조상은 등공 하후영이다. 그는 한고조의 재야시절부터 친구로 우직한 충성을 다했다. 400년 후 후손인 조조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다.)

고조가 흉노의 묵돌에게 7일이나 포위됐을 때, 미녀를 보내는 계책으로 강화를 맺도록 했고 용병의 달인 한신을 일체 교전 없이 생포하는 아이디어도 진평이 만들어냈다.
 
또한 그는 정책 추진에도 능하고 정치적 처신에도 귀재여서 천하통일 후에도 계속 승상으로 크게 중용됐다. 쟁쟁한 공신들이 은퇴나 반역으로 허탈한 최후를 마친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고조 유방과 두번째 효혜황제가 죽은 후 여씨들의 반란을 평정하고 고조의 또 다른 아들인 효문황제가 새로 제위에 올랐다. 진평은 반란 평정에 크게 공을 세운 주발에게 자신의 우승상 지위를 양보했다. 황제는 진평의 겸양하는 덕을 높이사 상을 내리고 진평의 말대로 주발을 우승상에, 바로 다음 좌승상에 진평을 앉혔다.
 
황제가 우승상 주발에게 “온 나라에 일년동안 옥사를 판결하는 건수가 얼마인가” 묻자 주발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재정상 수입과 지출은 얼마인가”라는 황제의 질문에도 주발은 모른다고 사죄하며 등을 땀으로 적셨다.
 
이번에는 좌승상 진평에게 황제가 똑같이 묻자, 진평은 “폐하께서 옥사 판결에 대해 궁금하시면 정위에게 물으시고 재정에 대해 궁금하시면 치속내사에게 물으소서”라고 답했다.
 
황제는 “그럼 재상들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고 물었다.
 
진평은 “위로 천자를 보좌해 음양을 다스려 사시를 순조롭게 하고 아래로 만물이 제때 성장하도록 어루만지며, 밖으로는 사방 오랑캐와 제후들을 진압하고, 안으로는 백성들을 친밀히 복종케하여 벼슬아치들이 제대로 그 직책을 이행하게 하는 것입니다”고 말했다.
 
황제는 진평에게 큰 칭찬을 내렸다. 어전에서 물러나온 우승상 주발은 “그대는 어찌하여 이런 좋은 대답을 평소 내게 알려주지 않았소?”라고 섭섭함을 드러냈다. 일찍부터 무와 문의 길을 달리한 오랜 개국공신들 사이니까 가능한 얘기다.
 
진평은 “그럼 그대는 폐하께서 장안의 도적 수를 물으셨다면 그것도 억지로 대답하려고 하였소?”라고 반문했다.
 
이 일은 주발에게, 이제 군공이 높은 공신들이 아니라 치세에 능한 사람들의 시대로 옮겨갔음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됐다. 곧 그는 사직하고 진평이 홀로 승상이 됐다.
 
뜻밖에 끊임없는 인사 논란에 시달리는 박근혜 정부에서, 이번에는 부실 청문회로 인해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에 임명된 사람이 청문회에서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거의 “모르겠습니다”라는 대답으로 일관한 것이다.
 
게다가 부실한 대답을 키득거리면서 하는 매우 볼썽사나운 모습까지 곁들였다. 여당의원들이 오히려 더 부담을 느끼고 곤혹스러운 공세를 이어간 반면, 야당의원들은 정권이 부담을 질 문제라는 상대적으로 홀가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최근의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국회방송 화면 캡춰
 
해당 부처의 서기관, 사무관이 할 일이 따로 있고 장관 차관이 할 일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부처의 기본 영역에 해당하는 업무까지 몰라서 ‘버벅’거리는 모습은 임명권자를 지극히 난감하게 만드는 상황이다.
 
또한 지금 장관의 자리를 논하는 것이지 총리, 부총리를 논하는 것도 아니다. 앞선 진평의 고사에서도 자세한 답변의 당사자로 오늘날의 장관에 해당하는 사람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 장관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으니 여당 의원의 입에서 “나도 평생 공직을 걸어왔지만, 무슨 자리에 임명되면 미리 업무를 공부하고 와야 되는 것 아니냐”는 개탄이 나오게 됐다.
 
그래도 또 한번 반전의 여지는 있다. 삼국지 방통처럼 되는 경우다. 이른바 ‘미운 오리새끼’ 시나리오다.
 
지금 해당 장관 후보자의 이미지는 요즘의 젊은 사람들에게, 수년전 공중파의 한 뮤직 방송에서 형편없는 가창력으로 등장했다가 데뷔날이 은퇴날이 된 가수와 다를바 없는 상태다.
 
이랬다가 취임하자마자 놀라운 업무 추진력을 보여준다면 정권 전체의 신망까지 급상승할 조짐은 있다.
 
그러나... 그건 오늘날 입증하기도 곤란한 수천년전 옛날의 고사일 따름이다.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에서 과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참여정부 시절, 이해찬 국무총리가 야당과 잦은 정치 분란을 일으켜 원성을 사기는 했지만 한가지 그에게는 놀라운 장점이 있었다. 숫자에 엄청나게 밝다는 것이다.
 
총리에게 대단히 유감이 많은 야당의원들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보복 차원으로 사전 질문을 생략하고 나섰지만, 이해찬 총리는 한참 전에 공무원들의 보고받은 내용을 기억해가며 상당히 근접한 숫자로 답변해 나갔다. 어찌 보면 재상은 큰 줄기만 아는 것이란 진평의 얘기도 오늘날과 맞지 않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동안 말은 번듯했던 인간들이 국록을 축낸 경우도 무수하긴 하다. 아무튼 한바탕 ‘생쇼’ 청문회가 벌어진 모든 부담은 또다시 임명권자에게 몰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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