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의 재구성 8> 격변의 생애, 술을 벗하며 살아간 한 여인의 이야기

<8회>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이번에는 이성계·이방원의 일대기에 등장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다. 고려 말 조선 초를 다루는 드라마에 고려 왕실의 여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국권 이양 과정에 그녀 없이는 정통성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의 왕비 중 한 명인 정비 안씨다. 

그런데 이 여인의 이미지가 작품마다 천차만별이다.
 

 

 

1983년 임동진이 이성계로 등장한 ‘개국’에서는 비교적 젊은 편에 속하는 여배우가 정비 안씨로 등장해 눈물을 흘리며 옥새를 이성계에 전하는 대비마마의 모습을 보였다.

1996년 ‘용의 눈물’에서는 대비마마가 갑자기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됐다. ‘국민 대비마마’라고 할 수 있는 한은진이 등장해 갈팡질팡하는 우왕을 따끔하게 혼내 가면서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이 때 한은진의 나이는 78세였다. 8순이 다 된 노령에도 왕실 최고어른의 카리스마와 기백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줬다.
 

▲ 1996년 '용의 눈물'에서 정비 안씨로 등장한 한은진. /사진=CNTV, KBS 유투브 화면캡쳐.

 

2014년 ‘정도전’에서는 다시 대비마마가 30대 한참 나이의 미녀가 됐다. 김민주가 이 역을 맡았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입을 오물거리던 기억을 남겨준 인물에 수려한 미모의 젊은 여성이 등장하니 궁금증이 안 생길 수 없다. 미녀의 등장을 반기지 않을 이유는 없지만 사극 팬의 한 사람으로 이것이 과연 타당한 연출인지 따져보게 된다. 혹시 이 또한 ‘요즘 트렌드’란 것에 작가가 굴복해 정통사극의 고증을 훼손한 것은 아닌가.

정비 안씨 출생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366년 입궁했으니 이 무렵 15~18세 정도였을 것이다. 1348~1351년생 정도로 추측한다. 고려가 망한 1392년에는 40을 조금 넘긴 나이로 보인다. ‘정도전’의 캐스팅이 더욱 사실에 타당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용의 눈물’ 감독이 이런 사실을 몰랐던 것 같지는 않다. ‘용의 눈물’은 고려 말을 짧게 다뤘기 때문에 정비 안씨 인물보다는 망국의 왕실 어른 이미지에 초점을 맞췄던 듯하다.

또한,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다스릴 때도 미모가 여전해 우왕이 양어머니뻘 되는 정비 안씨한테 호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비 안씨는 이에 부담을 느끼고 조카를 우왕의 후궁으로 맞게 했다.

‘정도전’에서 우왕(박진우 연기)이 대비전을 자꾸 찾아간다고 권신 이인임(박영규 연기)한테 야단맞는 장면은 이런 연유에서 벌어진 장면이다.
 

▲ 2014년 '정도전'에 정비 안씨로 등장한 김민주. /사진=KBS 홈페이지 화면캡쳐.

 

정비 안씨는 조선 개국 후 의화궁주로 강봉돼 1428년 타계했다. 세종 10년이다. 80세에 가까운 장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사후에는 정숙선명경신익성유혜왕대비(貞淑宣明敬信翼成柔惠王大妃)의 시호로 다시 왕실 어른의 대접을 받았다.

위키백과에서는 “강봉된 이후에 술을 가까이 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녀의 음주기록이 보여지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고려 왕조 멸망 이후, 대부분의 일생을 술로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성계에게 옥새를 내줌으로써 나라가 망하는 일을 맡게 된 처지를 한탄한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 실록에 나타난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술을 좋아는 했으되, 그냥 술을 정말 좋아한 사람의 모습이다. 망국의 책임 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조선 왕실은 애먹이지 않고 옥새를 순탄하게 건네준 그녀를 극진하게 예우했던 모양이다. 비록 국가 정통성 문제가 있어 예전처럼 대비로 대우를 못하고 궁주로 낮추기는 했지만, 지내는 데는 일체 불편이 없도록 배려하는 모습이다. 심지어 그녀의 건강에 좋은 술을 골라서 보내기도 했다.

오늘날 여성운동의 이슈들과도 관련해서 보면, 사실 정비 안씨는 시댁인 고려 왕실에 좋은 감정을 갖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남편인 공민왕은 그녀를 소박 맞혔던 것으로 보이는데, 거기다 상상하기 힘든 변태 행위까지 강요했다. 자신이 보는 가운데 측근들과 성관계를 갖도록 강요했다. 정비 안씨는 머리를 풀고 목을 매 죽으려는 결연함까지 보이며 이를 거부했다.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후 무너지고 있는 남편 공민왕의 모습이 여기에서도 보인다. 남편에 대해 좋은 감정 가지라고 그 누구도 강요할 수가 없다.

이어서 즉위한 양아들 뻘 우왕은 “내 후궁 중엔 왜 어마마마와 같은 여인이 없는지”라고 한탄하며 자꾸 찾아와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시댁에 대해 이 집안은 부자가 모두 정상이 없다고 욕을 해도 누가 뭐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고려 망하기 전부터 정비 안씨의 생애는 술 마셔야 할 일들이 가득했다.

이성계가 신하들의 추대와 함께 정비 안씨로부터 옥새를 전달받아 왕이 된 것은 1392년 7월17일이다. 8월7일에는 신분이 의화궁주로 낮춰졌는데, 나라가 바뀐 이상 불가피한 일이었다.

11월4일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태조 이성계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왕을 위한 잔치를 열 정도였다니 여전히 왕실 어른에 해당하는 대접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2월19일에는 태조가 왕후인 강씨와 함께 의화궁주의 사저를 찾아가 연회를 베풀었다.

조선 개국 직후 이렇게 왕실과 돈독한 관계를 보여주다 그녀는 한동안 실록의 기록에서 잊혀진 존재가 된다.

다시 등장한 것은 23년이 지난 1415년 태종 15년이다. 태종 이방원은 날마다 그녀에게 술 한 병을 내려줘서 부왕 때로부터의 우호를 지속했다. 이 때 의화궁주의 나이는 환갑에 가깝거나 조금 지났을 듯하다.

태종은 이제 노인이 된 여인에게 매일 술을 주다보니 건강 걱정도 하게 됐다. 3년 후에는 “의화궁주가 늙고 병이 있어서 약주(藥酒)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부터 묵은 술을 쓰지 말고 새 술을 바치도록 하라”며 앞으로는 더욱 좋은 술을 주라고 분부했다. 태종은 자신보다 스무 살 가까이 연상인 이 여인이 자신보다 더 오래 살 것임을 이때까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세종이 즉위하고 2년째가 된 1420년 5월16일, 상왕이 된 태종의 생일을 맞아 의화궁주는 체수박(遞手帕)을 바쳐 그간의 호의에 답례했다. 한자로 보아서는 손으로 뜬 장식용 띠가 아닌가한다.

의화궁주 말고도 세종의 왕후 심씨와 태종의 후궁 명빈이 체수박을 바쳤다.

세종 10년인 1428년, 왕은 의화궁주에게 박포의 집을 내려주었다. 박포는 제2차 왕자의 난에서 회안군 이방간을 부추긴 죄로 처형당한 사람이다. 벌을 받기 전에는 공신으로 지위를 누린 사람이니 그 집이 상당한 재산이었을 것인데 이를 의화궁주에게 줬다. 1월23일의 일이다.

그해 5월14일, 고려의 마지막 대비였던 의화궁주가 사연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세종은 부의로 쌀과 콩 각각 100석을 보냈다.

6일 후, 예조는 “옛제도를 상고하여 보니, 위(魏)나라의 명제(明帝) 때에 한나라 헌제(獻帝)의 황후 조씨(曹氏)가 훙(薨)하니 장사에 사용한 수레와 옷과 예의 의식을 다 한나라의 제도에 의거하였으며, 당(唐)나라의 태종(太宗) 때에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후 소씨(蕭氏)가 돌아가니 조서를 내려 황후의 예로써 장사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의화 궁주의 장사는 청컨대 옛 제도에 따라 왕비의 예를 쓰고, 그의 거복(車服)과 예의는 전조의 제도에 좇게 하소서”라고 보고하니 세종이 이에 따랐다.

예조가 말한 첫 번째 사례 헌제의 황후 조씨는 조조의 딸이다. 조조가 복황후를 시해한 후 자신의 딸을 헌제가 맞도록 해 스스로 국구의 지위를 더했다. 명제는 조조의 손자로 제갈양의 북벌을 막은 조예다. 황후 조씨는 전황실의 황후이면서 황제인 조예에게는 고모가 된다.

예조의 보고 내용은 비록 국권이 바뀌었지만 전왕조의 왕후에 대한 사후 예의는 전조의 왕후로 있을 때 예를 따르는 것이 도리에 맞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의화궁주, 즉 정비 안씨는 36년 만에 고려 왕후의 지위를 다시 갖추게 됐다.

격변의 시기를 술로 시름을 달래며 살아나간 한 여인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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