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 회군 후 조정의 양대 실력자 대결, 이렇게 끝났다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제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의 재구성 11회>

1388년 음력 5월, 이성계와 조민수의 요동정벌군은 위화도에 쏟아지는 비와 불어난 강물에 갇혀 있었다. 굶어죽는 병사도 나왔다.

22일 무렵 조민수는 불안한 소문을 들었다. 이성계가 휘하 친위병을 거느리고 동북방면으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사기도 떨어진 마당에 고려 최고 장수가 최정예병들을 거느리고 빠져나간다면 더 볼 것도 없는 전쟁이 된다. 조민수가 요동정벌군을 독차지한다해도 군대와 함께 그냥 죽으러 가야 할 운명만 남게 된다.

조민수가 단신으로 이성계를 찾아가 “공이 가버리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장면은 조민수의 좌군 장병들조차도 이성계를 군중의 최고지휘관으로 여기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성계 없는 조민수의 좌군은 단독으로 싸울 만한 군세가 못되었던 것이다.
 

▲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 조민수로 등장한 최종환. 관록있는 사극 연기자가 투입된 만큼 주인공들에게 무시무시한 적수의 모습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의 조민수가 가진 실력은 이성계에 비해 상당히 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려사가 조선 사관들에 의해 쓰여 그가 간신열전에 들어가 있을 뿐, 고려 왕조에서 조민수는 충신의 하나였다고 봐야 한다. /사진=SBS 홈페이지.

우왕이 원정군 장수를 임명할 때 팔도도통사 최영 다음으로 좌군도통사 조민수가 언급된다. 서열에서 분명히 조민수가 이성계를 앞섰다. 그러나 이것은 명목상일 뿐이었다.

추측컨대, 이성계를 견제하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조민수 서열을 높인 듯하다. 그러나 싸움은 서열이 아니라 장병들의 용기와 지휘체계의 확립을 통해 하는 것이다. 전투현장에서의 실질적 최고지휘관은 이성계임이 분명했다.

조민수가 “눈물을 흘렸다”는 조선의 사관들의 표현이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떻든 그가 먼저 이성계를 찾아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성계는 “내가 떠날리 있겠소? 이러지 마시오”라며 조민수를 진정시켰다. 진정만 시킨 게 아니라 이 자리에서 이성계는 민족사의 엄청난 전환점이 되는 ‘회군’을 꺼내들었다.

아쉬울 때일수록 상대가 나를 찾아오게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회군을 생각하고 있던 이성계가 바로 이런 경우를 맞았다. 그가 먼저 조민수를 찾아가 회군해야 한다고 누누이 설득을 했다면, 가뜩이나 이성계 감시의 명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조민수의 의심을 초래했을 것이다.

하지만, 먼저 찾아온 건 조민수였다. 떠나지 말라고 다리를 붙잡는 조민수에게 “그럼 회군합시다”라고 얘기를 꺼내면서 엄청난 수고를 덜 수 있었다.

당초 조민수 진영의 이성계 떠난다는 소문부터 이성계 측이 유포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어찌됐든, 현실은 조민수 혼자서는 싸울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현실을 그가 무시한다면, 극단적인 경우 자신의 수하들에 의해 체포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성계와 조민수 두 사람 사이에 군사적으로 뒤집기 힘든 우열의 차이가 있음을 뜻한다. 아무리 좌군도통사, 좌시중으로 조민수가 앞선 서열을 뜻하는 ‘좌(左)’를 차지했어도 현실은 이성계의 손바닥 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성계의 이런 힘은 난세에 지는 적이 없는 영웅이라는 데서 비롯됐다. 민심을 바탕으로 한 군심이었다는 얘기다. 장수로서 이성계의 우위는 두 사람이 권력을 차지한 후에도 근본적인 격차로 이어졌다. 조민수가 명목상 조정의 수반에 올랐다고 해서 본질적인 힘의 차이를 바꾸지는 못했다.

5월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6월 기사일(27일) 최영의 방어군을 격파하고 고려의 권력을 차지했다.

고려사에서는 달이 바뀌지 않고 병오일(4일) 기록이 이어진다. 6월이 윤달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이때까지 우왕의 거취에는 아무 변동이 없다. 고려사의 내용만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최영이 요동정벌군에게 사로잡힌 지 7일이 지난 이날, 우왕은 생애 마지막 조정 인사를 단행했다. 앞서 이성계 등이 회군할 때 이들을 모두 삭탈관직했지만, 다시 조민수를 좌시중, 이성계를 우시중, 그리고 조준을 대사헌으로 임명했다.

다시 한 번 조민수가 상석인 ‘좌’를 차지했지만 중요한 건 조준의 대사헌 임명이다. 조민수를 탄핵으로 실각시키는 자리가 이날 조준에게 돌아간 것이다.

인사를 마친 우왕은 그날 저녁 평지풍파를 일으킨다. 따지고 보면 별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왕 앞에 운명의 함정을 파놓은 사람들은 기어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고려사는 “밤에 우가 환관 80여명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이성계), 조민수, 변안열의 집으로 쳐들어갔지만 모두 집에서 나와 사대문 밖 군영에 있었으므로 해를 입히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고 기록했다.

위풍당당한 갑사들이 철통경호를 하고 있었을 당대 군부실력자들 집에 환관 80명을 거느리고 “쳐들어갔다”는 것이다. 우왕은 조정 권력을 회군한 장수들에게 내준 후, 이들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이성계 등을 찾아갔던 것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렇게 각색됐을 수 있다.

왕명을 거역하고 조정에 눌러앉은 장수들은 어차피 우왕과 정치를 같이 할 생각이 없었다. 앞서 정중부 이의방이 정권을 차지한 후 의종을 폐위했고 최충헌은 강종을 폐위했다. 지금은 우왕 차례였다. 그런 상황에서 마침내 트집잡을 거리를 찾았던 것이다.

사흘 후 장수들이 왕을 찾아갔다. 대놓고 물러나란 소리를 꺼내기 전에 다른 꼬투리를 잡았다. 최영의 딸이 우왕의 비로 있으면 불안해서 못살겠으니까 그녀를 내쫓으라고 왕에게 요구했다.

우왕은 “영비를 축출한다면 나도 나갈 것이다”라고 버텼다. 지금까지 자신이 이렇게 얘기하면 신하들은 “망극하옵니다”라고 엎드리는 장면만 보아왔을 우왕이다.

그러나 지금 나타난 장수들은 종류가 다른 사람들이었다. 왕도 따라 나가겠다고 엄포를 놓으니 “그럼 잘됐네요. 강화도에 함께 계실 곳을 마련해 드릴게요”라고 바로 본래 용건을 들이밀었다.

뜻밖의 반응에 기가 죽은 우왕은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떠나면 안되겠냐고 했지만 장수들은 왕을 말에 태워 당일로 강화도로 쫓아냈다.

다음 날에는 왕위를 정해야 했다. 여기서 조민수가 이성계에게 표면적인 승리를 거둔다.

이성계는 “왕씨 후손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려사는 우왕과 세자인 창이 신돈의 아들과 손자라는 전제에서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나중에 제기된 것으로 아직은 공식 거론할 수 없는 금기였다.

조민수는 사대부들의 스승 이색의 뜻을 내세우며 세자 창을 후계로 추천했다. 다음날 조민수는 대비 안씨의 교서를 받들어 창을 왕위에 세웠다.

조민수는 또 요동정벌 전에 실각한 이인임의 복권을 요청해 창왕의 허락을 받아냈다. 이인임은 조민수를 조정에 천거한 은인이다. 조민수는 이색과 이인임의 조정 권력을 더해 군권이 앞서는 이성계에 맞서려 했다.

그러나 이인임 복권은 조민수에게 아무런 실익도 없이 커다란 상처를 입고 자신의 패망을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

사람을 보내 이인임을 불러들였지만 그가 이미 죽은 뒤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인임 복권은 지독한 구설을 낳았다.

조민수가 이인임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을 왕에게 청했지만, 반발한 전의관(典儀官)들이 일제히 출근을 거부할 정도였다.

이 때 공부라는 관리가 분연히 “내가 광평부원군(이인임)의 시호를 짓지 않으면 대체 누가 하겠는가”라고 떨쳐 일어났다.

공부가 지어온 시호는 ‘황무(荒繆)’라는 것으로, ‘거칠고 간사하다’는 뜻이다. 이인임과 가까웠던 사람들의 항의를 받고 공부는 “농담이었다”고 물러섰다. 하지만 공부는 곧 이인임의 죄를 추궁하는 상소를 제기했다.

선비들로부터 이토록 조롱거리가 된 것은 죽어서 말이 없는 이인임이 아니라, 그에게 기대려고 한 조민수였다.

이 모든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이성계로서는 이제 조민수를 몰아내도 아무런 부작용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됐다.

조민수가 창왕을 세우고 이색 이인임을 찾아다닐 때, 이성계는 다른 쪽에 몰두했다. 군권이다. 이미 자신이 우위를 보이는 분야에 더욱 확실한 우세를 굳혔다.

창왕 즉위와 함께 군권의 분배가 이뤄졌는데 이성계는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조민수는 황해도 이남을 맡았다. 홍건적 몽고 여진 등 강한 적들과 맞서는 최정예 부대가 모두 이성계 휘하로 들어갔다.

창왕 옹립, 이인임 복권 등에서 조민수에게 양보한 대신 이성계는 군의 우위를 가져갔다. 더구나 이인임은 산 사람도 아니었으니 그의 시신으로 이성계는 크나큰 실리를 챙겼다.

이성계가 아버지처럼 따른 경복흥은 이인임의 모함으로 귀양가 불우한 만년을 보냈다. 이인임은 그 죄를 죽어서 이성계에게 갚은 것처럼 됐다.

다음 달인 7월 어느 날, 명목상이나마 조정의 최고지위를 누리고 있던 조민수가 창녕군으로 유배를 갔다. 불과 한 달의 권세를 누린 것이다.

고려사만으로는 자세한 전후의 일을 알 수가 없다. 고려왕조 실록이 오늘날 전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조민수 실각의 뻔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창왕 옹립 등에서 이성계가 용납할 수 없는 본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갈수록 의심스러워지는 이성계를 볼 때, 조민수가 자신의 힘을 키우려한 것은 고려 신하로서 본분을 다한 것이기도 하다.

둘째, 조민수를 몰아내도 전혀 문제될 게 없어졌다. 이인임 복권을 통해 조민수는 시대 요구에 전혀 부응 못하는 사람임을 스스로 드러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에 앞선 근본의 이유가 있다.

실력에서 조민수는 이성계에게 역부족이었다. 조민수가 쫓겨난 이후 그의 추종세력 그 누구도 이성계에게 반기를 들지 못했다.

만약, 처지를 바꿔서 조민수가 이성계를 갑자기 귀양을 보냈다면, 아마 조민수 정권은 사흘을 못 버텼을 것이다.

단지 탄핵만으로 조민수가 실각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명색이 서해도(황해도) 이남의 군권을 가진 실력자이니, 무력 충돌을 통해 체포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실력은 이성계가 더욱 우위를 차지한 분야다.

조민수 또한 패망 원인이 자신을 2대주주로 여기는 2인자들의 착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려 500년 역사의 힘이 조민수에게 2인자로 안주하게 놔두지 않았던 측면도 있다.

여기서 이성계가 정적을 제거할 때 쓰는 책략이 나타난다. 우선 적을 더 윗자리로 예우하는 것이다. 실력이 못한 상대를 좌시중으로 높여 양보했다는 덕망과 함께 향후 대결에서의 명분을 쌓는다. 이색 정몽주 또한 모두 이성계에게 밀려나기 직전 문하시중, 수문하시중으로 승진했다.

아버지의 이런 책략을 지켜보며 성장한 사람이 태종 이방원이다. 태종은 사돈인 세종의 장인 심온을 처형하기 직전 영의정으로 중용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심온은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체포돼 사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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