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청와대 비서실’이라는 책을 참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에 빠져있던 2002년 나는 신생 경제일간지의 한국은행 출입기자였다. 그 무렵 한국은행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마침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김 전 실장은 원래 한국은행 출신으로 이날 한은의 원로로서 참석했다. 마침 그때 한은 기자들의 담임선생(?)이라 할 수 있는 공보실장이 김 전 실장의 자제인 김두경 국장이었다. 중앙은행의 고위 간부라 하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타의 모범이 되는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특히 김두경 국장은 진작부터 선비같은 풍모에 눈길이 갔었는데 알고 보니 김정렴 전 실장의 자제였던 것이다.
 
결식기자(?)들에게 일용할 양식(기사)을 주시는 공보실장의 부친인데다 진작부터 인상 깊은 분을 만나 꾸벅 인사를 드렸다. 이 때 이미 팔순에 가까워 지팡이를 짚고 있던 그는 만면에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내게 물어본 것은 “여기는 주간지인가요?”라고 하는 낙심할만한 질문이었다. 내리 3년 한은 출입에 나름 ‘악명’도 떨치고 있다는 ‘통화정책의 매파 기자’로 자부하고 있던 터인데...
 
‘청와대 비서실’이 전하는 1969~1978년의 긴 세월 비서실장 김정렴은 이런 모습이다.
 
당시는 점차 차지철 경호실장의 무소불위 권력이 뻗어나갈 때다. 그는 심지어 최규하 국무총리와의 통화에서도 여직원을 시켜 전화를 걸고 국무총리 본인이 나오면 자신도 수화기를 건네받았다고 한다. 명백한 망발이다.
 
이런 식으로 김정렴 실장에게도 전화를 하자 김 실장은 “앞으로 또 이런 식으로 전화하면 두 번 다시 통화 못할 줄 알아”라고 쏘아붙이고 바로 끊었다고 한다. 김 실장은 문민 출신이지만 차 실장은 드센 성격으로 널리 알려진 군 장교 출신이다.
 
재벌 총수가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고 비서실장에게도 따로 ‘봉투’를 전할 때가 있었다. 이 때 마다 김 실장은 바깥의 비서실 직원들에게 큰 소리로 “이봐. 아무개 회장님이 우리 비서실 살림 쓰라고 보태주셨어”라고 외쳤다. 비서실장이 따로 비자금을 챙길 여지를 원천 차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쪽 같은 성격의 그가 허리의 통증이 심해 물러나기를 간청해서 1979년 3월 주일대사로 가게 된다. 놀랍게도 비서실을 떠나면서 허리통증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해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서거했다.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은 김정렴 주일대사에게 “청와대를 안 떠났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의 비서실장 후임이 김계원이었다. 이 때부터 비서실과 경호실의 균형이 무너졌다고 한다.
 
‘청와대 비서실’이란 책이 읽는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이 책을 읽으면 박정희 김학렬 김정렴 같은 당시 주요 인사들이 정말 혼을 가지고 국정에 임했다는 것은 인정하게 된다. 
 
이런 독자 정서가 형성되는데 있어서 저자는 절대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김정렴 비서실장처럼 그에게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를 담담하게 던져줄 뿐이다. 판단은 철저하게 독자에게 맡긴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중앙일보의 김진 논설위원이다.
 
지난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정치의 계절이었다. 오다가다 TV 화면에서 김진 논설위원의 모습을 보게 됐다. ‘청와대 비서실’을 쓴 사람이 과연 저 사람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를 편드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책에서는 철저하게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근거만을 제시하던 모습과는 좀 달라보였다. TV 에서는 생각 자체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기자는 역시 글로써만 얘기해야 되나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김 논설위원의 TV 발언들에 대해 지금 내가 뭐라 하기는 좀 그렇다. 정치 분야 취재에서는 태산만큼이나 나를 압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난 20일자 그의 칼럼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사고방식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는 이 칼럼에서 일본의 두 차례 원폭투하가 일제 침략에 대한 하늘의 응징이라고 주장했다.
 
아무리 일본 제국주의가 이땅의 생명을 유린하고 분단까지 초래한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라해도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에 어긋난 것이다.
 
일제의 침략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인류사의 범죄이지만 원폭 투하는 일제 원흉들을 처단한 것이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이 대량 살상당하는 비극이었다. 침략을 일삼은 일제의 피해자에는 일본의 무고한 국민들도 포함된다.
 
어리석은 일본 위정자들이 자기네 국민의 이름을 팔아먹지만 이는 한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이든 전 세계 지성이 함께 극복해가야 할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양심의 목소리를 내는 일본인을 존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일본이 무소불위로 독도 도발을 감행하다 주춤한 것은 반인륜적인 종군위안부 논란을 격화시킨 것이 큰 원인이 됐다.
 
일제의 피해국들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례다. 김진 위원의 20일 칼럼처럼 선을 뛰어넘는 언동은 일제의 침략 후예들이 다시 날뛰는 빌미만 줄 따름이다. 벌써 일본 정부가 목소리를 높이며 항의하고 있다고 한다.
 
가깝게는 명성황후 시해로부터 시작해서 멀게는 고대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누적돼 온 원한이 충동적으로 앞설 수는 있다. 아무리 그래도 댓글란에 익명으로나 남길 글하고 언론인의 글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 나라 지식인들의 지성에 직결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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