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나라 명제 조예는 제갈양의 수차례 걸친 공격을 물리친 임금이다. 삼국지 연의의 독자들에게는 얄미운 악역이지만,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는 외침을 물리친 훌륭한 임금으로 평가할 만 하다. 그는 조조의 손자요, 조비의 아들이다.

 
조예가 태자이던 시절, 부황(父皇) 조비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
 
달아나는 어미와 새끼 사슴을 발견하고 조비가 먼저 어미를 쏘아 잡았다. 조비가 아들 조예에게 “어서 새끼를 쏘지 않고 뭐하느냐”고 재촉하자 갑자기 조예가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렸다.
 
“폐하께서 이미 어미를 없애셨는데, 차마 새끼마저 죽이지 못하겠습니다.”
 
상당히 뼈가 담긴 말이었다. 조비가 첫번째 황후이며 조예의 생모인 견씨를 처형한 비극을 안고 있는 집안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이같은 언중유골을 용서할 리가 없는 조비였지만, 아들이 이렇게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데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 장면은 조선의 성종과 연산군 사이 대화와도 비슷하다.
 
생모를 잃은 연산군이 부왕 성종에게 길거리에서 본 어미소와 새끼소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조예나 연산군이나 모두 생모를 잃고 정치적으로 매우 위태로운 처지였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아버지 임금의 전적인 후원을 입고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어미 잃은 자식인 것도 불쌍한데, 심지어 그 어미를 자신이 죽였으니 미안한 마음이 극에 달했던 것이다.
 
장희빈 사건으로 유명한 숙종과 경종의 관계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장희빈의 남편인 숙종은 둘 사이의 아들 경종이 그나마 다음 임금이라도 되지 않는다면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걱정했다. 이미 생모인 장희빈에게 사약을 먹여 처형한 뒤다. 막강한 정치세력인 서인이 정치적 기반도 약하고 생모와 외척도 없는 경종을 가만 놔두지 않으리라 본 것이다.
 
그러나 막상 왕이 된다고 해도 과연 경종의 왕권이 반대파 신하를 제압할 수 있을지 보장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른바 정유독대의 시비는 이런 와중에 발생한 것이다.
 
정유년(1717년) 숙종이 이이명이라는 대신에게 훗날 경종이 왕이 되면 서인들 입맛에 맞는 연잉군(영조)을 세제(왕의 아들이 아닌 동생으로 후사를 이을 사람)로 책봉케 하라는 밀지를 남겼다는 것이다. 경종의 치세를 서인들이 보장해 주는 대신 경종은 스스로 후사를 정할 임금 고유의 권한을 뺏기게 된다.
 
김태희 출연으로 화제를 모았다가 ‘막장 고증’ 논란에 고전하던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장희빈의 목숨만큼은 지켜보려는 숙종으로 묘사가 됐다고 한다.
 
▲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한 장면.
혹자는 이것까지 왜곡이라고 비난하는 모양인데, 이 부분만큼은 이 드라마의 신선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물론 이처럼 도전적인 기획을 하기엔 이 드라마의 고증이나 역사에 관한 결격사유가 너무나 커 보인다.
 
그렇다고 인현왕후전같이 정치적 의도가 역력한 특정 기록과 다르다고 해서 역사 왜곡이라 할 수는 없다.
 
따지고 보면 장희빈의 죄란 것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건데, 처벌은 마치 인현왕후를 시해한 범인처럼 극형이 내려졌다.
 
왕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자기네 문중의 귀한 딸 인현왕후를 잃은 서인들이 임금에게 장희빈을 버릴 건지, 세자를 버릴 건지를 선택하라 요구했을 만한 시국상황이었다.
 
200여년 전에 연산군의 갑자사화로 어미 잃은 임금의 참사를 경험한 조선인데, 과연 숙종 스스로의 의도로 장희빈을 사사했을지는 의문스럽다.
 
그래서 지금까지 장희빈 드라마와 다른 접근을 한다고 하길래 제법 많은 기대를 모았던 것인데, 기획의 큰 줄기와 무관한 고증 분야 등에서 많은 점수를 잃고 말았다.
 
서인-노론의 정파적 관점에서 탈피한 실제로 살아간 사람들의 관점에서 장희빈에 재도전하려는 훗날의 제작진들이 이번 사례를 거울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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