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광원 경제기자의 ‘추석 연휴’ 이야기가 있는 걷기<8>...건너 북한의 민둥산은 ‘경제난’ 때문인가

[초이스경제 윤광원 기자] 기자는 트레킹이 취미다. 그렇다고 멀리 다니지는 않는다. 그저 수도권, 서울에서 대중교통으로 쉽게 갈 수 있지만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곳들을 열심히 찾아다닌다. 그것도 ‘이야기’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 기자처럼 직장인이 손쉽게 닿을 수 있는 ‘경제적인 코스’ 들을 걷고 있다. 열흘에 달하는 긴 추석연휴, 기자의 ‘경제적인 발걸음’ 들을 열편의 시리즈로 옮겨본다. <필자 주>

인천시 강화군에 위치한 강화도는 한강과 서해바다가 만나는 곳에 있는 큰 섬이다. 우리 역사의 집약체이며,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으로 불린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선사시대 고인돌, 국조(國祖) 단군의 이야기가 서린 참성단과 삼랑성, 고려시대 대몽항쟁기의 궁궐터와 왕릉, 강화성곽, 외침에서 나라를 지키던 조선 후기의 진보와 돈대들...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의 유적들이 즐비하다.

게다가 생태계의 보고인 세계 5대 갯벌을 품고 있으니, 각종 천연기념물 철새들이 서식하는 자연생태의 보고이기도 하다.

이 섬에 몸과 마음마저 건강해지는 트레킹 코스가 있다. 바로 ‘강화나들길’이다.

강화나들길은 ‘나들이 가듯 걷는 길’이라는 뜻이다. 강화 본섬에 9개 코스, 교동도 2개 코스, 석모도 코스, 주문도 코스, 볼음도 코스 등 총 14개 코스 246.8km에 달한다.

이 중 1코스는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역사유적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강화성 남문과 동문, 용흥궁, 성공회 강화성당, 고려궁지, 북관제묘, 강화향교, 북문, 북장대터, 연미정을 거쳐 갑곶돈대에 이르는 총 18km 코스다.

특히 1코스는 서울에서 대중교통으로 한 번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강화나들길이다.

▲ 강화 나들길에서 본 풍경. /사진=윤광원 기자

서울 영등포 신세계백화점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88번, 혹은 지하철 2호선 신촌역 1번 출구 밖 현대백화점 지나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3100번을 타면 종점이 강화터미널이다. 이곳이 바로 1코스 출발점이다.

말뚝, 리본, 벽과 길바닥의 화살표 표시가 잘 돼있어, 초행자도 길 찾기가 어렵지 않다.

코스 초입 수협 앞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보면, 강화성 남문(南門)이 우뚝 서 있다. 또 사거리에서 우회전해 길을 따라가면 동문도 나온다.

동문 왼쪽 회나무와 원불교당 사이 길을 따라가면, 골목 안에 용흥궁(龍興宮)이 있다. 용흥궁은 ‘강화도령’이라 불리던 조선 철종 임금이 왕이 되기 전, 19세까지 강화도에서 살던 잠저(潛邸)다. 잠저란, 선왕의 직계 왕자 같은 정상적 계통이 아닌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말한다. 원래 초가집이었으나, 1853년(철종 4년)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큰 기와집으로 고쳐짓고 용흥궁이라 불렀다. 현재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 20호다. 용흥궁 뒤에는 철종의 애틋한 순애보를 전해주는 ‘강화도령 첫사랑 길’ 안내판도 있다.

그 위는 성공회(聖公會) 강화성당이다. 국가사적 제 424호로 지정된 성공회 강화성당은 초창기 기독교가 이 땅에 상륙해 전통문화와 어떻게 접목했는지를 보여주는 희귀한 문화재다. 외관은 전통 한옥이지만, 내부는 서양 중세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이다. 정면에 천주성전(天主聖殿)이란 현판을 달았고, 용마루 위에 십자가를 세웠다. 하늘로 치솟는 요즘 교회 종탑들을 생각해보면, 초창기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지금보다 훨씬 수수했던 것 같다. 기독교가 처음 해안가에서부터 전파됐다는 것도 실감난다.

인근 용흥궁공원에는 강화 3.1운동 기념비, 옛 삼도직물 공장 굴뚝, 병자호란 때 순국한 김상용장군 순절비 등이 서있다.

다시 교회와 초등학교 앞길로 조금 올라가면, 사적 제 133호 고려궁지(高麗宮址)가 나온다. 고려는 1232년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당시 집권자인 최우의 주도로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로 옮겨 1270년 환도하기까지 39년간 머물렀다.

고려궁지는 규모는 작지만 송도의 궁궐인 만월대와 비슷한 형태로 지어졌고, 뒷산 이름도 송악산으로 고치는 등, 이곳을 고려 왕도로서의 품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지금은 조선시대 건물인 승평문(昇平門)과 강화유수부 동헌 및 이방청, 그리고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의궤》 등을 보관하다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약탈당했던 외규장각 등이 복원돼 있다.

궁문 앞 은행나무 노거수를 지나 골목길을 따라 조금 가면, 북(北) 관제묘가 있다. 관제묘(關帝廟)란 삼국지에 나오는 장수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관우는 죽은 후 중국인들에게 무신(武神) 혹은 재신(財神)으로 모셔졌는데, 명나라 때는 ‘황제’로까지 격상됐다. 이 관제신앙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이 땅에 들어왔다고 한다.

다시 길을 따라 한옥마을을 지나면 강화향교가 나온다. 향교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文廟)를 겸한 교육기관이니, 그 사이 동·서양의 4가지 종교 시설을 만난 셈이다.

‘온수물 빨래터’를 지나 강화여·중고 뒷산을 오르면 성곽 능선과 만나게 된다. 언덕 중턱의 둘레길을 따라가니, 강화성 북문이 있다.

강화성은 고려가 대몽 항쟁기에 쌓은 것으로 개성의 성곽처럼 내성, 중성, 외성이 있었다. 이중 내성이 지금의 강화산성이다. 원래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숙종 때 지금의 석성이 됐다.

북문을 지나 조금 오르니 성벽의 여장은 다 없어지고 성벽도 군데군데 훼손돼 있다. 하지만 북장대 터 높은 곳에 오르니 시계가 확 트이면서 강화 들판과 바닷가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바다 건너는 바로 북한 땅 개풍군이다. 북한의 경제사정 탓인지, 북한의 산은 온통 벌거숭이 붉은산이다. 그 건너에 개성공단 터가 있고 개성(開城) 시내가 있다. 그 뒤 높은 산이 바로 개성 송악산이다.

북장대에서부터 나들길은 성벽 밑으로 내려간다. 가파른 산길을 돌아 내려가니, 오읍약수가 나온다. 시원한 약수물로 목을 축이고 길을 재촉한다.

잠시 아스팔트길을 지나고 대월초등학교 뒷산과 마을길을 거쳐 다시 능선 숲길이 이어진다. 그리 높지 않은 능선이지만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길이고 전망도 좋은 편이다. 인근에 대산리 고인돌군과 황형장군묘도 있다.

능선길이 끝나고 마을길로 내려와 월곶마을회관을 돌아가면 월곶돈대(月串墩臺)가 보인다. 이곳은 한강하구와 김포반도-강화도 사이의 좁은 물길인 ‘염하(鹽河)’가 만나는 지점이다. 조금 위에서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고 서쪽으로는 서해바다이다. 그 건너는 물론 북한 땅이다.

월곶돈대는 천혜의 군사요새다. 지금도 병사들이 주둔해 철통같이 지키고 있다.

한강과 서해, 염하, 북한과 김포반도를 모두 굽어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연미정(燕尾亭)이 한 폭의 그림 같이 서 있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정자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 24호로 지정돼 있다. 한강과 임진강, 서해와 염하의 물줄기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해서 연미정이라 했다는데 예로부터 ‘강화 8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절경이다. 하지만 군사지역이라 바다 쪽으로 사진을 찍어선 안 된다. 해안선에는 철책이 뻗어있다.

연미정에서 염하 옆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우측 ‘옥계방죽’으로 들어선다. 개펄과 드넓은 농경지를 가르는 뚝방 길이다. 들판 길을 걷기가 지루해질 무렵 다시 산길이 시작된다.

당산 옆을 돌아 해안으로 나와 고려인삼센터 앞을 지나니, 염하를 가로지르는 강화대교다. 그 다리 밑으로 통과하면 ‘갑곶성지’다. 대원군 집권시절인 1868년 병인박해,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 때 천주교도들이 순교한 곳이다.

그 아래는 유명한 갑곶돈대(甲串墩臺. 사적 제 306호)다. 이곳이 강화나들길 1코스의 종점이다.

1코스를 다 돌고 나면 6시간 이상 걸린다. 힘들면 연미정에서 강화 군내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로 돌아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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