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적 내수기반 없는 축구, 앞으로 얼마나 더 잘 싸울 수 있을까

▲ 지난 27일(현지시간) 러시아에서 열린 대한민국-독일 경기. /사진=뉴시스

[초이스경제 장경순 만필] ‘차라리 아주 무참하게 무너져서 싹 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게 낫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심정으로 27일 밤 집안의 TV를 켰다. 4년 만의 한철 장사를 기대했던 호프집 사장들에겐 이미 실망스런 이번 월드컵이었다.

대패를 당해도 오늘은 전혀 뼈아프지 않고 끝까지 볼 거라고들 했다.

그런데, 이번 대회 마지막이 될 애국가를 듣고 빨간 유니폼이 이리저리 뛰기 시작하니 모든 게 ‘리셋’됐다.

북이 울리고 우리의 장수들이 전장을 이리저리 누비는데 마음이 격동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나.

선수들 표정도 북한 선수들 눈초리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 뭔가 좀 달랐다. 몸놀림도 민첩했다.

‘15분은 저렇게 뛰다가 또 방전되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추가시간에 결승골, 추가골이 들어간 결과에 나타나듯, 시간이 갈수록 붉은 유니폼은 더욱 용맹하고 단단해졌다.

축구와 전혀 무관하게 국가적 관점에서 본다면, 우승 못할 바엔 이렇게 마지막 경기를 통쾌하게 이기고 대회를 마무리하는 것이 국민들에게 큰 기쁨이 되기도 한다. 다만 한국 축구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변명거리로 이런 얘기를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렇게 잘하는 선수들이 왜 다른 경기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는지... 선수들이 아닌 관리하는 사람들의 책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4년 전과 마찬가지로 감독, 그리고 축구협회에 대한 얘기는 안 나올 수가 없다. 마지막 경기 후 좋은 기분이 생겨난 점에서 표현이 다소 부드러울 수는 있겠지만, 그걸 빌미로 그동안 누적된 분노를 지우지는 못할 것이다. 승점 3점으로는 언감생심이다.

축구 관계자 가운데는 “4년에 한번 월드컵만 보는 사람들이 축구를 뭘 아느냐”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 4년에 한번 월드컵도 보지 말까요? 아마 이렇게 되면, 축구 관련 일자리는 절반 이상 사라질 것이다. 좋은 점이 있다면, 사회기반시설 투자든 기업 후원이든 일체의 사회적 지원이 사라질 테니 축구협회를 축구인들 마음대로 100% 운영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4년에 한 번만 본다’는 푸념에도 말의 씨는 있다.

국가대표에 대한 드높은 관심과는 정반대로 국내 리그에 대해서는 심각할 정도로 무관심한 것이 한국 축구의 현실이다.

▲ 한국 손흥민 선수가 공격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농구보다도 열악한 내수를 안고 출발한 축구 산업

경제적으로 표현한다면, 축구는 내수시장이 황무지 상태다. 인기가수들이 프로축구 식전 경기에 참석했는데 그라운드 위 사람과 비슷한 숫자의 관중이 앉아있는 사진이 지금도 떠돌고 있다. 관중 사정이 요즘은 나아졌는지는 몰라도, 케이블에서조차 축구경기 편성이 제대로 안되는 것은 크게 달라진 것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이 수 십 년째 매달려도 답을 못 찾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산업적 관점에서 축구의 첫 단추가 잘못 채워진 듯한 면이 있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는 각각 1982년과 1983년 출범했다. 시기는 비슷하다. 그런데 내수시장 확보 면에서 두 ‘산업’의 격차는 현재 어마어마하다.

1982년 ‘박철순 신화’와 함께 성공적으로 출범한 프로야구는 전두환 당시 정권에게 스포츠정책의 자신감을 줬다. 이 자신감이 지나쳐 프로축구를 시기상조로 출범시킨 것이 오늘날에도 엇갈린 단추가 되고 있다.

당시의 실업야구만 본다면, 프로출범전의 야구 역시 축구와 다를 바 없었다. 실업야구 경기를 보러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야구에는 오늘날 경기당 1만 명 이상으로 늘어나게 될 강력한 소비기반이 따로 존재했다. 고교야구다.

오늘날에는 고교선수 부모들만 보러가는 것처럼 돼 있지만, 당시 고교야구는 지금의 프로야구 지역연고제까지 대신하고 있었다. 경기마다 관중이 넘쳐나 신문사마다 대회를 하나씩 만들어 경영에 큰 힘을 얻었다.

이런 고교야구 시장 기반을 프로야구가 가져와 오늘날의 야구산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프로야구 출범 시도 역시 100% 정권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1970년대 말부터 몇몇 야구인들의 시도가 있었다. 다만 1980년대 초 정권교체기의 극심한 혼란에 무산됐다가 국가차원으로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이즈음, 축구는 두 개의 프로팀이 탄생했다. 할렐루야에 이어서 유공 두개 팀이 만들어졌다. 유공은 지금의 SK그룹이고 할렐루야는 1999년 사라진 신동아그룹이 주인이었다. 신동아는 대한생명을 갖고 있던 재벌이다.

프로팀은 생겼지만, 국내리그가 없으니 외국팀과 가끔씩 친선경기를 갖는 식으로 유지를 했다.

마침 프로야구 성공에 고무된 정권은 축구의 프로화도 서둘렀다. 두 개 프로팀에 3개 실업팀을 더해 슈퍼리그라는 명칭으로 지금의 프로축구가 출범했다.

참여한 팀은 두 프로 팀에 대우 포항제철(지금의 포스코),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해 실업축구 우승팀인 국민은행이었다.

하지만 역시 시장 기반이 부족하다는 인식은 있었는지, 완벽한 프로형태는 갖추지 못했다.

주말에 한 장소에서 두 경기가 열렸다. 여전히 실업대회 같은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관중은 오히려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들어찬 면도 있었지만 그 가운데 유료관중이 얼마나 되냐는 회의가 제기됐다.

축구계는 나타나는 결과를 어떻든 모두 좋은 쪽으로만 해석을 해가면서 프로화를 밀어붙였다. 

현대(현대자동차와 현대그룹이 분리되기 전의 현대), 럭키금성(지금의 LG)까지 가세하고 은행 팀들은 실업리그로 돌아갔다.

참여 구단의 면면은 프로야구보다 더 막강했다. 4대 재벌 가운데 현대 럭키금성 대우가 참여했다. 4대재벌이 아닌 곳도 포철과 유공으로 프로야구의 OB나 롯데 해태에 밀릴 것이 없었다. 실업팀으로 참여한 이들 재벌구단은 곧 프로팀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성급한 프로화는 오히려 슈퍼리그 시절만큼의 인기를 낳지 못했다. 사람동원이 지금보다 훨씬 쉬운 때여서 관중석이 아주 비지는 않았지만 허수일 뿐이었다.

프로축구보다 반년가량 늦게 시작한 농구대잔치가 더 프로화의 모범에 가까웠다. 사실 농구는 시장 확보 면에서 축구보다 더 유리한 점이 있었다. 1970년대 말부터 양대 재벌 삼성과 현대의 농구 라이벌전은 장충체육관을 확실하게 가득 메우는 흥행카드였다.

고려대와 연세대(가나다 순)의 농구 경기는 중고등학생들도 표를 사서 보러갔지만, 두 학교 축구경기를 보러가는 건 재학생과 동문들뿐이었다. 농구는 이런 점에서 축구보다 유리한 시장 기반을 진작부터 갖고 있었다.

경기력을 떠나 프로화라는 측면에서 농구가 훨씬 수월했던 것은 이런 시장적 기반 때문이다.

몇 차례 축구판에 자극을 줄만한 변화가 있기는 했다. 1989년 천안일화는 모그룹의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등장과 함께 축구판의 강자로 한동안 군림했다. 창단 당시 막대한 투자는 “마라도나도 영입한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천안일화는 오늘날 시민구단 성남FC가 됐다.

1996년 마침내 삼성이 축구에도 참여한 것은 축구 산업적 면에서 정말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팬몰이를 할 수 있는 사실상 첫 번째 팀이 탄생했다. “대~한민국”과 같은 지금의 응원문화도 이 때 만들어졌다. 삼성은 현재 축구에서 최고 인기몰이를 하는 더비의 한 축이기도 하다.

2002년 월드컵 주최가 또 한 차례 축구시장을 격상시켰다.

문제는 이런 효과들이 시간과 함께 사라져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하지만 축구에는 야구에서 기대하기 힘든 다른 긍정요인이 있다. 중국과 일본 두 인접국의 막대한 축구시장이다.
 

중국과 일본의 커지는 축구 시장, 잘 쓰면 '보약'

중국 축구에 굴지의 세계적 스타가 등장하는 건 이제 새로운 일도 아니다. 일본 역시 스페인의 전설로 기록될 것이 확실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가 올 가을부터 뛰게 된다.

두 나라 축구시장을 시샘할 일이 아니라, 제대로만 성장한다면 이제 유럽까지 진출하지 않아도 우리 선수들이 큰물에서 뛰어다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국내 리그를 거쳐서 이곳으로 진출하려는 외국 유망주 등장의 부수효과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중국 일본 같은 빅마켓은 못하더라도 짭짤하게 유망주들을 발굴해서 빅마켓으로 진출시키는 짠돌이시장의 기능도 지향해볼만 하다.

축구는 그 어떤 다른 종목에서도 볼 수 없는 확실한 국가대항카드 월드컵이 있기 때문에, 우리 선수 잘 키워서 외국에 보내도 4년에 한 번은 잘 키운 보람을 느낄 수 있다.

계속 논란이 되는 감독도 마찬가지다. 국내 축구인들이 아무리 자존심 상한다 해도 국내 지도인력으로 월드컵에 나가는 것이 무리라는 점은 거듭 입증되고 있다. 거기다 몇몇 무분별한 인사들이 국가적 영웅이 된 외국인감독에게 험담을 한 추태는 조금도 국민들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란처럼 성실하고 안목 있는 외국인 감독한번 데려오자는 요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청와대 청원으로 올라가고 있다.

문제는 누구를 어떻게 알아서 데려오느냐다. 그런 점에서 축구협회의 고충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만약 국내리그가 선수뿐만 아니라 유망한 해외 지도인력들에게도 활짝 열려 있었다면 이 또한 저절로 해결될 수 있었다. 한동안 해외 지도자들이 케이리그를 찾은 적이 있었는데, 2002년과 너무나 다른 운동장 현실에 실망한 이들은 “한국은 야구만 해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매직’으로 불릴만한 놀라운 성적을 국내클럽에서 남긴 해외지도자가 한 명 있기는 했다. 그러나 우리 정서가 받아들일 수 없는 실망스런 처신을 한 나머지 한국축구와 결별하고 말았다. 승부의 결과 면에서 늘 아쉬움이 남는 당사자의 처신이었다.

월드컵만 끝나면, 매번 10년을 내다보자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정작 10년을 내다볼 생각이면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프로축구 역시 국내 내수시장을 잘 다듬어야 한다.

팀과 경기 수만 많았지 볼 것 없는 경기를 하면서 중계 안 해준다고 툴툴거리는 건 내수시장 개척 방법이 아니다. 그 어떤 산업도 사러오지 않는 소비자를 욕하면서 성장한 사례는 없다.

내수기반이 전혀 없이 출범했던 프로축구로서는 태생부터 안고 있는 오랜 과제다. 일본이 1986년 한국에게 월드컵 탈락한 후 7년을 연구하는 것을 한국은 몇 달 만에 밀어붙였던 업보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지나간 일의 시비가 아니라 이미 35년째 이어지는 우리만의 현실 속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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