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출석 요구, 조부는 왜 회피하지 않고 당당히 응했나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의 국정감사 출석을 둘러싼 논란이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다.

성일종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등 일부 정치인이 현대자동차그룹의 부품시장 독과점 여부를 따지기 위해 정 부회장 증인 채택을 강하게 요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의선 부회장은 공격적 성향의 해외펀드 엘리엇의 지배구조 공격도 받고 있는 처지다. 이런 마당에 국내에서는 ‘부품 갑질의혹’ 때문에 정치권의 소환요구를 받고 있다.
 

▲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사진=뉴시스, 현대자동차.


국정감사 나가는 거 좋아하는 재벌회장은 아무도 없다. 이들은 그래서 국회에 안 나오려고 애를 쓰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마땅히 나가야되는데 "지금 외국에 있어서"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도망치는 회장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 더 이상 써먹기 어려운 방법이 됐다. 정당하지 못한 불참에 대해 국회 뿐만 아니라 사법부가 더욱 강한 매를 들고 있어서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국회가 부를 때를 맞춰 해외출장을 갔다가 검찰로부터 700만원 약식기소를 당한 적이 있다. 그런데 법원은 정 부회장을 직권으로 정식재판에 회부해 1500만원의 벌금을 선고했다.

700만원이든, 1500만원이든 재벌이 눈썹하나 까딱할 돈은 아니다. 그러나 사법부가 "이같은 범행이 반복될 경우 집행유예, 또 반복될 경우 징역을 선고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추상같은 호령을 해서 주목을 받았다. 이 재판이 열린 건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때인 2013년이다. 그 때 이미 세상이 이렇게 변했으니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자칫하면 국회를 걸렀다가 수만 명의 그룹 직원들 앞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하게 생겼다.

따라서 국회를 안 나가려면, 국회가 아예 부르지도 않게 만드는 게 상책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재벌회장들은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과연 국회에 나가는 것이 나쁘기만 한 일이냐다.

지난 4월, 전 세계인들은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회장이 특유의 짙은 회색 티셔츠가 아니라 양복을 입고있는 매우 이색적인 장면을 봤다. 그는 이 때 미국 의회 청문회에 이틀동안 출석했다. 페이스북의 개인정보 유출 파동이 전 세계 사회관계망을 강타했을 때다.

페이스북은 경영적 측면에서도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런데 저커버그 회장의 의회 출석이 상황을 뒤집었다. 페이스북의 매출액 증가 발표도 겹쳐 이 회사 주가는 시간외 거래에서 7.1% 폭등하는 반전을 가져왔다.

특히 정의선 부회장이라면 남의 나라 사례만 참고할 일도 아니다. 그의 조부일 뿐만 아니라 한국 재계의 '왕회장' 칭호를 받고 있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도 1988년 국회 출석을 그의 경력 가운데 매우 굵직한 한 장면으로 남기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초선의원 때 ‘청문회 스타’의 명성을 남기던 바로 그 날이다. 이보다 며칠 전, 노 전 대통령은 같은 청문회에서 장세동 전 안전기획부장의 철벽을 무너뜨리는 매서운 질문으로 단 번에 국민적 명성을 얻었다.

정주영 회장을 상대하는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은 장 전 부장을 추궁할 때와 몇 가지 달라졌다. 추궁보다는 반론을 제기하는 편에 가까웠다. 풍자적 해학을 구사하는 듯한 웃음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 차이는 장 전 부장과 달리, 정 회장은 핵심 사실을 발뺌하지 않고 선선히 인정하고 출발한데서 비롯됐다.
 

▲ 1988년 국회 '5공비리 청산' 청문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장세동 전 안전기획부장이 출석했을 때와 달리,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질문할 때는 웃는 모습을 몇 차례 보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부에 비하면 국회는 바지저고리 같으니까요?"라고 묻자 정주영 회장이 "여지껏 그랬으니까요"라고 맞장구치고 있다. /사진=청문회 중계동영상 화면캡쳐.


정주영 회장은 기업하는 사람으로서, 정치권력의 자금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처지를 강조했다. 노 전 대통령은 불가피했을 뿐만 아니라, 자금요구에 응하면서 부당한 이익을 도모하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강자의 지위를 더욱 다진 것이라고 반박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질문을 시작할 무렵 정 회장의 표정은 ‘에이스’를 상대하는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40여분 논쟁의 말미에 가면서 정 회장이 웃음을 보이는 장면이 많아졌다. 구수한 말투로 좌중의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늘었다. 정주영 회장 역시 노 전 대통령이 청문회의 핵심 내용에 대한 질문은 마무리했고, 기왕 흔치 않을 자리에 다른 주제로 도전해 오고 있음을 알아차린 듯 했다.
 

▲ 1988년 당시 초선의원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토론(?)'이 30분을 훨씬 넘길 무렵, "정부 정책이 재벌에만 유리하다"는 질문에 정주영 회장이 "사실은 그렇지않은데 지금 이시간처럼 노의원이 그렇게 몰아붙이니까 국민이 자꾸 그렇게 생각할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라고 답변하고 있다. 장시간 맞대결 펼치던 두 사람에게서 초반의 결기는 상당히 빠져나갔고 청문회장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사진=청문회 중계동영상 화면캡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질문을 마무리 할 때, 주변의 다른 의원들로부터 “여기가 재벌하고 토론장이야?”는 등의 야유가 쏟아졌다. 야유를 던진 이들은 이날 정 회장에게 “증인님” “회장님” 등의 호칭으로 저자세를 자처해 다음날부터 국민들과 언론의 질타를 받게 될 운명의 사람들이었다.

당시 야당 소속이던 초선의원과 무려 40분을 넘는 단독논쟁을 벌였지만, 청문회 후 정 회장은 여당의 불만에 시달려야 했다. 핵심 의혹을 너무 쉽게 인정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자신들의 처지를 과연 정 회장만이 제대로 대변해 주고 왔다는 평가가 우세했다.

정의선 부회장의 조부인 정주영 회장이 한국의 재계에서 ‘왕회장’이라는 위엄 넘치는 별명을 얻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이 날이었다.

정 부회장은 사실상 ‘왕회장의 적장손’이다. 정씨집안 족보로는 다른 사람일지 몰라도, 한국의 기업경영 관점에서는 정의선 부회장이 그에 해당한다.

대그룹 회장들은 국회가 부르면, 자기 대신 적당한 사장을 한 사람 대신 내보내곤 했다. 회의장은 맥이 빠져버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질문 세 개 정도나 나오고, 기껏 불려나온 사람은 회의장 한 구석에서 졸거나말거나 아무도 관심도 갖지 않았다.

정의선 부회장이 이런 쉬워 보이는 길을 뿌리치고 자청을 해서라도 국회에 당당하게 응할 경우, 그를 괄목상대할 사람들은 또 있다.

바로 적대적 성향의 해외투자펀드들이다. 지금까지 현대자동차 그룹 경영진을 만만하게 봤던 일부 펀드는 지금 자신들이 ‘왕 회장의 적통’에게 도발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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