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사라진 프로야구 산업... 갑자기 위축된 건 누구 때문인가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선동열 야구 국가대표 감독은 14일 사퇴를 발표하면서 정치권, 그리고 금메달을 몰라주는 민심에 대한 깊은 아쉬움을 남겼다.

콕 집어 얘기를 안했다 해도 그가 “환영식 한 번 못 받았다”고 토로한 부분은 서운함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만약 그가 올해 국정감사에 소환되지 않았고 아시안게임 금메달 환영식이 열렸더라면 사퇴를 안했을까.

사람 속을 남이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선동열 감독의 선수시절부터 강한 자부심을 감추지 못하는 천성과 그간의 행적으로 봤을 때 올해가 지나갈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킬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였다.

일단 사퇴의 직접적 계기가 된 몇몇 국회의원은 부실 의정활동에 대한 지탄을 면키 어렵다. 야구팬들을 대변하겠다고 나서서는 전혀 야구팬들의 가려운 곳과는 동떨어진 곳을 송곳으로 후벼댔다. 세상 만물에 다 간섭을 해야 되는 국회의원이 언제나 전문성 면에서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 ‘튀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얄팍한 심성이 결부된 정황이 역력할 경우, 유권자들은 절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와 별개로, 본지와 같은 경제매체가 주목하는 것은 프로야구가 올 겨울 당면하고 있는 전례 없는 산업적 측면에서의 위기다. 관중수가 2013년 644만 명에서 4년 연속 증가해 840만 명에 이르렀다가 올해 807만 명으로 큰 폭 후퇴했다. 그나마 800만 명선을 지킨 것에 대해 하늘이 한 번 더 기회를 주신 것으로 감사해야 할 처지다. 하지만 왜 줄었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다면 관중 수 감소는 시청률 하락, 야구 관련 종합적 매출저하를 초래하는 것이 당연하다.
 

▲ 선동열 야구 국가대표 감독이 14일 사퇴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올해 포스트시즌에서 매진실패가 나온 데 대해 일부에서는 해당 팀들의 인기도를 언급했다. 그러나 과연 그것만이 전적인 이유일까. 혹시라도 야구계가 인정하기 싫은 것을 외면하려는 억지해석은 아닐지.

올해 한국 프로야구는 뭐니 뭐니 해도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아시안게임 결과보다도 선발 그 자체가 1년 내내 야구팬들의 폭발적 관심사였다.

프로스포츠의 국가대표는 리그전체의 인기를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역할을 한다. 대표적인 것이 1992년 미국 프로농구 NBA 드림팀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참가다. 1990년대 마이클 조던 시대가 압둘라 자바, 래리 버드의 1980년대를 인지도와 흥행 면에서 압도하는 결정적 계기가 1992 드림팀이다.

상대보다 불공평하게 압도적인 경기력을 갖췄다는 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괴물같은 팀이 생긴 자체가 농구를 모르는 사람들까지 NBA 팬으로 끌어들였다. NBA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미국 프로야구 MLB는 상대적으로 불우한 1990년대를 보내다가 파업도 한 번 벌였다.

1992년 NBA만큼은 아니라도 한국 프로야구도 드림팀 효과를 본 것이 있다. 1998년의 방콕아시안게임 야구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래 처음으로 정예화된 국가대표가 이 때 만들어졌다. 프로 아마를 통틀어 병역미필 선수가 상당수 포함됐다. 미필의 비율이 2018년 대표팀보다 훨씬 더 높았어도 병역시비는 거의 누구도 제기하지 않았다. 아마추어로 선발된 선수는 김병현 박한이 조인성 등이었다.

이 때 한국프로야구는 상당한 난국에 빠져 있을 때다. 선동열 이종범 투타의 최고스타들이 잇따라 외국으로 떠났고, TV에서 방송을 시작한 박찬호 MLB 중계는 KBO리그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여기다 1997년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1995년 540만 명 관중이 1996년 449만 명, 1997년 390만 명으로 줄다가 1998년엔 263만 명으로 뚝 떨어졌다.

이렇게 암울했던 시기에 국제무대에서 일본 대만을 콜드게임으로 압도한 한국 야구선수들의 기량은 침체되던 야구산업이 바닥을 다지고 올라가는 신호탄이 됐다.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7회 콜드게임 완투승을 이끈 박찬호가 일일이 다른 선수들과 격한 포옹을 나눈 장면은 전혀 과장스럽지 않았다. 박찬호뿐만 아니라, 툭 치면 담장을 넘기는 한국선수들의 공격력은 ‘아시아 쿠바’라는 말도 나왔다.

‘병역 브로커’와 같은 칙칙한 말은 어디 붙일 수도 없는 경탄할만한 경기력이었다. 이 1998 KBO 드림팀은 이후 모든 올림픽·아시안게임에 프로야구 정예팀의 참가가 당연한 것으로 정착시켰다. 또한 일본 사회인팀이 한국에 콜드게임 패를 당했다는 사실은 일본 프로야구도 정예팀 구성에 나서는 좋은 계기가 됐다.

그랬던 아시안게임 야구대표팀이다. 2018년의 대표팀과 달라도 너무나 다른 1998년 ‘드림팀’이다. 올해는 프로스포츠 전체의 흥행을 끌어올려야 할 대표팀이 오히려 찬물을 끼얹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현상이다.

2018년 대표팀에 대해 선동열 감독을 포함해 야구계 책임 있는 사람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정치와 무관한 야구팬들의 지속적인 지적이었다.

선수 선동열이 국가적 ‘영웅’이란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다.

그는 청소년 때부터 국가가 부르는 그라운드에 수도 없이 섰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느 대회에서 병역혜택을 받은 건지는 자료를 살펴봐야 한다. 아마 자기가 이미 병역이 면제됐는지도 모르고 국가대표 투수로 공을 던진 이닝 수도 엄청날 것이다.

만약 선수시절 그에게 누군가 병역혜택의 타당성 문제를 제기했다면, 드높은 긍지를 지닌 그가 어떤 선택을 했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물론 그의 출중한 실력에 그런 문제를 제기할 일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감독으로서 그의 평가는 아쉬운 얘기들이 좀 많다. 기아타이거즈 감독에서 물러날 때는 선수와의 관계가 삐걱거렸다. 병역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그 선수는 현역복무를 마쳤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그는 병역과 무관하게 선발돼 맹활약을 했다. 선 감독으로서는 만감이 교차했을 법한 장면이다.

추수의 시기에 접어들어 극도의 혼란을 보였던 KBO리그지만,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팀 선수들의 놀라운 경기력 발휘가 어느 정도 팬심을 진정시킨 것은 대단히 다행한 일이다.

이런 틈을 타서 영웅출신 감독은 전적으로 주변을 탓하는 듯한 사퇴의 변을 남겼다.

“환영식 한 번 못 받았다.”

과연 얼마나 많은 야구팬들이 귀국하는 아시안게임 대표팀을 환영하러 나가고 싶었을까. 무분별한 국회의원을 비난한다고 이런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인기 제일 높다는 팀들이 포스트시즌에 맞붙으면 매진 사례가 절대 없을 거라고 장담하느냐다.

군필이든, 아니든 국가대표 유니폼만 입으면 놀라운 투혼을 발휘해 국민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 것이 지금까지 야구 국가대표팀이다. 때로는 상대가 너무나 허약한 약체였어도 최정예 선수들이 콜드게임으로 압승을 거둠으로써 승부에 나선 상대에게 예의를 다하고 맹수의 본능을 확인시켜줬다. 감동은 그런데서 비롯됐다.

그 감동이 올해 사라졌다. 이걸 회복하려면 다음 계기가 필요하다. 그때까지 한국의 프로야구 산업은 기나긴 보릿고개를 넘어야 할지도 모른다. 책임지고 물러나는 사람들이 주변 탓, 남의 탓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기사와 무관한 사족. ‘국보투수’ 선동열은 기자와 같은 86세대를 상징하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다. 선동열의 경기를 처음 ‘직관(야구경기 관람)’간 것이 1980년 4월이다. 광주일고 선동열을 보러 간 것이 아니고, 고교야구 4강 두 번째 경기 중앙고 경기를 단체관람 갔었다.

4강 대진표가 광주일고-충암고, 광주상고-중앙고. 광주 두 학교와 서울 두 학교 대결이었다. 첫 경기 광주일고는 충암고를 4대1 또는 4대0(기억에 의하면)으로 비교적 손쉽게 제압했다. 광주상고는 중앙고한테 애 좀 먹었다. 중반까지 1대1 팽팽하다 김태업의 결승솔로로 이기고 동향 간 결승 대결에 나섰다. 중앙고-광주상고 경기는 상당히 과열돼서 경기 도중 양측 응원단이 유리병을 집어던지는 난투극을 벌였다. 나는 우리 학교의 두 번째 경기를 기다리느라 제대로 못 봤지만, 첫 경기에 선동열이 나섰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는 투구제한이 전혀 없었다. 결승에서 광주일고는 충암고를 상대할 때와 비슷한 넉넉한 실력으로 광주상고를 제압했다.

광주학교들의 실력이 역대 급으로 압도적이었던 한 해다. 하지만 이 해는 광주에 크나큰 아픔이 있었던 때다. 격변의 충격이 경기력에도 영향을 미쳤는지, 그 해 중반 또 다른 결승에서 고3 선동열의 광주일고는 2학년 박노준 김건우가 맹활약한 선린상고에 역전패 당한 일이 있었다. 이 경기 해설자는 광주일고 선수들의 집중력 고갈을 계속 지적했다.

연초 4강전에서 중앙고와 대진표가 엇갈렸던 광주일고는 그해 마지막 대회 8강에서 만나게 됐다. 중앙중고등학교 전교생 관람 기준인 4강은 아니어서 수업 중 교실에서 라디오를 교탁에 놓고 들었다. 물론 완고한 선생님들 중에는 이를 불허하는 분도 있었다. 결과는 7회 광주일고 콜드게임 승이었다.

선동열이 국가적 영웅투수가 된 계기는 그가 고려대 2학년 때 세계야구선수권대회다. 한대화의 역전 쓰리런으로 유명한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완투해 5대2 승리를 이끌었다.

이른바 86세대들한테는 젊은 날의 향수가 곳곳에 담겨있는 선동열의 영웅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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