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설립 은혜도 날카로운 비판으로 보답하는 곳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지금까지 다녀본 학교가 모두 6개다. 외국학교 두 곳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학교 네 곳의 교가는 모두 최소 1절을 지금까지 외운다. 정말이다. 초등학교 교가도 2절까지 외워서 최근에 제창한 적 있다.

네 개의 교가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곡이 중앙중학교 교가다. 이건 4절까지 모두 외운다. 중앙고등학교도 같은 교가를 쓴다.

우선 곡조가 다른 교가들과 달리 매우 경쾌하다. 더욱 맘에 드는 점은 가사다. 일제침략기에서부터 시작한 우리말 침탈의 흔적이 전혀 없이 ‘뫼(산)’ ‘가람(강)’ 등 때 묻지 않은 본연의 어휘들이 우리말 본연의 운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교가의 가사를 지은 사람은 육당 최남선이다. 민족사에 깊은 아쉬움을 남긴 인물 가운데 하나다.

나는 혹시 요즘 분위기에 중앙학교 교가도 바꿔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졸업생의 한 사람으로 내 의견은 이 좋은 교가는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곡이 좋아서, 가락이 좋아서가 아니다. 이 학교가 역사적으로 자랑할 만한 일들을 남긴 시점에 중앙학교 학생들은 이 교가를 통해서 웅원하고 성신한 충정을 더욱 용맹하고 단단하게 다졌다.

3.1 운동이야 워낙 민족적 거사여서 중앙 한 학교의 비중을 크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중앙고등학교 교내의 3.1기념관은 당시 운동을 조직하던 인사들이 모여서 숙의를 하던 중앙학교 교무실을 오늘날 보전하고 있는 것이다.

6.10 만세운동에 이르면 중앙학생들의 비중은 더욱 커진다. 1929년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의 인산일에 벌어진 이 운동을 주도한 것은 중앙과 중동학교 학생들이다.

한국의 청소년들이 그저 대학갈 생각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다고는 하지만, 이와 같은 장엄한 역사의 존재는 등하교길 학생들의 잠재의식에 분명한 정체성의 한 부분을 만들어준다.

육당이 이 교가를 쓰고 나서 나중에 친일파로 변절했다지만, 그 노래를 부른 학생들은 육당과는 전혀 다른 성향을 더 강하게 드러냈다.

그래서 교육계의 친일잔재 청산을 하더라도 현명한 판단으로, 이미 노래 자체가 깊은 역사를 함께 한 것들은 그대로 보존이 돼야한다고 본다.

중앙교가가 너무 좋아서 분위기의 연장선에 있는 고려대학교 교가도 찾아보게 됐다. 같은 재단의 학교다. 고분고분하기를 거부하는 교풍도 ‘형과 아우’ 관계다.

그런데 고려대 교가는 고급스럽긴 한데 뭔가 중앙교가의 옛 멋은 없어 보인다. 알고 보니 춘원 이광수가 작사한 옛 교가 대신 ‘청록파 시인’의 절개를 평생 지킨 조지훈의 새 교가를 쓰고 있었다.

남의 학교 일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 대학교는 교가의 위상이 중고등학교 교가에 못 미치니 이런 결정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고려대의 인촌동상 논란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수 십 년을 그치지 않는 논란이다.
 

▲ 고려대 총학생회 간부들이 지난해 인촌 김성수 동상 앞에서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이 도발주의적 성향을 띄었을 때는 대학가에서 학생들이 철거를 요구하는 동상에 천을 덮기도 했지만, 지금 학생들의 의사표현 방식은 당시와 전혀 다르다. /사진=뉴시스.


1980년대까지는 인촌 김성수의 묘도 고대 안에 있었다. 그런데 경건한 성역으로 보전되기 보다는 그 일대에서 학생들이 탈춤이나 농악 연습을 하는 장소로 자주 쓰였다. 그가 친일파라서 일부러 가서 소란을 떤 것이 아니라, 정숙해야 할 강의실과 비교적 거리가 있는 널찍한 공터였기 때문이다. 1987년 민주화와 함께 친일논란이 다시 커지자 그의 묘소는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김성수 동상을 고대에서 철거하거나 옮기자는 얘기는 계속 나오고 있다.

여기에 대해 반론도 있다. 친일 행적의 아쉬움은 있으나 어떻든 학생들이 훌륭한 교육을 받을 터전을 만들어 외세를 물리치는 지식인으로 성장한 것이니 최소한 그가 세운 학교에서만큼은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다.

하지만 대학은 앞선 중고등학교와 달리 성인들이 훈육보다는 자성에 의해 더욱 성장을 하는 지식인의 첫 장이다. 사회에 대해서도 참여의식이 없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제대로 된 대학이 아니라 기능학원으로 간주된다.

때로는 세상에 대해 호랑이의 포효하는 질타를 하는 현장인데 민족사에 큰 오점을 남긴 인물의 동상을 한복판에 둘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모든 논란의 결론은 고려대생들이 스스로 내릴 일이다. 내가 나온 학교는 고려대가 아닌 중앙중학교여서 안암동의 동상에 대해 뭐라 말참견을 할 입장은 아니다.

내가 참견할 수 있는 대학교의 동상은 성균관대의 심산 김창숙 선생 동상이다. 그런데 이 동상은 논란이 아니라 한민족 모두의 존경을 사고도 남을 대상이다.

일제치하 임시정부에서 저항운동을 하다 투옥됐다가 해방을 맞았다. 일제가 경학원으로 전락시킨 성균관을 다시 대학으로 부활시킨 분이 심산이다. 대쪽 같은 선비기질은 좌파들로부터 “말이 제일 안 통하는 영감”이란 불평을 샀지만 이들도 심산을 함부로 공격할 인격의 빈틈이 없었다. 이승만 독재에도 저항을 그치지 않아 노년의 그가 피를 흘리며 연행되는 사진도 남아있다.

어처구니없게 1990년까지 성대 교정에 심산의 동상이 없었다. 마침내 재학생과 교수, 동문들의 뜻이 모여 설립이 시작됐지만 하필 그때 재단이 운영을 포기하고 학교를 떠나 그야말로 주머니 돈들이 모여 마침내 동상이 세워졌다.

성균관대에서 학교의 중흥시조이신 심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심산 이후 이 학교에는 큰 공로를 한 분이 또 하나 있다. 삼성그룹의 설립자 호암 이병철이다. 이병철 이건희 부자가 어려울 때마다 운영을 맡으면서 621년 아시아 최고(最古)대학의 역사에 걸맞은 위상을 회복한건 누구도 부인 못한다.

그런데 삼성이 성대운영을 맡은 이후 간간이 교지를 회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는 얘기를 듣곤 했다. 그때마다 알고 보면 삼성을 비판하는 내용이 들어갔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5공 신군부의 폭압적 독재가 기승을 부릴 때, 성균관대는 자생적인 순수저항으로 그 강한 생명력을 과시했던 곳이다. 일부 친북논란을 빚은 운동권과는 근본부터 다른 토속적 저항색체를 독불장군처럼 유지했다. 그랬던 학교에서 지식인들이 외압으로 글을 못 쓰는 일이 벌어졌다니...

이런 쪽의 활동에 차단벽이 세워진 공간이라면, 그 대학은 절대 정상의 반열을 넘볼 수 없다.

아마 새로운 문화가 정립되기 전, 어설픈 자들의 착오나 어리석은 충성과시가 빚어낸 해프닝일 것으로 믿고자 한다.

성균관대에서 벌어진 세미나에서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선을 차분하게 촉구하는 토론이 벌어진다면, 이것보다 더 삼성그룹과 성균관대의 이미지를 격상시키는 일도 없을 것이다. 단, 그런 자리일수록 구호와 머리띠 같은 반독재투쟁 시절의 스타일은 철저히 사라져야 한다.

초일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니 5% 유의수준을 충족시킨 결론에 대해 학문적 살기를 띤 토론을 하더라도 헤어질 때는 유머러스한 덕담을 주고받으며 ‘다음번 토론 때 두고 보자’ 다짐하는 것이 지금 지식인들의 역할 한계다.

배움의 터전을 마련해준 은인들에게는 이처럼 훌륭한 지식인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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