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이성계의 장남이 후계 이어받았다면 훗날 방원은 없었을 것

신봉승의 역사소설 ‘조선왕조500년’(같은 이름의 드라마로 10년동안 방영된 작품의 원작)에 나오는 장면이다. 비록 소설 속의 각색이지만 당시의 정치 상황을 너무나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세자로 막내아들 방석을 임명하자, 이 자리를 탐내던 다섯째 아들 방원(태종)은 술에 찌들어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이때 방원의 최고 참모 하륜이 등장해 한마디를 던졌다.

“진안군을 세자로 책봉했으면 기쁘시겠소?”

술독에 빠져 세상원망만 퍼붓던 방원은 이 한마디에 껄껄 웃으며 술상을 걷어치우고 하륜과 다음 일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촌철살인의 한마디가 그대로 방원의 본심을 찔렀던 것이다.

하륜이 말한 진안군은 이성계의 맏아들, 즉 방원의 가장 큰 형님 방우다. 유가(儒家)의 적장계승 이념대로라면 마땅히 세자가 됐어야 할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의 세자가 아니라 고려의 충신이 되겠다”며 함경도 고향으로 숨어버렸다.

하륜의 얘기는, 만약 법도대로 진안군이나 둘째 영안군(방과. 정종)이 세자가 됐다면 과연 방원이 “그 자리는 나를 앉혔어야 하오”라고 주장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부왕이 법도를 깨고 어린 아이를 막중한 저군(儲君)의 자리에 앉히는 실정을 저질렀으니, 덕택에 훗날에라도 이를 ‘바로 잡을’여지가 생겼음을 하륜은 방원에게 일깨우고 있다.

만약 이성계가 애초부터 첫째나 둘째 아들을 세자로 정했다면, 이방원이 혁명이든 정변이든 세자가 되기는 지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명분도 없지만 현실성도 크게 떨어지는 일이다.

물론 이방원의 ‘롤 모델’인 당태종 이세민은 동복형인 태자 건성을 직접 활로 쏘아 죽이며 정권을 차지했지만, 이세민은 거병에서부터 천하군웅을 토벌하는 건국대업 대부분을 이룩한 사람이다. 이방원의 기여도는 이세민에 비해 한참 부족한 수준이다. (등극 후 왕조의 기틀을 이룬 면에서는 조선 태종이 당태종을 더 앞선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런 처지에 방원이 형들을 제치고 ‘나라를 내게 주시오’라고 하기는 곤란한 노릇이다.

바로 이 같은 이방원의 딜레마를 근원적으로 제거해 준 것이 바로 열 한 살짜리 어린아이 방석의 세자 책봉이다.

“젊은 계집의 농간에 빠져 적장자를 놔두고 어린 애를 세자로 삼았다”며 화풀이하는 방원이지만 본심 깊숙한 곳에서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음을 하륜이 지적했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정도전이라는 당시의 거물이 어떤 선택을 했어야 하는지도 강하게 시사한다.

실록은 “공신 배극렴 조준 정도전이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면서, 나이와 공로로써 청하고자 하니, 임금이 강씨(계비 신덕왕후)를 존중하여”라고 해, 오히려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불리하지 않았던 입장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의 과정에서 정도전은 의심의 여지없는 ‘방석 세자당’의 영수가 돼 이방원과 피할 수 없는 유혈 대결의 길로 들어섰다.

 

만약, 정도전이 방석이 아닌 영안군 이방과를 세자로 추천해 이를 관철시켰더라면?

정도전 초상화
그랬다면 태조에 이어 정종 시대에도 정도전은 흔들림 없는 신하 중 으뜸의 자리를 지켰을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이 시나리오에서는 영안군의 묘호도 정종이 아닌 태종이 됐을 것이다. (세종은 왕조의 2대 임금에게 올리는 태종의 묘호를 부왕에게 올리고자 해서, 이미 승하한 백부 정종에게 공정왕이라는 시호만 올렸다. 정종의 묘호는 한참 세월이 흘러 숙종조에 이르러서 정해진 것이다. 정종의 자손들이 계속 왕위를 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선대의 개국공신에다 자신의 세자 책봉에 앞장선 고굉지신이니 정도전이 새 왕조 구상을 추진하는 힘은 거의 손실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정도전의 호감을 사기 어려운 점이 있다.

영안군 방과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록은 그를 “항상 태조를 따라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고 전한다. 이성계의 여덟 아들 중에서 유일하게 풍부한 야전 경험을 갖춘 무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간혹 그를 동생 태종을 무서워한 유약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지만, 실록에는 오히려 노후 두 명의 상왕이 돼서도 태종이 정종에게 깍듯한 예우를 하는 기록이 수없이 등장한다.

원래부터 정치에 뜻이 없던 사람이 1차 왕자의 난 직후에 집안과 나라의 태평을 위해 잠시 대권을 맡다보니 정치보다 격구에 열중한 사람이 됐지만 만약 정상적 과정으로 그가 세자가 되고 임금이 돼서 실권을 쥐고 실질적인 책임을 통감했다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정도전이 아무 것도 모르는 임금을 조정하면서 사실상 섭정의 권력까지 누리기는 어려워지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정도전을 바로 눈앞의, 보다 더 달콤해 보이는 선택으로 이끌었다. 열 한 살짜리 어린아이 방석이었다. 방석을 보위에 앉히면 최소 10여년의 섭정 지위에, 설령 어려서 곱게 자란 왕이 장성해서도 정도전에 대한 의지가 커서 평생 동안 왕보다 더한 권력도 누려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길은 정도전의 패망을 예약하는 길이었다. 달콤함을 추구한 이 길은 정도전 자신의 평생 행적을 앞뒤가 안 맞는 모순덩어리로 추락시켰다.

고려를 대체한 조선이 우리 역사에서 갖는 의미는 ‘시스템에 의한 통치’를 지향한 것이다. 몇몇 권문세가가 입맛대로 행하는 정치가 아니라 모든 사대부에게 공평한 법치를 확립하는 것이 조선의 존재의미다. 그러자면 우선, 대권부터 흔들림 없는 원칙이 있어야 했다.

유가에서의 적장계승은 공자보다도 더 오래된 핵심 이념이다. 맹목적으로 맏아들 선호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잘났든 못났든 대통은 적장으로 확립돼야 난신적자가 세상을 뺏고 뺏기는 혼란을 원천 차단한다는 믿음이다. 만약 장자가 덕은 있으되 재주가 부족하다면 그것은 신하들의 보필을 통해 보완할 수 있다는 ‘신권 정치’의 핵심도 사실은 적장계승과 깊게 관련돼 있다.

이는 공자가 성인으로 여기는 주나라의 주공 단이 은나라를 무너뜨리면서 형종제급(형이 죽으면 동생이 승계하는 법) 대신 세운 법도다.

그러한 국가의 핵심이념을 정도전 스스로 무너뜨린 결과가 됐다. 바로 이같은 그의 모순이 술을 퍼마시고 있는 이방원의 폐부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어 ‘세상은 이방원에게도 한 가닥 희망을 남겨주는구나’라는 회심의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어린 세자를 지키기 위해 정도전은 힘이 될 만한 심효생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도록 해서 당파를 늘리고 또 쟁쟁한 왕자들의 힘을 분산시키려고 지방 분봉까지 구상했다. 이 과정에서 난데없는 요동정벌 발상까지 나와 개국 초 할 일도 많은 터에 명 태조 주원장의 외교적 압박까지 자초했다.

한번 어긋난 선택을 고수하기 위해 정도전 스스로 정치의 수렁을 깊게 파 들어갔다. 심리적으로 여유가 없던 정도전 일파는 이성계 사후 어서 빨리 세자를 즉위시키고 승계를 기정사실화하는 것만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성계가 없다면 눈엣가시 같은 신의왕후 소생 4왕자, 영안 익안 회안 정안군을 처형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두발 뻗고 편하게 자는 날들이 오는 것이다.

이성계가 사경을 헤맨 1398년 8월말의 어느 날, 정도전 남은 심효생 일파는 혹시 임금이 승하한 후의 즉각적인 대처를 하기 위해 안국동 남은의 작은 집에 모여 있었다. 조선의 행정권과 병권을 모두 손에 넣은 이들 일파였지만 그 시간 이방원의 사병과 정릉이안군, 충청도 관병들이 경복궁을 향해 진군하고 있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불세출의 천재라던 정도전이 정권 다툼에 패해 사라졌지만, 그의 구상들을 크게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실현성 높은 구상들은 태종 이방원에 의해 대부분 조선의 제도로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린 임금을 앉혀놓고 상보 노릇을 하려던 불순한 요소가 제거됐으니 어찌 보면 조선 역사가 첫 번째의 시련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간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가 죽은 지 467년이 지난 1865년 고종 2년, 수렴청정을 한 조대비(신정왕후)는 교서를 내려 “법궁(法宮. 경복궁)의 전각들이 차례로 완성되고 정도전이 전각의 이름을 정하고 송축한 문구를 생각해보니 천 년의 뛰어난 문장으로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며 그의 복권을 명령했다.

충신과 역적의 평가에서는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정치적 죄인들이 복권된 숙종 대에도 정도전은 역적의 처지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고종 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새삼 그의 출중한 재능이 주목을 받으니 왕조의 끝 무렵에 이르러서야 사후 복권은 이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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