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본지는 프로야구 또한 오늘날 중요한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산업의 하나로 접근한다.

프로야구의 가장 큰 부가가치는 '감동'의 생산에 있다. 돈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음을 입증한 원년 박철순의 '투혼', 스포츠 정신을 내던진 승부조작에 일격을 날린 한국시리즈 유두열의 3점 홈런, 국제무대에서 국민들의 심정을 200% 이상 실현해준 선수들의 한일전 투혼과 함께 최동원-선동열 두 영웅의 전설 역시 소중한 부가가치다.

최근 두 사람의 '1승1무1패' 전설을 빛바래게 하는 '4차례 대결' 주장이 나왔다. 야구산업의 부가가치란 점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황을 실제로 보고 자세하게 보도한 언론은 최근 수년 동안 본지가 유일하다는 점 때문에 또 한 번 "전설의 대결은 세 차례"였음을 강조한다. (관련기사: 최동원-선동열의 진짜 '퍼펙트게임'에서 최고 장면은)

6년 전 기사의 행간에 담았던 점을 좀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프로야구 최고 투수는 선동열이라는 개인 견해를 밝힌다. 이것은 해태와 롯데가 아닌 제3의 팀을 응원하는 입장에서 본 것이다. 단, 동일한 연령대가 아니라 25~29세의 최동원과 22~36세의 선동열 비교다. 최동원 프로경력에서 야구외적인 것이 경기력에 심각한 영향을 준 1988년 이후는 제외했다.

최동원이 프로야구선수로서 전성기였던 1984년 27승을 올릴 때 MBC와의 경기에서는 대학후배 김영균이 오늘날의 '이용규 플레이'와 같은 거듭된 파울처리를 하는 장면도 가능했다. 끝내 볼넷을 얻자 김영균이 출루하면서 최동원한테 헬멧을 벗고 고개 숙여 죄송함을 표시한 점이 오늘날과 다른 풍속의 하나였다. 1986년 선동열의 투구는 이게 불가능했다. 당시 타자들에게는 번트 타이밍도 어려운 선동열의 강속구에 이렇게 갖다 대면 방향 컨트롤은커녕 파울팁 아웃이 되거나 얌전한 내야수 직선타구가 될 뿐이었다. 이런 구위 덕택에 선동열은 박빙의 승부 무사3루 구원등판으로 승리투수가 되곤 했다.

1987년 들어서는 최동원의 퇴조가 확연했다.
 

최동원과 선동열의 1987년 5월16일 15회 완투 맞대결을 다룬 2011년 영화 '퍼펙트게임'. /사진=뉴시스.
최동원과 선동열의 1987년 5월16일 15회 완투 맞대결을 다룬 2011년 영화 '퍼펙트게임'. /사진=뉴시스.

한 해전 프로야구는 역대최고 투고타저(리그전체 평균자책 3.08)였지만, 대단히 박진감 넘치는 순위경쟁이 1년 내내 이어졌다. 팀마다 20승급 에이스들을 보유한 덕택이다. 해태 선동열(24승) 롯데 최동원(1984년 27승, 1985년 20승, 1986년 19승), 삼성 김시진과 김일융(1985년 25승 공동1위) 3강에 MBC 또한 신인트리오 김건우(18승)-김용수-김태원으로 맞서면서 상위권 경쟁을 이어갔다. OB는 최일언-장호연 듀오와 김성근 감독의 '칼 타임 마운드방문-투수교체' 작전으로 끝내 후기리그의 포스트시즌 진출권을 얻었다.

롯데는 후기리그에서 페이스가 떨어져 가을야구 경쟁을 비교적 일찍 접었지만, 최동원에게는 한국프로야구 전무후무한 3년 연속 20승 도전의 목표가 남아있었다. 이 목표는 선동열도 실패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1986년 시즌 마지막 경기, 3대1로 이기는 9회말 투아웃에서 최동원은 특유의 자존심으로 직구승부를 하다 OB 김형석에게 투런을 맞으면서 2년 연속 20승에만 머물렀다. 이날의 아쉬운 패배는 결과적으로 최동원 경기력의 급격한 변곡점이 되고 말았다.

다음해 시즌 초부터 최동원의 구위가 전같지 않았다. 14승12패 2.81의 시즌기록은 여전히 투고타저였던 1987년엔 오늘날의 3~4 선발급에 불과했다. 최동원의 갑작스런 부진은 윤학길에게 '고독한 황태자'의 별명을 붙여줬다.

그래서 전설의 세 번째 경기인 15회 무승부가 더욱 빛나는 것이다.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닌' 최동원이지만, 이날만큼은 승부사의 혼으로 감동과 전설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이 감동에 반론이 되고 있는 '네 차례 맞대결'론이 과연 타당한가.
 

4월의 대결은 '맞대결'이 아닌 이유

문제가 되는 경기는 5월16일 무승부보다 앞선 4월 무렵의 해태와 롯데 주말경기다. 이 때 프로야구는 주말 선발투수예고제를 도입했다. 본격적인 선발투수 예고제에 앞선 과도기 실험을 한 것이다.

해태선발은 김대현, 롯데선발이 최동원이었다. 김대현은 그해 해태가 무명에서 발굴한 진주였지만, 아직 그 진가가 입증되기 전이었다. 그는 그 해 해태 우승을 이끌었지만, 안타깝게도 다음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날 경기에서 김대현은 예고대로 등판해 한 타자만 잡고 선동열로 교체됐다. 해태가 규정을 어긴 것은 없으니 징계는 받지 않았지만, 투수예고제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이로 인해 주말 선발예고제마저 얼마 안가 폐지되고 전면적인 도입은 1998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김응용 해태감독이 편법을 부린 이유는 당시 야구를 봐야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 이런 사정은 절대로 검색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해태는 1987년 시즌을 전년 우승팀에다 사상 최초 두 번 우승팀이란 여유로운 입장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스포츠 정신이란, 한번 이겼다 해서 그 다음 승부가 느슨해지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여기다가 삼성과 OB의 상승세가 두드러져 시즌 전 강호로 분석됐던 MBC도 제치고 이미 포스트시즌 진출 후보의 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해태 공격의 핵심인 '클러치히터' 김성한이 손가락에 투구를 맞고 장기결장하게 됐다. 김성한의 결장은 해태 공격의 모든 짜임새를 무너뜨렸다. OB와의 광주 홈경기에서 해태는 0대15로 참패를 당했다. 이런 무참한 패배에 홈팬들은 오히려 경기후반 OB선수들이 안타를 치고 아웃을 잡을 때마다 열광적 환호를 하며 관전을 마쳤다. 해태선수들에게 심각한 질책인 동시에 대망신이었다.

김응용 감독에게 주말 경기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절박감으로 이어졌다. 편법 선발예고는 이래서 나왔다. 이때만 해도 김대현이 얼마나 대어인지가 확인이 안 된 상태였다. 이미 퇴조가 역력한 최동원이지만, 김대현은 아직 확실히 이길 카드가 아니었다. 1년 전이라면, 선동열 역시 최동원만큼은 승리를 보장할 수 없었지만, 1987년 들어 둘 사이의 우열은 이미 확연해지고 있었다.

당사자들은 자신의 입장을 달리 설명할지 몰라도, 야구를 보는 관전자들의 눈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는 명백한 전후의 사정이 이렇다. 야구가 전후반 45분 경기가 아닌 것을 알려면 초등학교 1학년은 돼야 한다. 당시 정황을 지켜봤다면 오늘날 40세는 넘은 사람들이다.

결과는 해태의 6대2 승리였다.

맞대결이란, 서로 상대가 나올 것을 알고 공평하게 준비를 해야 이뤄지는 것이다. 저쪽이 나오는 것을 이쪽만 알고 상황을 봤다가 등장하는 것은 대결일 수는 있어도 맞대결이라고 할 수 없다. 승부에 임하는 공평함을 상실한 것이다.

최동원의 구위가 여전했던 한 해전이라면 재고의 여지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내리막길이 확연한 1987년 이런 기습적인 대결을 맞대결이라 할 수 없다.

전설의 '1승1무1패' 이외의 또 하나 해태와 롯데의 대결일 뿐이다. 야구산업 전체적으로 선진화를 10년 넘게 늦추게 만든 일을 굳이 전설에 끼워 넣을 이유도 없다.

결론은 '15회 맞대결'과 '1승1무1패'의 투혼전설은 전혀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 전설에는 두 영웅의 상대에 대한 존중이 함께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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