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는 모반 가능성이 없는 신하를 가장 신뢰...소하의 생존비결 주목

드라마 초한지의 소하
한고조 유방의 군대가 진나라 아방궁에 입성했다. 모든 사람들이 금은보화를 찾아다녔지만 소하(蕭何)는 진나라의 모든 서류철과 지도를 찾아서 확보했다. 그가 얼마나 국정관리에 몰두했는 지를 보여주는 얘기다.

초한동란이 지속되는 동안 소하는 천하의 도읍이며 비옥한 관중 일대를 지켰다. 최전선에 병력과 양식을 차질없이 보급하는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했다.

항우와 목숨을 건 대치를 하는 유방이 수시로 관중으로 사자를 보냈다. 측근이 소하에게 충고했다.

“사자가 자주 오는 건 임금이 당신을 위로하는 게 아니라 의심하는 겁니다. 집안의 자제들을 모두 싸움터로 보내는 것이 좋겠소.”

소하가 충고를 따르자 유방은 크게 기뻐했다.

관중을 잘 지키고 보급을 완벽히 수행한 공로로 소하는 통일왕조 한나라에서 상국의 자리에 올랐다. 오늘날의 국무총리나 영의정에 해당하는 벼슬이다.

통일 후 무수한 공신들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때마다 고조는 친히 토벌을 위해 나서야 했다. 재상 소하가 역시 장안을 지키며 수송의 임무를 맡았다.

한고조 11년, 전선에서 황제가 사자를 보내 장안을 잘 지키는 공로를 치하하며 소하의 식읍을 늘려줬다. 측근이 소하에게 뜻밖의 조언을 했다.

“황제는 벌판에서 고된 전쟁을 치르고 상국은 장안에 편하게 있는데 오히려 식읍을 늘리고 호위병을 붙여준 것은 사실 황제가 상국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전부 사양하시고 전 재산을 군비에 보태셔야 황제가 의심을 풀고 기뻐할 겁니다.”

크게 깨달은 소하는 이 충고를 그대로 따랐다.

다음해 고조는 또다시 반란 토벌에 나섰다. 이 때도 전선에서 무수한 사자가 다녀갔다. 소하는 여전히 자신의 재산으로 군비를 보태고 장안 통치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측근이 이번엔 더 무서운 조언을 했다.

“상국은 이제 멸문이 멀지 않았습니다. 황제가 사신을 자주 보내는 것은 상국이 10년째 장안에서 명성을 쌓아 민심을 얻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상국이 장안에서 모반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 측근은 해결책으로 상식과 전혀 딴판인 방법을 제시했다.

“백성들의 땅을 헐값에 사들여 비싸게 임대를 해서 명성을 떨어뜨리십시오. 그래야 황제가 기뻐합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지만 또다시 크게 깨달은 소하는 측근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과연 그렇게 자주 나타나던 사자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황제의 의심은 해소했지만 민심을 들쑤신 일이 그냥 넘어갈리는 없었다. 황제가 개선하는 길에 땅을 뺏긴 백성들이 몰려나와 ‘상국 퇴진’ ‘소하 구속’을 요구하며 아우성을 쳤다.

소하가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 백성들의 고소장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고조가 “상국은 백성들을 이런 식으로 보살펴?”라고 책망은 했지만 표정은 매우 편안했다.

한나라 개국 3걸하면 장량과 한신, 그리고 소하를 의미한다.

장량은 제갈양이 스스로를 유비의 장자방(자방은 장량의 자)이라고 비유했다는 책략의 귀재다. 한신은 배수의 진과 같은 전설적인 전법을 남긴 전법의 최고수다. 이들에 비하면 소하는 좀 생소하다.

소하의 공은 초한 동란 내내 내치와 보급을 잘 했다는 것이다. 이런 정도의 공이라면 홍문의 연에서 우격다짐으로 한고조 유방을 구해내고 무수한 적장을 참한 번쾌만도 못하지 않냐는 생각도 들 수 있다.

그런데 고조는 소하를 3걸 뿐만 아니라 이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공신으로 대접했다.

이미 항우가 사라진 통일 천하에서 장량, 한신과 달리 소하는 아무리 높은 권위를 실어줘도 황제에게 별로 부담이 안되는 인물이었다. 이게 바로 두고두고 소하가 살아남은 핵심이다.

임금이 신하에게 요구하는 최고의 덕목, 아무리 군주가 무방비 상태여도 절대로 모반을 하지 않겠다는 신뢰를 심어준 거의 유일한 인물이 소하다.

한신 뿐만 아니라 무수한 개국 공신들이 천하 통일 후에 반란을 도모하다가 토벌돼 사라졌다. 말위에서 천하를 평정할 때와 붓으로 다스릴 때의 차이에 적응 못한 공신들을 정리하는 문제는 한나라 뿐만 아니라 당, 명, 청 등 모든 왕조의 공통 난제였다.

그러나 소하가 고조에게 절대 신뢰를 얻어내는 과정도 평탄한 길은 아니었다. 서민들의 눈에는 그저 평온하고 겸손하게 재상 노릇을 한 것으로만 보이는 그 이면에는 마치 우아한 백조가 수면 아래서 어지럽게 발장구를 치는 무수한 파동이 있었다.

그러한 처절한 처세의 기록이 앞서 소개한대로 사마천의 사기에 담겨 오늘날까지 최고의 매뉴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소하 또한 유방의 무서운 의심의 눈초리에서 무탈하게만 지내지 못했다.

백성들의 땅을 가로채 개선한 황제에게 가벼운 책망을 듣는 자리가 끝내 사단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고조는 소하에게 “백성들에게 일일이 사과해”라고 지시했다.

황제도 귀환해 소하는 더 이상 탐관오리 행세를 할 필요도 없고 긴장도 풀어졌다. 자신에 대한 원망을 가라앉히는게 급선무라는 생각만 앞세웠다.

“장안 백성들이 피폐한데 폐하의 상림원(황제의 사냥터)에는 공터가 많으니 이 땅을 백성들에게 나눠져 농사를 짓게 하소서”라고 주청했다.

소하의 탐관 행세를 낄낄거리며 바라보던 황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호통이 떨어졌다.

“상국이 상인들의 재물을 받아 짐의 땅을 요구하는구나!”라며 소하에게 족쇠와 수갑을 채워 구금해 버렸다.

일찍이 패현 고향에서 현의 관리 소하와 건달 유방으로 만나 상하가 뒤바뀐 군신지간이 된 지 50여년 세월에 두 사람간 최대의 파란이 일어난 장면이다.

며칠 후 신하가 황제에게 간했다.

“소하가 만약 폐하를 거역할 마음이 있었다면 수년동안 소하 혼자 관중을 지키는 동안 아무 일이 없었겠습니까? 그때도 이익을 취하지 않은 소하가 지금와서 상인들 때문에 이익을 도모하겠습니까?”

고조는 입맛이 씁쓸했지만 사자를 보내 소하를 석방했다. 맨 발로 사죄하러 나타난 소하에게 고조가 기분 내키는대로 내뱉었다.

“상국은 백성을 위하는데 짐이 윤허하지 않았으니 짐은 걸, 주와 같은 폭군이고 상국은 어진 재상이오. 짐의 잘못을 백성들이 잘 알게 하려고 상국을 구금했던 거요.”

 

명군과 명상의 잠룡 시절

유방과 항우가 거병하기 한참 전인 진나라 시절, 패현에 부유한 유력인사 여태공이 나타나 잔치를 벌였다. 마을의 관리 소하가 이 잔치를 주관했다.

유력인사들은 천냥의 예물을 들고 여태공을 찾아왔다. 이 때 ‘하례금 만냥 유방’이란 명자를 건네받고 여태공은 크게 놀랐다. 유방을 맞이하러 나서자 소하가 나직하게 충고했다.

“전부 허풍입니다. 매번 저런 식이지요.” 소하 말대로 유방은 만냥 커녕 한 푼도 없는 빈손이었다.

그러나 관상을 볼줄 아는 여태공은 이 허풍쟁이 건달의 풍채가 비범한 것을 알아보고 바로 사위로 삼았다. 이 딸이 바로 여태후다. (앞선 만필 참고: http://www.choic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711)

진시황의 폭정에서 패현도 벗어나지 못했다. 함양에 가서 부역하는 일을 유방이 맡게 됐다. 패현의 관리들이 유방에게 300전 씩을 줬는데 유독 소하는 500전을 줬다. 평소에도 소하는 관리 신분으로 유방을 돌봐줬었다.

부역 떠날 때 소하가 200전을 더 건내준 것을 잊지 않았던 유방은 천하 통일 후 소하에게 2000호의 식읍을 더 주는 것으로 갚았다.

소하는 집을 살 때도 번화한 곳이 아니라 외진 곳에 마련했다. 재개발 여지라고는 전혀 없으니 재산 축적과는 거리가 먼 동네였다. 그가 밝힌 이유는 이렇다.

“내 자손이 현명하다면 내 검소함을 배울 것이고, 현명하지 못하더라도 권세가가 이 집을 탐내서 뺏지는 않을 것이다.”

건국 3걸중 한신은 당대에 역모로 처형당했고 장량도 아들의 대에 이르러 불경죄로 작위가 취소됐다. 다른 무수한 공신도 당대에 별탈없이 지냈어도 2대나 3대 이상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런데 소하는 4대만에 대가 끊겼어도 조정이 나서서 후사를 찾아 계속 작위를 이어가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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