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실록 1401년 1월25일의 기록이다.

 
“공(公)·후(侯)·백(伯)의 호(號)를 고치었으니, 참람되게 중국을 모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의안공 이화는 의안부원대군, 태종의 친형인 익안공 이방의는 익안부원대군으로 고쳐 불렀고 완산후 이천우는 완산군, 평양백 조준은 평양부원군이 됐다.
 
공, 후, 백은 중국 주나라 춘추시대의 봉건제 기준에서 정식 제후인 반면, 군(君)은 그 이하 남작이나 자작 등 아직 정식 제후 반열에 오르지 못한 낮은 품계를 뜻한다. 왕의 숙부와 친형을 비롯해 개국공신들까지 모두 한번의 조치로 신분이 격하된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 저 기록을 읽는 사람들은 조선이 아주 사대주의에 찌들어서 나라의 등급을 스스로 깎아내렸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참람되게 중국을 모방할 수 없어서”라고 밝힌 이유는 참으로 앞뒤가 안 맞는 설명이다.
 
▲ 태조 이성계 어진.
정작 자기 아버지 이성계가 승하한 1408년, 태종은 8월에 태조라는 묘호를 올렸다. 일개 제후를 자처했다면 가당치 않은 일이다. 뿐만 아니다. 11년에 가서는 조선 개국 당시에 추존된 이성계의 조상들 목왕, 익왕, 도왕, 환왕에게도 모두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묘호를 올렸다.
 
조선이 신하들에게 공, 후, 백작을 봉하는 것을 명나라가 못마땅하게 여겼다면 임금에게 ‘태조’라는 묘호를 붙이는 것은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조선 역사 내내 ‘태정태세...’를 하지 말라고 명나라가 협박했다는 얘기는 아직 들은 적이 없다. 이후의 청나라도 마찬가지다.
 
고려나 조선 임금들에게 조종의 묘호 붙이는 것을 못하게 한건 몽고의 원나라뿐이다. 그때는 실질적인 국방까지 원나라가 떠맡아 할 정도였으니 정상적 국가 운영이 이뤄지지 않던 시절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태종은 중국과의 관계를 핑계로 삼아서 신하들과 임금의 신분 간격을 더 벌려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임금의 권위의식 이상의 실질적인 의미가 담겨있다고 본다. 오늘날 강조되는 ‘구조조정의 지혜’와도 맥이 통한다.
 
고려 전성기를 이끌었던 문종대왕의 시대와 비교해 보겠다. 문종은 나중에 임금이 된 순종 선종 숙종과 대각국사 의천을 제외하고도 9명의 아들을 더 낳았다. 이들은 상안공 금관후 변한후 낙랑후 조선공 부여공 진한공 등의 군호를 받았다.
 
조선은 좁은 의미로만 봐도 한반도 북부일 것이고 부여는 압록강 인근, 진한은 신라 지역이다. 이렇게 영토 곳곳을 왕자들이 나눠가졌으면 도대체 고려 임금은 어느 땅을 다스렸다는 말인가.
 
물론, 왕자들의 군호는 주나라 봉건제도와 달리 명목에 불과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들이 공작, 후작의 지위를 갖고 있는 이상, 국가는 그에 상응하는 예우를 하고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실제로 조선, 부여, 진한에 나가 힘써서 통치하고 외침을 물리치는 일을 하는 건 아닌데 예우는 그렇게 받아야 한다는 거다.
 
조선의 태종은 바로 이 같은 폐습을 특유의 강력한 왕권으로 한 방에 일소한 것이다. 자신들의 지위가 낮아지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내지 못한 신하들은 나중에 태종이 이성계를 ‘태조’라고 올릴 때, “이건 또 왜 중국과 맞먹느냐”는 소리를 내지 못했다.
 
조선이 중국을 대한 외교관계는 그 당시 전후의 사정과 함께 따져보면 오늘날 잘 못 알려진 것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조선의 중국 외교가 왜곡된 것은 일제 강점기 35년의 영향이 크다.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침략에 대한 핑계로 조선이 전혀 독립국가가 아니었던 것처럼 동아시아 역사를 심하게 왜곡했다는 얘기다. 그런 것이 바로 식민사관이다.
 
2012년 현재에도 식민사관에 젖어 스스로 조선의 지혜로운 외교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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