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옹정황제가 대장군 연갱요 제거에 직접나선 까닭은?

옛날 관리들은 임금이 왕도에서 벗어났을 때 목숨을 걸고 간하는 선비 정신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 그런데 문제는 목숨을 건 충간(忠諫)이 마치 벌의 침과 같다는 것이다. 벌은 침을 한번 쏘고 나면 목숨을 잃는다.

정말로 청사에 길이 빛날 충신으로 이름을 남길지도 불확실하지만, 일단 그날이 자신의 제삿날이 되면 임금이 다음에 더 큰 잘못을 해도 이를 막을 길이 없어지는 것이다. 나라를 전례없이 번창하게 만든 성군인데 사냥 좀 나갔다고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임금부터 잘못된 일에 대해 잘못됐다는 판단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면, 신하들 입장에서는 무척 일하기 편해진다. 목숨을 걸 위험도 없으니 앞다퉈 상소를 올리려는 욕구도 넘쳐난다. 태산처럼 쌓인 상소 속에서 임금이 자신의 상소문을 가장 먼저 집어들게 되면, 훌륭한 인재라는 깊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게 된다.
 
설령 이와같은 ‘로또 당첨’이 없더라도 임금과 같은 편에 서 있었다는 근거 기록을 남겨서 뒤탈을 막아준다.
 
바로 이와같은 관리들의 속성이 복지부동 현상을 유발했다. 먼저 임금의 마음, 즉 성심(聖心)을 파악하고 나서야 움직이려는 관료사회의 폐습이 깊게 뿌리를 내려버렸다.
 
그래서 군주의 입장에서 효율적 통치를 하려거든, 적당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신하들에게 알려서 여론 조성을 하는 통치기술이 중요해졌다.
 
▲ 청나라 세종 옹정황제.
청나라 옹정황제가 대장군 연갱요를 제거한 과정에서 이런 통치기술이 활용됐다. 연갱요는 옹정 초기 서부 전선에 나가 몽고의 반란군을 토벌해 백성들에게 명장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하지만 그는 야전장군이면서도 내치에 간섭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 정계에 원성이 가득했다. 황제 입장에서도 10만의 대군을 거느린 장수가 이렇게 거침없는 성격까지 갖고 있으니 보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보였다. 마침내 황제는 연갱요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연갱요 탄핵의 분위기를 선도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나서봤자 황제는 당연히 공신인 연갱요 편을 들 것으로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비난 여론이 없는데도 황제가 그를 처벌한다면 ‘공이 높은 신하를 시기하는 용렬한 군주’로 민심의 지탄과 저항을 초래할 일이었다.
 
그래서 옹정은 관보(官報)를 통해 자신의 본심을 관료 사회에 전달했다. 처음에 그는 연갱요 친형의 부정행위에 대해 간단히 언급을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어 일부 진짜 강직한 신하가 연갱요를 비난한데 대해 세간의 예상보다 훨씬 부드러운 처벌을 내리고 약간의 측은한 심정을 담은 주비(硃批. 상소에 대해 붉은 글씨로 내린 임금의 답변)를 공개했다.
 
이런 식으로 점차 연갱요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더욱 더 짙게 관보에 담아 전국의 관리들에게 배포했다.
 
연갱요에게 내린 “경이 상소문을 올려보낸 그 장소는 모반에 대한 나쁜 전설이 떠도는 곳 아닌가. 하필 그곳에서 상소문을 쓴 저의가 매우 의심스럽다”는 주비가 관보를 타자, 이제 임금의 본심은 명백해졌다. 관료 사회에 연갱요 탄핵의 물꼬가 터지고 말았다.
 
정서대장군 연갱요는 항주장군으로 좌천됐다가 숨돌릴 틈도 없이 18계급 강등으로 ‘병(兵)’이란 글자가 쓰인 조끼를 입는 병졸이 됐다. 이 조차도 오래가지 않고 그는 곧 자살을 명받았다.
 
옹정황제는 청나라의 세종(世宗)이다. 세종이란 묘호에서 엿보이듯, 그는 내치에 심혈을 기울여 완벽에 가까운 행정 시스템을 실천한 임금이다.
 
옹정황제의 또하나 특징은, 장수한 아버지와 아들 틈에서 비교적 단명한 황제라는 점이다.
 
아버지는 성조 강희황제, 아들이 고종 건륭황제다. 강희와 건륭은 모두 통치기간만 60년에 달한 장수 임금들이다.
 
이들과 달리 옹정의 치세는 13년에 그쳤고 57세에 죽었다. 하지만 내치의 훌륭함은 옹정이 강희와 건륭을 뛰어넘는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강희제의 아들 24황자들의 각축전 끝에 옹정이 황제가 된 나이는 44세였다. 이미 풍부한 경험으로 국정을 꿰뚫고 있던 옹정은 대외적인 순방 행사를 극소화하고 오로지 전국에서 올라오는 각종 보고서를 읽고 세밀하게 답변을 보내는 일에 몰두했다. 이 때문에 그는 하루 4시간 이상을 자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성심의 소재를 확인해야만 움직이는 관료 사회의 속성을 낱낱이 알고 있는 옹정으로서는 이와같은 만기친람(萬機親覽)을 하루라도 멈출 수 없었다. 황제의 에너지로 돌아가는 국정에서 한 순간의 휴식은 불순물이 끼어들어 시스템 균열의 원인을 남긴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관리들은 관보와 노란색 밀주함을 통한 황제와의 대화에서 끊임없이 어느 쪽이 황제의 편인지를 알려주는 지침을 받았다. 이를 토대로 관리들은 정무에 나섰던 것이다.
 
국가의 기본 목표가 있는데 굳이 임금의 개별적인 지침이 있어야만 관료사회가 돌아갈 경우, 그 모든 부하가 끝내는 임금에게 집중되고 만다는 것을 옹정황제의 13년 치세가 보여준다. 과로로 환갑도 되기 전에 옹정이 죽음을 맞이하자 민간에서는 암살설이 퍼졌고 이를 토대로 많은 소설과 드라마가 등장했다.
 
옹정이 죽고 24세의 활달한 청년 건륭이 뒤를 이었다. 조부 강희제의 호방한 성격은 닮았지만 부친 옹정의 치밀한 국정장악력을 이어받지 못한 건륭의 60년 치세는 외형적으로는 청나라의 전성기지만 내면적으로는 제국의 균열이 시작된 시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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