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대학 시험에 합격하고 나니 마음이 설렜다. 무엇보다 시골 촌놈 눈엔 학교 건물부터가 근사했다.그러나 설레임도 잠시 교복 집에 들렀을 때부터 없는 자의 설움이 시작됐다. 내가 당시 후크달린 모택동 교복(당시 고려대 교복을 일컫는 말)을 맞추기 위해 처음 들른 곳은 광교 인근 ‘한성양복점’이었다. 그런데 양복점 주인의 말이 기가 찼다. “학생
[이용근 회고록6] 시력 때문에 육사 낙방으로 좌절의 늪에... 1959년 광주고를 졸업하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육군사관학교에 원서를 냈다.시험은 문제가 없었다. 수학은 원래 자신 있었고 고교 시절 내내 영어공부에 매달렸기 때문에 외국어시험 또한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뿔사 시력이 문제였다. 신체검사에서 시력이 0.3으로 밝혀진 것이다. 군의관은
광주고 선배의 짖궂은 영어훈육이 훗날 인생의 보약이 될 줄이야[이용근 회고록 5] 훗날 뉴욕, ADB 근무의 밑거름 된 선배들 구박 광주고에 입학해서는 전반적인 학교 공부보다 주로 독서나 영어공부에 매달려야 했다. 영어 못하면 배겨날 수 없었던 게 당시 광주고의 학풍이었기 때문이다.내가 이렇게 된 데는 당시 하숙집 파트너들의 영향이 컸다. 특히 2년 위인
국방장관 되란 아버지 꿈, 금융장관으로 화답하다.[이용근 회고록 4] 고교 동기회에 장관이 다섯명 내가 그 중요한 금융감독위원장 자리에 오르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공직생활 30년 만에 공무원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은 꿈꿔봤을 듯한 장관급 직위에까지 올랐으니 내 스스로가 대견스럽기도 했다.큰 자리에 오르고 나니 문득 어릴 적 아버지께서
[이용근 회고록 3] 실은 장관급 자리 마다하고 재경부 차관 가고 싶었다 관운이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였지만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금융감독위원회는 내게 또 다른 기회를 제공했다.금감위에서 내가 할 일은 아주 많았고 보람도 매우 컸다. 내게 주어진 금감위 첫 직책은 1급에 해당하는 상임위원자리였다
[이용근 회고록2] 희망의 귀국길 마저 좌천길로, 그러나 또다른 반전이 날 기다릴 줄이야 1995년 여름무렵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ADB가 있는 필리핀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ADB 이사직은 그런대로 수행할 만 했다. 영어를 구사하는데 문제가 없었을 뿐 더러 ADB 사토 총재와도 호흡이 아주 잘 맞았다. 사토 총재와 가까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전임 이
[이용근 회고록 1] 재경원과 기약없는 이별, 눈물 머금고 필리핀길에 오르다 1995년 늦은 봄으로 기억된다. 재정경제원 국세심판소 심판관으로 근무할 무렵 갑자기 차관이 날 찾았다.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해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통폐합돼 재정경제원으로 새 출범 한 뒤 초대 재경원 차관이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두 거대 부처를
초이스경제가 이용근 전 금융감독위원장의 30년 공직생활을 조명하기 위한 시리즈를 시작한다. 특히 이 전 위원장은 옛 경제기획원과 재무부에서 잔뼈가 굵었고 1997년말 외환위기 당시에는 금융감독위원회와 통합금융감독원 설립을 주도하면서 한국 경제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특히 그는 재무부 근무시절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파란만장한 공직 생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