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뒤주'에 사도세자를 가둔 냉혈의 정치 판단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일은 한국의 왕조사 최대의 참사지만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임금의 권력이 지닌 속성은 참으로 살벌해서, 때로는 부모자식의 천륜을 내팽개치게 만드는 일이 발생한다. 권력의 주변인들이 달라붙어 아비와 자식의 정리마저 온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임금이 예사롭지 않게 장수하는 경우에 아버지 임금과 아들 세자간 영역 다툼이 발생한다. 세자 또한 어느 정도 국정을 담당할 세력을 갖춘 세월이 오래되다 보면 측근들의 인내심 고갈이 드러나기 쉬워진다. 이 때가 세자당에 합류하지 못한 늙은 왕의 측근들에게 마지막 도박의 기회다. 어차피 세자의 세상에 살아날 길 없다면 지금 목숨 걸고 세자를 없애버리는 편이 낫다는 것. 폐세자로도 부족하다. 늙은 왕이 언제 아비의 마음을 회복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세자가 죽어야 깨끗이 후환을 터는 것이다.

한나라 무제가 오래 총애하던 위황후의 아들 여태자를 궁지에 몰아 죽이고는 곧 후회해서 모함한 자들을 숙청한 것도 이런 경우다.

사도세자는 부인 혜경궁 홍씨가 말하듯, 죽을 때 대리저군 14년의 경험을 갖춘, 세자 치고도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었다. 27년 생애 가운데 세자로 26년이지만 그중에서도 14년은 임금을 대신해 정사를 맡았다. 그의 동궁(東宮)은 작은 조정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런 세자가 무수한 병장기를 감춰뒀다면 아무리 부왕이라도 영조가 세자를 매우 불안하게 여긴 자체는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거기다 세자가 어릴 적부터, 영조에게 이상한 심리가 있어서 낮에 흉한 일을 처리하면 침소에 들기 전 세자궁에 들러 액을 털고 갔다고 하니 주변 상황과 영조의 취약한 심성이 끝내 영조38년(1762년) 윤5월 13일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왜 하필 뒤주인가.

반역을 꾀했다면 아들이라도 참형이나 사약처분을 했을 것이고 아비의 상정이 남았다면 유배를 보내 비참한 수명을 다하도록 배려했을 터인데 뒤주라니. 이 또한 영조의 광기로 보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영조는 한국사에서 손가락에 꼽을만한 명군이기도 하다. 이성을 잃은 아비로 아들을 죽였지만 정치적 맥락에서의 뒤처리는 한 치 빈틈없는 치밀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뒤주 또한 이런 차원에서 동원된 물건으로 보인다.

예전 역사에 무척 밝은 조선 임금들이다. 아들을 죽일 당시 영조의 뇌리에 가장 크게 떠올랐을 사건이라면 당연 연산군 생모 폐비 윤씨 처형일 것이다. 어린 연산은 생모가 죽는 것도 모르고 장성했지만 훗날 모든 것을 알고 엄청난 피의 보복(갑자사화)을 벌였다. 생모를 모함한 자들뿐만 아니라 고관대작으로 적극 반론하지 않은 자들, 심지어 약사발을 들고 간 이세좌까지 모두 죽였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던 날, 세손(정조)은 “아비를 살려주소서”라며 현장에 뛰어들기까지 했다. 모르고 자란 연산군이 저 정도인데 생생히 지켜본 세손이 자라면 어찌될 것인가. 세자 스스로 뒤주에 들어가야 이날의 연루자를 최소화할 수 있던 것이다. 시위한 무관들이 강제로 넣었을 수는 있지만 이런 신분의 사람들은 왕실 보복극과는 무관한 법이다. 연산군의 갑자사화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한풀이보다 훈신들과의 갈등이란 성격이 더 강한 것으로 풀이된다. 왕실비극에는 거기에도 정치적 맥락이 얽혀있는 것이다.

▲ 영조대왕 어진.

영조는 사도세자와의 갈등이 깊어지던 영조35년에 세손을 책봉했다. 이때 이미 아들을 버리더라도 손자는 절대 못 버린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아들을 굶겨 죽이는 와중에도 영조는 철저하게 이 일을 손자와는 무관하게 만들어야 했다.

세자의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갑자기 뉘우치는 사람처럼 사도세자의 시호를 내리고 복권시킨 일도 세손을 위한 의도가 가장 크다고 봐야할 것이다. 세손을 폐세자의 자식으로 내버려두면 불쌍하게 살다간 ‘황형’의 처지가 될 터이다. 희빈 장씨의 소생으로 영조의 이복형이자 먼저 임금인 경종을 영조는 황형이라 불렀다.

영조는 세손에게 “아비를 이 이상도 이 이하도 높이지 말라”는 명도 내렸다. 더욱 높이는 것은 “할애비를 저버리는 것이며 사도를 위한 것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정조는 등극 후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만 고쳤을 뿐이다.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된 건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 후다.

사람이 태어나 부모에게 버림받는 것이 가장 비참하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마지막 순간이 이에 해당할지 모른다. 뒤주에 가둔 것은 부왕 영조다. 영조에게 세자를 버리라는 마지막 결단을 촉구한 이는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다.

생애 마지막 순간 세자는 부모 모두에게 버림받았다. 영조와 영빈 두 사람이 냉혈인간이었다기보다는, 두 사람이 그런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여러 음모론이 난무하긴 하지만, 타당한 수준에서 받아들인다면 사도세자는 주류사회와의 친화가 몹시 어려운 사람으로 보였다. 그것이 세자의 병통 때문인지, 아니면 기득권층을 불안하게 만드는 반골기질 때문인지를 불문하고 일단 세자 치세는 절대로 편하게 보이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조에게 묵과하기 힘든 일이다. 주류 계층과 화목하지 못해 영조의 자손이 폐출된다면 자신이 등극의 명분으로 내세운 삼종(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 보존마저 무너지는 일이 된다. 영조와 영빈이 선택한 건 아들이 아니라 혈맥의 보존이었던 것이다.

야사에서 전하는 홍국영의 강목 파동도 영조의 정치적 기획이란 느낌이 난다. 야사가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몰라도 그만한 배경의 상황이 있었던 건 분명하다.

영조가 세손에게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묻자 세손이 영조가 싫어하는 강목이라고 대답한 일이다. 그 책에는 한나라 문제가 어머니 신분이 낮은 것을 한탄한 독백이 들어있다.

영조는 자신을 흉보는 듯한 구절을 세손이 본다니 불같이 화를 내고 강목을 가져오게 했는데 문제의 페이지는 아교로 붙여져 볼 수 없게 돼 있었다. 세손의 측근 홍국영이 위급한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했다는 것이다.

이를 본 영조는 노여움은 사라지고 급히 파안대소하면서 “앞으로 이 일로 세손을 모함하는 자는 절대 용서 안한다”고 또 한 번 엄포를 놓았다. 한바탕 소동에 결론은 이제 세손 건드리면 진짜 큰일 난다는 것으로 종결됐다.

재위 50여년에 별별 일을 다 겪었을 임금이 이런 사소한 일에 감정의 급변이 쳤을까, 아니면 군상들의 심리는 이제 맑은 물속처럼 들여다보는 80 노인이 뭇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 것일까. 후자라면 당연히 오로지 세손만을 위한 또 한 차례 조정의 기강 확립을 한 셈이다.

 

영조의 생모는 막일하던 무수리가 아니라 바느질하던 침방나인이었음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임금이 된 영조와 생모의 대화다.

“침방에 계실 때 무슨 일이 가장 하시기 어렵더이까.”

“중누비, 오목누비, 납작누비 다 어렵지만 세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었더니이다.”

영조는 그 자리에서 방한용 누비토시를 벗어버리고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한다.
                                                   - 김용숙, 조선조 궁중풍속연구 -

 

정치적으로 영조는 세손을 버릴 생각은 꿈에도 꾸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조는 세손과 주변 인물들에게 그런 본심을 절대 내비치지 않고 항상 긴장 속에 훗날을 대비하도록 단련시켰다. 아들을 잃은 마당에 손자마저 무너지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절실함일 것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생사를 넘나드는 긴장을 놓지 못했다. 한중록에 있는 대표적인 일화다.

영조가 어린 세손을 데려가 키우다가 어느 날 모처럼 세손의 생모요 사도세자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처소로 놀러왔다. 돌아갈 때가 되자 세손이 어미와 떨어질 생각에 울기 시작했다.

측은히 바라보던 영조가 “세손이 너를 떠나지 못해 저러니 두고 가자”고 말했다.

순간 혜경궁 홍씨는 ‘나는 저를 사랑하는데 저는 오직 어미만 생각하나’라는 노인의 노여움이 발동할까를 염려했다.

그래서 내놓은 대답이 “위(上. 임금인 영조)에 있으면 어미가 그립삽고 어미와 있으면 위가 그리워 저리할 터이니 데려가소서.”

영조가 즉시 “그러하랴”하면서 화안색(和顔色)했다고 한다. 노인의 내면 묘사가 가장 뛰어난 한중록 구절이다. 이 때 어린 정조가 울면서 대궐로 떠나간 모습을 혜경궁 홍씨는 두고두고 잊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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