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산 10회 우승 남기고 18일 올스타전에서 은퇴한 '명장' 김응용 감독

[초이스경제 장경순의 만필세상] 1986년 프로야구 개막 직후. 2년의 부진에서 ‘부활’을 꿈꾸는 해태타이거즈와 이제 막 리빌딩을 마친 MBC청룡이 잠실에서 격돌했다.

1대1. 경기 중반 해태 공격 무사1루에서 7번 타순이 왔다. MBC 내야수가 번트를 예상하고 전진했다. 7번 타자의 방망이는 “너희가 오든지 말든지” 무시하는 듯 그대로 돌아가 쿠바 선수들 홈런 못 치게 설계된 잠실의 멀고 먼 왼쪽 담장을 넘겼다.

‘코끼리’ 김응용 야구의 전형적인 모습이 담긴 장면이다.

그 7번 타자는 시즌 전, 고향 팀으로 보내달라며 해태로 안가겠다고 버텼었다. 은퇴도 불사하겠다던 그는 “1년 후 보내주겠다”는 약속에 겨우 마음을 돌려 해태로 왔다. 한대화였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에서 일본에 역전 3점 홈런을 날리고 다음해 프로야구에 오자마자 개막전에서 또 3점홈런을 날려 ‘스리런의 사나이’가 된 한대화다. 그러나 그는 원 소속팀 OB에서 3년 동안 홈런 8개만 쳤다. 해태에 온 첫해 14개 홈런에 0.298의 타격을 기록했다.

김응용의 두려움을 모르는 야구가 한대화에게는 딱 맞는 야구 색깔이었다. 1년이 지나 고향팀 빙그레로 갈 때가 됐다. 한대화는 “해태가 정이 들면 남을 수도 있다는 거였지 꼭 간다는 건 아니었다”며 눌러앉아 이후 7년 동안 114개의 홈런을 더 쳤다. 연간 경기수가 108 개 안팎이던 매년 15~20개 홈런이란 4번 타자 중에도 찾기 힘든 기록이다. (이 때문에 한대화는 한 때 빙그레 팬들의 ‘배신자’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한화 이글스의 ‘야왕’ 감독으로 애증을 사기 전 얘기다.)
 

▲ 1986년 통산 두번째 우승한 해태타이거즈의 선수들이 김응용 감독을 헹가래치고 있다. 해태 4연속 우승의 시작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 선수들이 들어올린 김응용 감독의 모습이 오늘날보다 상당히 홀가분해 보인다. /사진=기아타이거즈 홈페이지.

 

프로야구가 출범한 지 두 번째 시즌을 맞기 직전인 1983년 3월이다. 김응용 감독은 해태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해 데뷔전을 치르기 전이다. 그의 인터뷰는 모든 야구팬을 깔깔 웃게 만들었다.

“우승해야죠. 야구에서 우승 말고 순위가 있나요?”

우승을 기대하는 그의 팀 해태는 전년인 1982년 4위였다. 지금 같은 10팀 중 4위가 아니라 6팀 중 4위다. 3강 OB 삼성 MBC와 하위 세 팀 해태 롯데 삼미 사이 엄청난 격차가 나 있었다. 신임 김 감독이 뭘 믿고 저런 말을 하는지, 해태를 좋아하는 친구들도 폭소를 터뜨렸다.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고교야구 전설 ‘역전의 명수’인 군산상고 팬들이 그대로 해태로 옮겨가 있어서 ‘전국구 구단’ 해태의 초석을 다졌다.

이 때 해태의 전망은 전년보다도 더 암울했다. 왜냐하면 ‘한대화 역전 스리런’으로 세계야구선수권 우승을 한 국가대표들이 대거 프로에 진출하는데 해태는 놀랍게도 이들 중 한 명도 영입을 못했다. 장효조 김시진 이해창 김재박 같은 초일류 선수들이 이 대회 때문에 프로야구 원년 출범에 동참을 못하고 묶여 있었는데 이제 이들이 여기서 풀려난 것이다.

해태는 이들 국가대표를 한 명 앞당겨 쓴 면은 있었다. 국가대표 선발이 유력했던 도루왕 김일권이 국가대표보다 프로야구 원년 동참을 선언했던 것이다. 출범 때 해태 선수단 인원이 15명에 불과해 김일권이 동참 안했더라면 해태는 삼미와 최하위다툼을 했을지도 모른다.

해태보다 하위였던 5위 롯데는 최동원 유두열 우경하 박영태 심재원이 가세했다. 최하위 삼미도 강타자 포수 김진우에다 내야수 이선웅 정구선, 거기다 투수 임호균이 동참했다.

그렇다고 상위 팀들 보강이 부진하지도 않았다. 준우승팀 삼성에는 김시진 장효조, 3위팀 MBC는 이해창 김재박 등 레전드들이 가세해 이미 빈틈없던 라인업을 어떻게 짜야할지 조차 고민을 하고 있었다. MBC에 합류한 국가대표에는 투수 오영일 외야수 김정수도 포함됐다.

OB의 보강이 언급한 4팀에 비해 부진한 편이지만, 그래도 이 팀은 전년 우승팀이다. ‘22연승-24승’ 박철순이 있는데다, 한대화가 신인으로 베테랑 유지훤을 밀어내고 OB 유격수 자리를 차지했다. 빠른 발과 정확한 타격감의 신인 중견수 박종훈도 함께 가세했다. 변화구의 달인 장호연도 이들에 비하면 조용한 편으로 데뷔해 개막전 완봉승을 했다.

초창기라 당연한 면도 있지만, 특히 국가대표들로 인해 1983년은 최동원 김시진 장효조 이해창 김재박 등 역대 최강의 신인들이 등장한 시기다. 아예 이들을 신인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신인왕은 OB의 박종훈이 차지했다. 해태는 이런 선수들을 단 한명도 못 받았던 거다.

▲ 김응용 감독 부임 첫해 해태에 합류한 재일교포 투수 주동식. 안경을 낀 모습이 박찬호 야구를 중계하던 정도영 캐스터와 비슷하다. 또 다른 재일교포 투수 장명부의 30승과 같은 대기록은 남기지 못했지만 그는 유독 MBC청룡에 강했다. MBC가 바로 해태의 그 해 한국시리즈 상대였다. 주동식은 시리즈에서 2승을 올렸다. /사진=기아타이거즈 홈페이지.

우승을 하겠다는 김응용 감독의 전력보강은 재일교포를 통해 이뤄졌다. 지금 외국인 선수들 영입하듯 당시는 해외 교포가 팀당 두 명씩 허용됐다. 해태는 기교파 투수 주동식과 포수 김무종을 영입했다. 그러나 이마저 삼미의 장명부 이영구보다 명성이 못 미치는 듯 했다. 또한 MBC는 시즌 개막직전, 멕시칸리그 150승의 이원국을 영입해 해외영입도 해태가 내세울 것이 없었다.

내세울 것 없는 엔트리로 개막을 맞이한 김응용의 해태는 첫 상대로 전년도 준우승팀이며 강력한 우승 후보인 삼성을 만났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년 15승 트리오 황규봉 이선희 권영호를 보유한 삼성 투수들에게 해태 타선이 제법 공략을 잘 해나갔다. 반면 기대를 모았던 주동식이 자꾸 실점을 하며 우위를 지키지 못했다. 5대5로 연장에 들어갔다가 비가 내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번째 정규시즌 무승부 경기가 됐다.

5~6위 전력으로 평가된 해태가 우승후보 삼성을 잡을 절호의 기회였는데 우세를 지키지 못했다. ‘코끼리’ 김응용 감독의 첫 번째 프로야구 경기였다.

다시 삼성을 압도하기 어렵겠다는 예상이 많았는데, 의외로 이틀 후 2차전에서 해태가 삼성을 아주 쉽게 이겨버렸다. 김응용의 통산 제1승이었다.

개막을 하자, 뜻밖에도 5-6위권이라던 해태와 삼미가 선두 다툼을 벌였다. 삼성은 15승 트리오의 구위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 김시진이 군복무를 마치고 가세하는 5월 이후를 기대해야 하니 삼성이 전기리그 기대를 접어야 할 상황이 됐다. MBC는 4할타자 백인천이 극도의 부진을 보이다가 감독에서 조차 해임되고 말았다. 거기다 홈구장을 서울운동장에서 잠실로 옮긴 탓인지, 전년의 강점이던 공격력이 실종됐다. 투수들은 눈에 띄게 기록이 향상됐지만 에이스 하기룡은 전기 내내 부진했다. OB는 박철순의 허리부상, 롯데는 최동원의 부진과 전년 에이스 노상수의 부진이 겹쳤다.

삼미의 분발은 당연 그해 ‘30승 투수’ 장명부의 몫이 절반 이상이다. 김진우 정구선 등 국대 타선도 두 자릿수 홈런을 쳤고 국대 투수 임호균도 장명부의 혹사 와중에 한숨 돌릴 틈을 줬는데 뜻밖에 김상기의 호투라는 기대 밖 소득도 있었다. 모두 15승 65패 ‘인호봉-감사용 시대’에는 없던 새 멤버들이다.

해태는 이와 달리, 원년 멤버들이 새 감독을 맞아 말 그대로 ‘환골탈태’했다. 김일권-김성한-김봉연-김종모 라인은 김준환의 다소 부진을 제외하고 그대로 건재했지만, ‘트레이드 신화’의 1호 서정환의 활약이 특히 돋보였다. 삼성에서 오대석에게 밀려 그는 해태로 왔다.

또한, 뭔가 잘 할 거 같은데 힘을 안 쓰는 듯한 ‘2루의 예술사’ 차영화마저 승부의 고비마다 특유의 우중간으로 툭툭 밀어대는 적시타를 제공했다. (차영화는 상대 투수의 직선타를 놀라운 호수비로 잡아낸 후 살살 웃으며 느릿느릿하게 1루 베이스를 밟아 병살처리하다 3루 주자 홈인을 허용해서 경기 중 김 감독의 호통을 듣기도 했다. 그가 은퇴한 후에도 야구장의 해태 팬들은 2루수가 실수하면 “차영화 나와”라며 그를 그리워했다.)

모두 기존 멤버들이 김응용 체제에서 변신한 모습이다. 김응용 감독이 영입 멤버의 덕을 본 것이 있다면 포수 김무종이다. 1980년대 한국 야구에서 그는 소리 소문 안 나는 최고의 포수로 자리를 지켰다.

더욱 놀라운 건 투수들의 변신이다. 이상윤과 김용남.

김용남은 원래 김시진 최동원과 함께 ‘58년 개띠 트리오’로 이름을 함께 했었다. 첫 해 팀이 부진한 와중에도 9승12패 175이닝 3.09로 제 몫을 하다 팀 전력이 안정된 다음해 13승10패 2.83의 에이스 급 피칭을 지속했다. 하지만 그는 두 번째 에이스로 다소 밀렸다. 이상윤의 ‘부활’이 너무나 대단해서다.

이상윤은 7승5패 3.88의 첫해 성적으로 ‘고교 스타와 프로야구는 별개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었다. 그러나 1년 만에 그는 20승10패 2.67의 절대 에이스로 변신했다. 20승 가운데 15승을 해태가 우승한 전기리그에 올렸다.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얻고 후기를 비교적 여유 있게 등판한 결과다.

전후기 내내 우승 경쟁을 펼친 삼미의 장명부가 30승을 올렸으니 애초에 다승 경쟁을 포기한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상윤은 특히 그해 해태의 한국시리즈 상대 MBC에 강한 모습을 보였다. 머리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변화구에 MBC 타자들의 방망이는 시즌 내내 헛돌았다.

혹자는 김응용 감독이 소위 ‘선수빨’로 10번 우승한 것 아니냐고 꼬집는다. 야구를 경기는 안보고 기록지만 보고 하는 소리다. 그 ‘선수 빨’을 만든 사람 자체가 김응용 감독이다.

‘선동열 같은 걸출한 투수가 있어서’라고 하지만 선동열을 그렇게 걸출하게 오랜 세월 ‘0점대 피칭’을 하도록 관리해 준 사람이 누굴까. 한국 야구에 에이스는 수도 없이 많았다.

에이스라면 전날 완투, 다음날 구원 등판을 당연시하던 풍토에서 김 감독은 시대를 앞선 사람이 분명하다. 그는 한국시리즈 1승1패로 맞이한 3차전, 스코어 1대1인 6회에도 선발 선동열을 과감하게 내렸다. 삼성을 4승 1패로 물리친 그 시리즈에서 3승을 올린 해태 에이스는 선동열이 아닌 김정수였다. 중요한 승부처라도 아무리 에이스라도 내릴 투수는 과감히 교체한 결과의 하나다.
 

▲ 김응용 왕국의 1차 전성기 1988년 'V4'. 갑자기 막강해진 빙그레가 전통의 강호들을 모두 제압하고 해태의 상대로 한국시리즈에 올라왔다. 해태 앞에서는 3연패로 힘없이 물러서나 했지만 2연승으로 매섭게 반격해 왔다. 6차전 완투승으로 시리즈를 마무리한 건 선동열이 아니라 문희수였다. 에이스가 무너졌다고 해서 팀 전체가 와해되는 허약함이란 김응용 팀에 파고들지 못했다. 대체로 나오는 선수는 바로 맹수의 본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 선동열이 김성래에게 불의의 투런 홈런을 맞았어도 좌완 김정수가 연장까지 이어던지며 4대3 역전승을 이끌었다. /사진=기아타이거즈 홈페이지.

 

선동열의 경력 중에는 169이닝만 던지고도 21승을 거둔 시즌이 있다. 풀타임 선발을 한 6년 동안 200이닝 넘긴 적은 두 번 뿐이다. 김 감독의 선동열 기용방식은 ‘에이스니까 일단 내고보자’가 아니었다. 상대가 가장 두려움에 빠질 시기를 정확히 포착해 마운드로 올려 보냈다.

선수단 관리의 선진화 면에서는 LG트윈스의 이광환 감독 이전에 먼저 한 획을 그은 사람이 김응용 감독이다. 박철순 최동원과 같은 ‘전설의 투수’들이 김 감독의 팀에 있었다면... 상상을 금하기 힘든 대목이다.

그러나 팬들이 김응용 감독을 가장 크게 기억하는 것은 ‘두려움을 모르는 야구’, 그리고 개성이 가득한 야구다. 헬멧이 벗겨지는 김봉연의 헛스윙 장면은 야구장에 잠시 판소리 익살을 보는 재미를 가져왔다.

3루 쪽 관중석에 노란색 조끼를 입은 응원단장이 ‘아리랑 목동’을 이끌어내는 해태의 응원문화는 절대 천박한 확성기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아리따운 치어리더들도 이 문화와 조화를 하기는 어려웠을 듯 하다. 김응용의 야구에 해태 문화는 이렇게 조화를 이뤘다.
 

▲ 18일 올스타전에서 1이닝 임시 감독을 맡은 김응용 감독이 비디오판독을 요청한다며 익살을 부리자 관중석에서 우뢰와 같은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팬들은 이제 다시 보기 힘든 그의 어필 장면도 그리워하게 됐다. /사진=다음 MBC 스포츠 화면캡쳐.

 

2015년 7월 18일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사상 최초로 감독에 대한 은퇴식이 열렸다. 주인공은 김응용 감독이다. 현역 10명의 감독들이 앞장 서 마련한 것이다. 선수들과 팬들도 열렬히 호응했다. 김응용 감독은 이 날 한 회 동안 감독을 맡아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는 시늉으로 현역시절 미처 보여주지 못한 익살도 선사했다.

해태 팬이 아니고서야 야구팬이면 누구나 김응용 감독에게 무수히 지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가 이끄는 팀을 한 번도 응원한 적 없지만, 4점차를 투런 홈런 두 개로 따라잡는 그런 야구를 그리워하지 않을 팬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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