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 포커용 칩. 기사 내용과 무관함. /사진=뉴시스.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12] 장밋빛의 마지막 한 해 1995년을 그해 연말 카지노로 돌변한 은행의 모습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딱히 이유는 없지만 무언가 얼굴에 자신감이 넘쳐나던 은행사람들이다. 그런 표정이 해가 바뀌면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결과를 가지고 돌이켜보는 기억이 가져오는 편집효과일지도 모르겠다.

한국 경제는 지금도 1995년 12월30일의 모습을 회복 못한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원화환율이다. 그해 서울외환시장은 1달러당 775.70원으로 마감됐다. 경제 위상은 11대 경제대국이었다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13위 정도로 하락했다가 현재는 다시 국내총생산(GDP) 순위 11위다.

1995년 12월은 삼성 현대 LG 대우 4대 재벌이 재계를 이끌고 이른바 ‘조상제한서’라는 전통 시중은행들이 금융계에서 위풍당당하던 시절의 사실상 마지막이다. 이 체제는 물론 1996년 말에도 유지되고 있었지만 그때 되면 기세등등하던 표정은 이들의 얼굴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어떻든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처음 달성한 1995년 마지막 날의 은행 모습은 그에 걸맞은 축제 분위기 속에 깊은 밤에 들어가고 있었다. 국민소득과 같은 국민계정은 기준년 변경에 따라 숫자가 변하기 때문에 현재 한국은행 기록에는 1994년이 처음 1만 달러를 달성한 시기로 나타난다는 점을 덧붙인다.

12월30일은 은행 결산일이었다. 12월의 마지막 영업일이고 연간으로도 그해 마지막 영업일이다. 들어오고 나간 돈이 맞아떨어지는지, 안 맞으면 그걸 찾아서 다 맞춰놔야 되는 날이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실감이 안 나겠고, 중장년층 이상은 기억에 새로울 만한 것이 이 때까지도 1월1일 신년연휴가 이틀이었다. 민주화 이후 설날의 비중이 ‘신정(양력 1월1일)’에서 ‘구정(음력 1월1일)’으로 옮겨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처음 구경하는 결산이었다. 연말 결산이 어떤 것인지 살짝 미리 가늠하는 일이 있기는 했다.

12월1일 출근을 했더니 사무실에 복사용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까닭을 물어보니 전날 밤 결제부서가 가결산을 하느라 복사용지를 다 썼다는 것이다. 12월의 연말결산이 너무 작업이 커서 11월에 미리 결산을 해둔다는 것이다. 결산이 은행에서 그렇게 방대한 작업인지를 그 때 처음 깨달았다.

그리고 12월30일 결산 날이 왔다.

그 당시 외화자금실에는 미혼 남자행원들이 많았다. 전부 내 또래 1965년생 들이었다. 퇴근 후에 어디 맥주 한 잔 할 데 없나 찾아 헤매기 일쑤인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퇴근해도 서둘러 집에 가야할 일이 없었다. 야간 딜러들이 저녁식사를 배달해 먹을 때 공기밥 하나를 추가해 저녁식사를 해결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기도 했다.

12월초부터 파생상품 딜러가 돼 있던 나도 조사반 이른 아침 출근 대신 순번제 야간 딜링 당번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의 이른 아침 요구르트보다 저녁 때 맵고 짠 야식 반찬에 입맛을 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30일 결산 날은 미혼자들뿐만 아니라 실장 이하 전원이 집에 가지 않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결산 대기라고 했다. 혹시 결산에 맞지 않는 점이 있으면 해당부서에서 확인해서 맞춰야하기 때문에 전원대기라고 했다.

여기에 ‘인정’이 덧붙여졌다. 결산부서만 명절 전에 야근을 하는데 어떻게 이들만 놔두고 집에 가느냐, 고생하는 심정을 나눠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별히 하는 일은 없지만, 무수한 사람들이 남아서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이렇게 해서 연말 결산날은 은행 건물 전체가 ‘카지노’가 됐다. 이것은 산업은행만의 얘기가 아니다. 당시 은행권의 풍속도가 이랬다.

이것에 대해서 나는 ‘기강’이니 뭐니 하는 기준을 들이대는 것에 반대한다. 이런 일이 맨날 벌어진 것도 아니고 12월 말일 결산 날에만 예외적으로 약간의 ‘연말 기분’이 허용됐던 것일 뿐이다.

2000년대 언젠가 다른 금융기관에서 이런 결산 날 관행대로 카드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것이 ‘은행 내 도박’이란 투로 보도가 됐다고 한다. 이 일로 연말 결산일의 카드 및 화투가 일체 근절됐다고 한다.

이게 그렇게 ‘도덕적 해이’라는 기준으로 대할 일이 아닌데 엉뚱한데 이 사회가 정색했다는 생각을 갖는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이것이 훈훈한 인정이니 다시 살리는 게 좋다는 얘기를 꺼낼 생각이 없다. 은행권 사람들 얘기로는, 인정 자체가 변했다는 것이다. 내 일 아닌데 연말에 덩달아 함께 남아줄 인정이 지금의 은행에는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포커 고스톱 블랙잭을 막론하고 이런 기박을 제대로 할 줄 모른다. 집들이에 초대돼서 가도 나 혼자 할 일이 없어 우두커니 있다가 TV만 보고 그 집 꼬마하고 놀다오기도 한다.

결산 날에는 이 곳 저 곳에서 벌어진 카드 판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게임 외로 주고받는 입담도 듣고 옆에 있는 과자도 집어먹었다.

어떤 호기로운 동료는 작은 회의실 문을 열자 아담한 포커판이 차려진 것을 보고 “여기가 황금어장이네”라며 끼어들었다. 40분 후 그는 인출해온 돈을 다 털리고 회의실을 떠났다.

12시에 가까워지면서 ‘결산 OK’ 통보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씩 외투를 차려입고 은행에서 받은 연말 기념품을 챙기면서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인사를 한 바퀴 돌고 집으로 갔다.

신한국 금융을 달성한 1995년의 마지막 날은 이렇게 저물면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원달러 데스크의 에이스 이성희 씨(현 JP모건체이스 서울 지점장)는 귀가하면서 이 무렵부터 새로 파트너가 된 곽준원 씨에게 한 가지 ‘팁’을 일러줬다.

“연초 되면 환율이 올라가니까 조심해야 돼요.”

내가 일없이 사무실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원달러 딜러들의 얘기를 지나면서 들은 것이다.

연말 밀어내기 수출이 끝나고 수입대금 수요가 생긴다는 통상의 얘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 한국 경제가 거쳐간 엄청난 파란을 생각해보면, 그의 한 마디가 엄청난 복선이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13회] 한국은행과 산업은행은 무엇이 달랐나?

[11회] 원-달러 딜러는 왜 한여름에도 양복 상의를 껴입었나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