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경제칼럼]

▲ 평양성 탈환도. /사진=국사편찬위원회.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29] 국난을 맞아 혼자 힘으로 극복이 안 되면 외국의 도움도 받는 것이다. 유비가 조조의 대규모 남정을 막아내지 못하게 되자 손권의 도움을 받아 적벽대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런데 1996년 서울 외환시장의 ‘유비’는 ‘손권’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 도쿄에서 엔화가 달러에 대해 강세를 보이는 동남풍을 불어줘야 원화도 함께 힘을 내 볼 텐데 당시의 세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미국은 3%이던 금리를 6%로 올리고 있었다. IT 혁명으로 투자만 하면 이익을 내는 호황을 맞았다.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의 연속적인 금리 인상은 인플레이션을 ‘선제적’으로 예방하고 생산성 낮은 기업들이 호황기에 편승해 장차의 우환이 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예전보다 두 배의 생산성을 낼 자신이 없으면 함부로 대출받아 사업하지 말라는 의미가 된다.

Fed의 금리인상은 전 세계 투자자금을 미국으로 불러 모으게 됐다. 지금까지 아시아와 같은 이머징마켓에 투자한 이유는 이자를 더 준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가장 안전한 미국에 투자할 때 이자가 두 배가 됐다. 위험을 감수하며 아시아 시장에 굳이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1996년 사상 최대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며 달러 공급이 바닥나는 일까지 겹쳤다.

당시 경제부총리의 기자회견장에서는 베테랑급 기자들과 재정경제원(지금의 기획재정부) 관리들이 “이거 정말 아무 문제없는 거냐”며 옥신각신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때 상황에서 환율의 급등은 수용하는 것이 지금에 이르러 결과론적으로 제시하는 해답이다. 재경원의 주장과 달리 한국은 그 때 펀드멘털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원화의 절하는 당연한 것이었다. 원화가 절하돼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수출부진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 방법을 거부했다.

여기에는 ‘국민소득 1만 달러 달성’의 정치적 이해가 걸렸던 때문으로 풀이된다. 1995년 사상 처음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었다며 자축했지만, 그 후 기준년도 변경에 따라 한국의 1만 달러 달성은 1994년으로 앞당겨진다.

어찌됐건 1996년만 해도 국민소득은 1만 달러를 살짝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 환율이 이렇게 급상승하는 원화가치 절하가 벌어지면 1만 달러가 맥없이 무너지게 된다. 더구나 그 때는 대통령선거를 1년 앞둔 시점이었다.

외환당국은 연일 외환시장에서 수 억 달러의 대규모 개입을 불사하며 환율 상승을 막았다. 그러다가 9월10일 820선을 내주는 상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여기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의 원군과 같은 외국의 도움이 동원됐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조선 임금 선조가 의주까지 도망갈 정도로 조선군은 지리멸렬했다. 이여송은 다음해 1월 4만3000명의 명나라군을 이끌고 일본군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그의 진격은 한동안 승승장구해 평양을 탈환하고 한양 근처까지 육박했다. 그러나 박석고개에서 일본군에게 일격을 맞은 후 평양에만 주둔하다 명나라로 돌아가고 말았다.

임진왜란의 전황을 바꾸지도 못하고 수세로 돌변한 점에서 마땅찮은 전과로 비판을 받는 동시에 임금이 의주까지 몰린 상황에서 평양을 탈환한 것은 한 숨 돌린 기여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1996년의 외환당국은 그해 10월1일을 ‘평양 탈환’의 계기로 만들려고 했다. 해외 원조세력을 대규모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외국인 주식자금 한도 확대였다. 1990년대 자본자유화 일정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이날 외국인 투자한도가 20%로 확대된 것은 환율 상황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됐다.

1988년 이후 몇 차례 확장기를 겪고 있던 한국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투자확대는 ‘필승의 카드’였다. 그때까지 사례에서 그랬다.

이번에도 과연 효과가 먹힐까. 투자자들은 이제 미국을 중심으로 IT에 투자해 ‘대박’을 내는 일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한국은 반도체 수출 부진으로 경상적자가 누적되고 있었다.

그래도 투자제한에 묶여 더 이상 살 수 없던 한국의 주식을 좀 더 살 수 있는 기회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10월1일 하루 동안 5000억 원의 외국인 주식자금이 한국에 들어왔다. 그날 나의 원달러일기는 수학에서 ‘단조 감소’하는(일방적으로 내려간다는 뜻) 그래프 위를 ‘500,000,000,000’이라는 숫자가 짓누르는 그래프를 넣었다.

전날 821.1원에서 826.0원으로 뛰어올라 또다시 불안기미를 보이던 환율이 1일 820.7원으로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마감됐다. 외국인 주식자금이 지배한 외환시장의 하루가 됐다.

그러나 승리를 자축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지울 수 없는 불안감이 여전히 건재했다. 

5000억 원은 많으면 많을 수도, 적으면 적을 수도 있는 규모다. 기대에 못 미친다는 지적은 바로 제기됐다. 당시 환율로 환산하면 6억 달러를 조금 넘는다. 외환당국이 ‘다탄두탄’급 대규모 시장개입을 일주일동안 할 수 있는 정도다.

‘이날 하루가 끝이 아니겠지’라는 희망으로 다음날을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외국인 주식자금의 효과는 거기까지였다.

바로 다음날인 2일, 821.0원으로 소폭의 상승세를 재개했다. 개천절 하루 쉬고 4일에는 824.6원으로 본격 상승랠리를 재개했다. 다음 주 월요일인 7일에는 827.6원으로 주식자금 한도 확대 이전 수준을 뛰어넘었다.

이여송만큼의 역할이라도 해주기를 기대했던 외국인 주식자금은 ‘평양성’에 해당하는 820원 탈환도 못하고 그대로 존재가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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