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에서 배우는 경영 통찰력(시리즈 25)...영화 '사랑과 영혼' 광고의 교훈

▲ 김병희 교수

 

[외부 기고=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한국PR학회 제15대 회장]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누구나 아는 속담이지만, 가는 말이 고와도 오는 말이 곱지 않을 때도 있다. 가는 말이 아무리 고와도 그 내용이 만족스럽지 않거나 듣는 이가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면 오는 말이 고울 수 없다. 일터나 가정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직장 상사가 고운 말로 출발했어도 받아들이는 쪽의 마음에 다른 뜻으로 도착하는 경우가 많다. 말뿐이겠는가.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핸드폰 문자를 보낼 때 조사 하나 잘못 써서 오해를 사는 경우도 있다. 화자와 청자 사이에 발생하는 오해와 오독의 간격은 외국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과 퍽 흡사하다.

외국어를 번역할 때 출발어와 도착어 문제를 늘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영어는 출발어(source text, 원천어)이고 우리말은 도착어(target text, 목표어)이다. 필자도 영어책 6권을 번역해봤지만, 원문에 충실해 일대일로 번역할 것인지 의역해 매끄러운 우리말로 바꿀 것인지 고민이 많았었다.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옳은 번역이란 없고 좋은 번역은 가능하다는 것.

소설의 첫 문장, “Call me Ishmael.” 허먼 멜빌의 <모비 딕(Moby Dick)>(1851)의 첫 줄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이가형은 “내 이름은 이스마엘이라 부른다.”로, 김석희는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로 번역했다. “나를 이슈메일이라 불러줘”라고 할 수도 있겠고, 구글 번역기에 돌리면 “이스마엘아 전화해줘”가 튀어나올 수도 있을 터. 이 1인칭 소설에서는 주인공인 선원이 자기 이름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김석희 선생은 이런 익명성의 맥락을 고려해 ‘~라고 해두자’라는 탁월한 번역을 해냈다. 영어라는 출발어에 충실하되 소설의 맥락에 한국어의 말맛을 고려해 적절한 우리말 도착어로 번역했던 셈. 출발어와 도착어의 타당성 문제는 외국 영화를 번역해 소개하는 영화 광고에서 극명하게 엇갈린다.

▲ <고스트>의 미국 영화 광고(1990) /사진=김병희 교수 제공
▲ <사랑과 영혼>의 한국 영화 광고(1990) /사진=김병희 교수 제공
▲ <고스트>의 한국과 일본 영화 광고(2010) /사진=김병희 교수 제공

<사랑과 영혼>(1990)의 영화 광고를 보자. 데미 무어 주연의 이 영화는 죽어서도 연인을 떠나지 못하는 가슴시린 사랑을 묘사해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만약 원 제목인 <GHOST>에 충실해 제목을 <유령>이라고 번역했다면 흥행에 성공했을지 의문이다. 영화는 보통의 상품들처럼 만져보거나 먼저 써볼 수도 없다. 따라서 영화 제목과 광고가 영화의 선택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상 이상이다. ‘유령’이라는 출발어를 우리 정서에 맞게 <사랑과 영혼>이라는 도착어로 탁월하게 번역했다. 미국 광고에서는 남녀가 진하게 포옹하는 장면에 “살해되기 전에 샘은 몰리에게 그녀를 영원히 사랑하고 보호하겠다고 말했다(Before Sam was murdered he told Molly he’d love and protect her forever.”라는 카피를 붙였다.

우리나라의 영화 광고에서는 <사랑과 영혼>이라는 제목 위에 “아! 슬픈 그림같은 사랑”이라는 헤드라인을 붙였다. 이어서 “참으로 신비합니다. 마음속의 사랑만은 데려갈 수 없으니까요!”라는 보디카피로 신파조의 느낌을 만들어냈다. 그래서인지 유령의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영화는 168만 3200명의 관객을 돌파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외국 영화의 직배가 시작된 1987년 이후 1993년말 까지 국내 개봉영화 중 흥행성적 1위를 차지했다(연합뉴스, 1994. 1. 12).

재미있게도 이 영화는 시간이 한참 흘러 <고스트>(2010)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 되었다. 한국의 송송헌과 일본의 마츠시마 나나코가 열연한 이 영화는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상영되었다. 그런데 같은 제목인데도 영화 광고의 헤드라인은 다르다. 한국 광고에서는 “지금, 당신은 사랑하는 그의 곁에 있습니까?”라고 했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이 세상에 남긴 분실물. 말하지 못했던 ‘사랑해’. (この世に殘した忘れ物. 言えなかった‘愛してる’)”라는 헤드라인을 썼다. 카피라이터들은 영화의 내용이 같더라도 자기 나라 정서에 알맞은 도착어의 개념을 고려해 헤드라인을 썼던 것.

이밖에도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는 <내일을 향해 쏴라>(1969)로, <Charlie’s Angels>은 <미녀 삼총사>(2003)로 번역되었다. 물론 <주라기 공원(Jurassic Park)>(1993)이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2004)처럼 원문을 그대로 살린 영화도 있다. 신학에서는 예수님의 수난을 패션(Passion)이라고 한다. 하지만 보통 패션을 ‘열정’으로 알고 있어 영화 제목을 ‘예수님의 열정’으로 오해할 수 있으니 <예수님의 수난>으로 번역했어야 타당하다. 서양 문화권에서는 신학적 용어에 친숙한 지적 수준에서 출발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배경에서는 일상적 의미의 수준에서 도착어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경영자의 말 한 마디나 글 한 줄은 본 뜻과 다른 맥락에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때로는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한다. 도착어를 헤아리지 않고 출발어를 내보낸 경영자가 여론의 뭇매를 맞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이 받아들일 도착어를 생각해본 다음에 출발어를 내보내면 어떨까 싶다. 상대방이 받아들일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생각해본 다음에 출발어를 내보내자는 뜻이다.

번역가 김석희 선생은 일대 일로 번역하는 ‘성실한 추녀(醜女)’와 맥락을 고려해 번역하는 ‘불성실한 미녀(美女)’ 사이의 접점을 찾는 데에 번역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했다.

접점 찾기는 경영자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경영자들은 보통 자기 입장에 서서 출발어를 쓰지만, 도착 지점의 배경이나 맥락을 고려해야 그 말이 순조롭게 도착할 것이다. 어디 기업 경영에서만 그렇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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