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 칼럼] 중국인 망명정부 위만조선이 평양에 있었다한들 대수인가

[초이스경제 장경순 만필] 요즘 한나라 사군 가운데 하나인 낙랑군의 위치를 두고 사학계에서 논란이 분분하다. 지금의 평양 부근이라는 기존 이론에 대해 일부 사학자들이 이견을 제시하고 있는 모양이다.

역사는 어찌됐든 학문적으로 가장 훌륭하게 검증된 것을 정론으로 정하는 것이 가장 옳은 일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학문적 검증보다 정서적, 또는 ‘애국적’ 검증이 우세하는 경향이 있다.

옛날 가장 위대했던 역사를 가진 나라는 전 세계에서 단연 이집트란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기만의 신앙이 아닌 합리적 과학으로 반박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가장 위대하고 경제력이 센 국가가 이집트인 것은 아니다.

역사는 가장 사실에 가깝게 서술돼야 교훈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일부 사학자들은 낙랑군이 평양에 설치됐다는 것은 고조선의 활동영역을 한반도로 좁히는 반민족적 사고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고조선이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에서도 활약했던 나라이기 때문에 고조선의 위치는 만주 일대에 있어야 하고, 그에 따라 고조선이 있던 자리에 설치된 낙랑군의 위치도 만주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무제는 기원전 108년, 군대를 보내 조선을 무너뜨리고 그곳에 낙랑군 등을 설치해 직할령으로 만들었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왜 한무제가 무너뜨린 조선을 단군의 고조선, 즉 단군조선으로 간주하느냐는 것이다. 한무제는 단군조선과 전혀 별개인 위만조선을 정복했을 뿐이지, 단군조선과는 실력을 겨룰 만큼 국경이 맞닿지도 않았을 수 있다.

또 하나 의문은, 이 시대만 해도 한국사의 개국임금들은 여전히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를 갖고 있다. 중국사에서는 이보다 1000년 이상 옛날 왕조에나 나오는 얘기들이다. 그만큼 한민족의 국가들이 아직 중국에 비해서는 정비된 체제를 갖지 못했던 때다.

이런 국가수준에서, 과연 기원전 2세기 한민족의 활동무대였던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모두 묶어서 통치하는 단일왕조가 존재할 수 있었겠냐는 것이다.

단일한 조선왕조가 있었다기보다는 한민족 역시 중국의 춘추시대와 비슷한 여러 국가들 간의 각축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 가운데 가장 강성한 나라가 패자나 맹주의 지위를 가졌을 것으로 보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 서울 종로구 사직단에서의 '개천절 대제전' 모습. /사진=뉴시스


개천절 날 기념하는 조선은 단군성조가 세운 고조선, 즉 단군조선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에게 단군조선은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알아야 될 이유도 없고 관심을 쏟을 형편도 못됐다.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 다급한 문제를 일으키는 흉노와 강족, 만족 등 많은 이민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조선국가가 있기는 했다. 기자조선이다.

기원전 1100년경, 주나라가 은나라를 무너뜨리자 은나라 왕족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을 해 자신만의 나라를 세웠다.

한민족의 국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영역을 피하고, 또 유목을 할 수 없는 자신들 처지에 맞는 땅을 찾아 세운 나라를 역사에서는 기자조선으로 부른다. 은나라 왕족인 기자는 원래 한 나라에 해당할만한 큼직한 전장을 운영하던 사람인데, 그 기반을 잃자 중국에서 거느리던 많은 기술자와 백성들을 데리고 한반도로 옮겨온 것이다.

앞선 농경과 청동기 기술을 가졌으니, 새로 한민족 백성들을 받아들이기도 쉬웠을 것이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 나라가 한민족 국가에 대한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중국의 망명왕조인 기자조선은 이후 중국에서 정변이 발생해 망명해 오는 사람들의 새로운 선택지가 됐다. 한나라 장수 출신 위만도 이렇게 해서 기자조선으로 왔다. 위만이 끝내 기자조선을 무너뜨리고 자신이 왕이 되면서 기자조선은 위만조선이 됐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언급한 조선은 바로 이 위만조선인 것이다.

사마천은 한민족의 국가로 조선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조선 땅에 있는 중국 망명인들의 나라로 언급했을 뿐이다. 점차 이 나라와 한나라간의 충돌이 빈발해지자 마침내 한무제가 정벌에 나섰다.

요동의 육군과 산동성의 수군을 동원해 두 방향으로 공격한 것을 보니, 당나라 이세적의 고구려 원정 경로와 흡사하다. 이세적처럼 상대국가의 항복을 받는데 성공은 했지만, 차이점이라면, 장수들 간 손발이 맞지 않아 모두 한무제에게 처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떻든 기자조선이 번창하고 또 위만조선이 돼서도 한반도의 여타 지역이나 만주 일대 여전히 가득한 한민족의 국가들까지 자기 영토로 포함시키지는 못했다. 이는 한국사에 부족국가 시대가 존재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듯, 한나라는 한민족을 정벌해 복속시키겠다는 생각은 가져본 적도 없다. 동쪽 변경에서 충돌이 빈발하니 원인에 해당하는 중국인 망명국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려고 간 것이다.

단군조선은 중국과 무관하게, 흐르는 세월 속에 한민족의 맹주국가로서 위세는 약화됐으나 여전히 명맥을 이어갔으리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진위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기원전 239년 23세의 젊은 영웅 해모수가 거병해 단군조선의 항복을 받아내고 한민족의 새로운 맹주가 됐다는 글을 접한 적이 있다.

단군조선이 단일국가로 통치하다 한무제에게 패망했다는 얘기보다는 오히려 이쪽이 더 타당성이 많다고 본다.

이 얘기는 나중에 고주몽이 고구려를 개국할 때 왜 해모수라는 인물과의 연고를 내세웠는지에 대한 설명도 된다.

해모수는 아직까지 한국사에서 입증되지 않은 미지의 인물이다. 그런데, 고구려 개국 무렵의 역사를 보면, 나라를 세우려는 사람에게는 해모수와의 연고를 민중들에게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민심을 빨리 모을 수 있었던 흔적이 역력하다.

다섯 마리 말이 이끄는 오룡거를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한민족이 그 때까지도 기마전에 필요한 큼직한 말의 보급을 못 받고 예전의 작은 말들을 이용한 전차전을 펼쳤다는 점을 시사한다. 중국의 춘추시대 전쟁 형태다.

시기적으로 따져보면, 해모수는 고주몽보다 200년 쯤 앞선 시대 인물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의 아들을 자처한다는 것이 오늘날 기준으로는 말이 안된다.

하지만, 한민족 자체의 문자도 없고 언론도 없던 시절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얘기다. 민중들도 고주몽이 해모수의 진짜 아들인지 아닌지 보다, 자신들이 해모수에게 걸었던 기대를 대신해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가 더욱 중요했다. 고주몽은 그것을 고구려 건국으로 입증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한민족 고대사의 영역은 대단히 광활하다. 중국인들의 본국 정부와 망명정부가 다퉜던 지역이 평양 일대인지 아닌지는 거기에 비하면 대단히 사소한 티끌일 뿐이다.

한국은 지금 중국의 역사 왜곡, 사드 보복, 그로인한 경제적 갈등 속에 있지만 개천절을 맞아 다시 의연해지자는 뜻에서 이 칼럼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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