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한다는 사람들 역시 배울 점 제대로 배웠나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하루 전인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10주기를 맞았다. 이번엔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들고 추도식에 참석하는 일도 있었다.

인터넷에서 정상적 가치관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여전히 유치한 조롱거리를 올리고는 있지만, 건전한 지성을 가진 공간에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찾기 힘들다. 그의 생전과 참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현 정부는 노 전 대통령 생전의 ‘친노’가 ‘친문’으로 이어져 만들어졌다. ‘노무현의 후배’들이다. 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과 함께 법조인 시절 인권변호사로 함께 활약했었고, 노 전 대통령의 청와대 비서실장도 맡았었다. 모든 점이 흡사한 가운데, 문 대통령은 대단히 용맹한 군 경력을 가졌다는 점 정도가 다르다.

하지만 현 정부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과연 참여정부 때와 변한 것이 없느냐는 의문이 든다. 국정에 임하는 자세에서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 사람들이 보여줬던 놀라운 학습능력, 그리고 숫자를 기초로 한 실무능력을 그대로 갖고 있느냐다. 역대 그 어떤 정권보다 시장경제원칙에 철저했던 참여정부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느냐도 의문이다. 정부 명령보다 시장의 수급원칙에 따라 경제를 이끌어갔던 당시의 그런 정책행태를 얘기하는 것이다.

무조건 ‘우리는 노무현의 사람들이었다’만 강조할 때가 아니다. 이번 정부의 경제정책 가운데 몇 가지는 참여정부라면 과연 저런 식으로 했을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들이 있다. 주로 숫자나 시장경제 원리가 제대로 고려되지 않는다싶을 때 드는 의구심이다. 참여정부 초반 3% 성장에 그렇게 비난이 쏟아졌어도, 당시 정부는 ‘균형재정’ 원칙도 포기하지 않았다. 참여정부가 물러난 직후 세계 금융위기가 왔을 때 균형재정은 한국 경제의 튼튼한 방어막 노릇을 했다. 또한 정치인들의 정치와 관료들의 정책 영역이 상호 존중하는 모습도 있었다.

현 정부가 취임 후 지금까지 이르는 동안 몇몇 노무현 정부에서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지만, 당시 상당히 총명한 국정파악 능력을 보여줬던 사람들이 지금 전혀 달라진 경우도 있다.

‘노무현의 후배’들이라면 그 장점만큼은 놓치지 말고 그대로 계승해 줄 것이란 기대가 더 이상 사라지지 않게 철저한 중간성찰을 해야 할 때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에게 자신이 직접 그린 노무현 전 대통령 초상화를 전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에게 자신이 직접 그린 노무현 전 대통령 초상화를 전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TV만 '지직'거려도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던 사람들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중 유행어 가운데 하나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지금 그에 대한 비판을 찾기 힘들지만 그의 재임 때는 정반대였다.

중년 이하 사람들 모임에서 누군가 "집에 TV가 한 번 ‘지직’거렸더니 아버지가 바로 노무현 욕을 하시더라"고 하면 폭소가 터졌다. 저마다 집에서 어르신의 비슷한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이런 충동적 대중심리는 정치권이나 일부 언론에 그대로 반영됐다. 오히려 이들은 대중심리를 더욱 확장시키고 자극했다.

심지어 노 대통령이 외국 방문 도중 한국 경제가 매우 양호하다는 발언을 한 것까지 시비대상이 됐다. 야당인 한나라당(지금의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서 "누가 무슨 보고를 했기에"라며 이 발언을 따졌다. 이 당에서 ‘군계일학’으로 김양수 의원만이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면 우리나라에 대해 그렇게 발언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두둔할 뿐이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이후 9년 집권 기간 대부분 참여정부 중후반의 5%대 경제성장을 보여주지 못했다.

‘노사모’라는 명칭으로 시작한 노무현 지지자들의 성향이 더욱 단단해 진 것은 이런 정치인과 일부 언론의 ‘비판을 위한 비판’ 행태에 대한 반작용의 영향이다. 이들은 노무현에 대한 몰지성적 비판, 그리고 그의 서거에 이르는 과정이 한국정치와 사회의 왜곡된 의식구조를 그대로 드러낸다고 보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역시 정치인인 이상, 비판 자체에서 열외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비판을 약화시킬 ‘팩트’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 ‘나도 빨리 비난하는 대열에 동참해 심신의 평온을 얻자’던 식자층 어른들의 행태는 1987년 민주화 이후 교육을 받은 세대들에게 부조리로 보일 뿐이었다.

이런 기억은 오늘날의 진보세력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제기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교훈이 된다.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에 존재했던 허위의식에 기초해 비판 아닌 비난만 거듭했다가 불과 몇 년 내에 본인이 머쓱해지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지금 당장의 대중인식에는 생경하지만, 장기적으로 미래를 위해 필요한 변화들에 대해 무조건 악다구니 논리만 모아대던 과거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이 여기서 생겨난다.

생전에는 그렇게 비난만 퍼붓다가 돌아가신 후에 "나는 그 분을 존경했다"고 얘기하는 건 참 본인 스스로 궁색해지는 일이다. 그런 마음을 왜 생전에 그 사람의 진심이 뭐였는지에 좀 더 귀 기울이는 쪽으로 쓰지 않았을까.

물론, 돌아가신 분의 뒤를 잇는 사람들부터가 전혀 장점을 이어받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 때보다도 더 준엄한 비판을 들어 마땅하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