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한국이 반납한 아시안게임을 대신 치른 곳은 어디였나

지난달 부산에서 열린 2019 한·아세안특별정상회의. /사진=뉴시스.
지난달 부산에서 열린 2019 한·아세안특별정상회의. /사진=뉴시스.

[최공필 박사,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삼국지에서 동오의 주인인 손권이 한 장수와 대화를 나눴으나 장수의 식견이 생각보다 많이 부족한 데 대해 실망했다. 손권은 그에게 책을 읽어야 한다고 권했다. 주군의 권유는 지시와 마찬가지다.

얼마 후 손권의 수하들 가운데 가장 학식이 출중한 노숙이 이 장수와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평판과 전혀 다른 놀라운 지식을 장수가 과시했다. 주군의 지시와 같은 권유에 장수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 분명했다.

감탄한 노숙은 "공은 이제 오하의 아몽이 아니오"라고 말했다.

장수는 이에 대해 "선비는 사흘만 안보면 괄목상대하는 법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장수가 여몽이다. 삼국지를 유비와 촉한 중심으로만 읽는 사람들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관우를 사로잡아 죽게 만들고, 그때까지 신나게 읽던 삼국지를 비극적 소설로 바꾼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지식의 축적속도가 느렸던 고대에도 사흘이면 한 사람의 지식이 일취월장하기에 충분했다. 초고속으로 새로운 지식이 쌓여가는 오늘날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한 사람뿐만 아니라 국가도 마찬가지다. 한국전쟁에 UN연합군으로 참전했던 용사들에게 1988년 서울올림픽은 엄청난 감동이었다. 30여년 만에 이룩한 '한강의 기적'에 용사들은 그 누구보다 더한 자부심을 가졌다.

그런데 세상에서 한국만 변하는 것이 아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마사이족 전사가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사진은 매우 이색적인 관심거리일 뿐이었다. 아프리카는 오로지 광활한 야생에서 동물들이 마음껏 뛰놀고 사람들은 문명이전의 무공해 생활을 누릴 것이란 선입관이 매우 강하다.

그러나 아무리 우수하고 뛰어난 민족이라도 그 모든 혈통이 시작된 곳은 아프리카다. 그 곳 역시 문명이 꿈틀하고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한 산업이 발달하고 있다. 아프리카도 2019년 10월부터 자체 스마트폰을 만들어 역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한국에서 아프리카는 꽤 먼 곳이지만, 이보다 훨씬 가까운 동남아시아의 변화는 한국이 정말 주목해야 한다. 이곳은 한국의 경쟁자뿐만 아니라 미래 새로운 질서의 동반자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한국의 남방정책은 이런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정책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가를 논하기 앞서서, 과연 한국인들은 미래의 중요한 동반자인 동남아시아를 어떻게 간주하고 있는가. 이게 더 시급한 문제다.

무슨 일이든 마음이 먼저 갖춰져야 결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음으로부터 전혀 존경하는 마음이 없는데 무슨 동반자의 우호협력을 기대할 수 있나.

1950년대 이후 고도성장기, 대다수 한국인들은 외국 구경을 거의 못하는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신세로 오로지 일에만 몰두했다. 바깥 구경은 못하지만 강한 자부심으로 잘 살아보자는 목표아래 똘똘 뭉쳐 세계 11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기적을 이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나친 '쇼비니즘'의 문제가 생겼다. 비속어로는 '국뽕'으로 부르는 것이다.

아무리 사이비 역사학자임이 분명해도 '고대 한국은 로마까지 다 점령했다'고 사기를 치고 다니면 여기에 호응하는 독자나 팔로워들이 수두룩하게 붙는다. 고도 성장기에 자란 아저씨 세대들이 특히 이런 '국뽕 마케팅'에 취약한 면이 있다. 아직까지 한국사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 세대는 타민족에 대한 편견도 심하다. 그 가운데 가장 왜곡된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 동남아시아다. 이것은 한국사회에서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를 "외국인"과 "외노자"로 양극화시킨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특히 동남아시아에 대한 무시는 참으로 역사적 고려도 전혀 없는 천박하고 무지한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방콕, 마닐라, 자카르타, 쿠알라룸푸르 등 동남아시아 도시들 역시 한국인들에게는 런던, 뉴욕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들이었다.

한국이 1970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하려다가 안보와 경제 이유로 이를 반납하자 급하게 이를 대신 유치한 곳이 태국 방콕이었다.

못사는 나라가 잘사는 나라 되는 건 제대로 된 전략과 노력이 갖춰지고 환경변화가 함께 한다면 10년이면 충분하다. 앞으로 2020년대, 2030년대 동남아시아는 절대로 1980년대 같지 않을 것이다.

특히 동남아시아 나라들을 괄목상대해야 하는 이유는, 이 지역은 저마다 깊은 문명의 역사와 함께 엄청난 인구가 살아가는 지혜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남북한의 인구를 모두 합쳐도 현재는 베트남 인구에 못 미치고 태국을 700만 명 정도 넘는다. 인구 2억7000만 명의 인도네시아와는 비교가 안된다. 필리핀 인구는 1억 명을 넘는다.

또 하나, 국제사회에서의 소통 면에서 한국은 정말 이 세계 어느 곳도 얕잡아볼 수 있는 곳이 없다. 이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모든 나라들이 함께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언어적 장벽, 그리고 철저한 상하수직관계에서 오는 사고방식과 스스로를 낮춰버릇해야 칭찬받는 생활자세가 국제사회에서 한국인의 적응을 참 어렵게 만든다. 상대적으로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이런 면에서는 대체적으로 한결 더 여유롭다는 얘기다.

동남아시아는 많은 인구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가운데 1990년대를 전후해 정치체제 역시 군사독재자들이 물러나고 민간정치인이 등장하는 흐름을 갖고 있다. 금융시장이 융성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함께 금융이 활성화된 아시아 시장을 형성할만한 충분한 덩치를 갖추고 있다. 시장에서 덩치는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체력이다.

이제 미국과 유럽의 금융이 자기들 멋대로 룰을 정해서 아시아에게 덤터기를 뒤집어씌우는 신세를 면해야 할 때다. 리보금리를 조작하는 범죄를 저지른 건 미국과 유럽금융인 자신들인데 왜 리보를 대체한다고 해서 그에 따른 막대한 비용을 아시아까지 지출해야 하나.

한국과 아세안국가들 인구를 합치면 7억 명에 육박한다. 인구 4억 명의 미국과 영국 금융에 질질 끌려 다니기만 할 일이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으려면 아시아 스스로의 정체성을 우선 갖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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