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23] 정치에 ‘여촌야도’ 현상이란 것이 있다. 여당은 촌에서 우세하고 야당은 도시에서 우세하다는 얘기다. 1980년대 후반부터 지역감정이 판을 치기 전에는 한국 정치에서도 꽤 들어맞는 얘기였다.

정당들이 지역적 ‘텃밭’을 갖기 시작한 후에도 서울은 ‘여촌야도’가 지속됐다. 한마디로 여당이 맥을 못 췄다는 얘기다.

여당이 서울 선거에서 이긴다는 것은 야당의 ‘텃밭’에서 이기는 것과 또 다른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게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다. 1995년 지방선거만 봐도 다음해 서울의 총선 결과는 뻔해 보였다. 서울시장에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조순 후보가 당선됐을 뿐만 아니라 20명이 넘는 구청장 선거는 단 두 곳만 여당인 신한국당에 내주고 모두 국민회의 후보가 이겼다.

1992년 생애 세 번째 대통령선거에서 떨어진 김대중 민주당 후보가 장기간 영국유학을 마치고 1995년국민회의 총재로 정계 복귀했다. 정당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김대중 총재의 정치적 성향이 엄청나게 유연해졌다. 강성 투사들 뿐만 아니라 돈 버는 법을 안다고 소문난 인재들과 참신한 젊은 유망주들을 영입한 결과가 지방선거 승리로 이어졌다.

하지만, 1996년의 총선은 완전히 예상을 뒤집은 결과를 만들었다. 서울 41개 선거구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신한국당이 25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뒀다. 질적으로는 서울 선거 결과만 가지고 여당의 승리로 평가할 수도 있었다.

신한국당의 문제는 그럼에도 끝내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당이 과반수가 안 되면 정책 추진 면에서 상당히 곤란한 일이 많아진다. 김광림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차관시절 국회 토론회에서 밝힌 것처럼 재정의 탄력성이라는 숫자도 여소야대에서는 낮아지는 것이 입증됐다.

여당이 과반수가 안됐다고 해서 제1야당인 국민회의가 대승을 거둔 것도 아니다. 개헌저지선 100석 비슷하던 국민회의 의석수는 70석으로 격감했다. 주요 지지기반인 서울에서 참패한 결과다.

신한국당과 국민회의가 가져오지 못한 의석은 대부분 제3당으로 처음 등장한 자민련으로 갔다. 50석이나 차지해 최대 승리자가 됐다.

그런데 자민련의 승리 지역은 정치 지형상 국민회의가 넘보기는 힘든 곳이었다. 원래 민정당 시절부터 여당 강세였던 곳인데, 김영삼 정권에 대한 불만으로 자민련을 선택한 곳들이다.

이 선거 결과는 이후 김영삼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총선 전에는 김대중 총재와 개혁 경쟁을 하는 듯한 모습으로 새로운 인재 영입에 적극 나섰다. 지금 새누리당 5선급 이상의 원로 정치인들이 개혁 성향 국민들에게는 수구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들 대부분은 이 때 김영삼 대통령이 민정당계 인사들을 물갈이하는 대안으로 영입했다. 신한국당의 서울 승리에는 크게 기여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끝내 과반수 달성에 실패한 것에 대해 김영삼 정부는 보수기반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모양이다.

총선 직후 연세대에서 한총련 시위가 벌어졌다. 이 사태로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규정됐다. 정부는 시국사범에 대한 강한 단속을 거듭해서 천명했다. 그럴 때마다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듯 했다.

개혁적 젊은이들을 잔뜩 모았지만 오히려 통치는 급히 우경화했다. 집권 전반부에 하나회를 청산하고 총선 직전 5공 신군부 세력을 단죄하던 모습은 급속히 사라져갔다.

이러한 정치 행태의 클라이맥스가 1996년 12월의 노동법 파동이다.

1996년은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둔 시점이다. 거기다 총선까지 있었으니 정치가 국정관리의 모든 일정표를 관리할만한 상황이었다.

‘구조조정’이란 말은 내가 기억하기에 외환위기 이후에 나온 말이 아니다. 경제 관련 전문기관들의 글에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국정을 관리하는 그 누구도 ‘구조조정’에 눈길 한번 주기 어려울 정도로 정치가 만연하는 시기였다. 사상 최대 경상수지 적자조차 “펀드멘털에 비교해 큰 문제 없다”고 낙관하던 사람들이다. 구조조정 같은 앞날을 당겨오는 개념이라면 경제학자들의 단어 유희라고 여겼을 것이다.

무역적자나 노동법, 구조조정은 모두 미래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될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때 한국은 모든 일들을 어느 쪽이 표를 더 많이 가져오느냐에 따라 방향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고성능 폭약에 해당되는 투신사의 무더기 종금사 전환까지 감행한 것은 정치 논리와 별개의 또 다른 미스테리다.

사람이 마치 자기 죽을 자리를 찾아서 간다는 말처럼, 1996년 한국을 결과론적으로 들여다보면 다음해 외환위기를 초래할 모든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다. 심령드라마에서 영혼이 악마에 지배당해 무의식으로 떠도는 사람 같은 모습이다.

1996년 8월, 820원을 두고 당국과 딜러들이 혈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시위 장면이 떠오른 것은 그 때의 시대 배경이 그랬기 때문이다.

이른바 ‘보수 몰이’를 할수록 지지도가 올라간다고 여긴 집권층은 한총련 뿐만 아니라 다른 학원, 노동계, 사회 문제에 “끝까지 추적해서 엄단한다”는 멘트를 수시로 생산했다.

이들의 화법은 그대로 외환당국자들에게 옮겨졌다.

“무분별한 환투기는 절대 용납되지 않을 것.”

나의 원달러 일기는 약간의 각색을 더했다. “환투기 세력은 끝까지 추적 검거하는 시장 개입”이란 표현을 자주 썼다.

외화자금실에 있었던 인포맥스 단말기로 원화환율의 일중 변동 곡선을 보면 시위현장에 비유하기 딱 좋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개장 후부터 슬금슬금 올라가는 것이 학생들의 대열이 교문에 도열한 진압 경찰에 접근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수천만 달러 정도 개입이 등장하면 환율 곡선이 바로 아래로 처지기 시작했다. 진압 경찰들이 최루탄을 발포한 직후 학생들이 도망가는 형상이다.

제일 눈길이 가는 820원에는 이중 삼중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시내 시위에서는 가끔 소수 학생들이 기습적으로 진압경찰의 배후에 등장해 구호를 외치는 것과 비슷한 일도 한 번 벌어졌다. 8월 14일, 다음날 광복절 휴일을 앞둔 폐장 무렵이었다.

달러 매수 세력이 갑자기 등장해 820원을 넘은 상태로 그날 시장이 끝나게 만들었다.

당국이 종가 관리하는 요령을 시장 투기세력들도 답습한 듯한 분위기였다. 딜러들은 이게 해프닝인지, 당국이 사실은 820원에 후퇴하는 것인지 노심초사하면서 광복절 휴일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 휴일을 마친 금요일인 16일, 원달러환율은 819.9원으로 ‘종가 관리’를 받으면서 한 주 거래를 마쳤다.

감히 당국의 삼엄한 방어태세를 뚫고 820원을 넘기는 건 무모한 만용이란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820원 마지노선의 수명은 아직 25일 정도가 더 남아 있었다.

 

[24회] 나는 무모한 820원 환율 방어를 비판하지 못했다

[22회] 경상수지 적자 많아서 국가 경제가 망한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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