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33] 

‘항명(抗命)’이라는 어휘가 한글세대인 지금의 독자층들에게 익숙해진 것은 새누리당의 유승민 국회의원이 원내대표 시절 박근혜 대통령과 정치적 갈등을 겪은 때문이다.

가끔 스포츠뉴스에서도 쓰인다. 선수들이 감독 지시에 안 따르고 항명했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 단어가 주로 쓰이는 곳은 역시 정치권이다. 1971년 집권 공화당에서 쌍용그룹 창업주인 김성곤 의원 등 4인 체제가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에 동의함으로써 박정희 대통령에게 항명한 이후로 중요한 정치용어가 됐다.

항명은 주로 집권당 정치인들이 대통령에 반발할 때 자주 쓰인다. 정치의 낙후된 면모를 지적하기에는 이보다 적절한 용어가 없다.

외환위기를 향해 1년 카운트다운을 시작한 1996년의 한국 정치에서도 ‘항명’이란 용어가 잠시 등장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통령이나 대드는 국회의원이나 한국에 다가오는 무시무시한 운명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에 매달려 얼굴을 붉히는 해프닝에 불과했다.

항명을 한 사람 가운데 초선인 김문수 의원이 있었다. 경기도 지사를 하면서 “나 도지삽니다” 멘트를 남긴 바로 그 사람이다. 지금 젊은 층에게는 상당히 의외겠지만 김문수 의원은 원래 초강경 노동과 저항운동을 한 사람이다.

▲ 지금은 보수성향 정치인의 하나로 분류되는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엄청난 저항운동을 하던 노동계 출신 인사다. 그가 초선의원으로 등원한 1996년의 노동법 파동은 그에게 새로운 길을 가야 하는 갈림길이 됐다. /사진=뉴시스.

단순히 저항운동을 한 정도가 아니다. 이 세계에서 교주까지는 아니어도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지도급 인물이었다. 노동시인으로 유명한 박노해 시인에게 사상적 영향을 깊게 준 사람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소설가 안재성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문수가 시를 쓰라고 해서 박노해는 시인이 됐고 나는 김문수가 소설을 쓰라고 해서 소설가가 됐다”고 밝혔다. 저항세계에서 이런 영향력을 갖고 있던 사람이다.

그런 김문수가 1996년 집권 신한국당의 국회의원이 됐다. 김영삼 대통령이 민주자유당을 새롭게 바꾼 당명의 맨 앞 ‘신’자가 빈말이 아님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인물이 김문수, 이재오 등이었다.

앞서 김영삼 정권이 1996년 총선에서 과반수 달성에서 실패한 이후에는 국정 운영기조를 철저하게 기존 지지층 중심으로 바꿨다고 전했다. 이를 나타내는 사례가 그 해 여름의 한총련 사태와 연말의 노동법 파동이다.

개혁을 내세워봤더니 수도권에서는 제법 먹혀들어갔는데, 기존 지지층을 너무 많이 잃어서 과반수 달성에는 실패한 신한국당이었다.

여기다가 그해 겨울에는 북한의 잠수정 한 척이 동해에서 조난한 후 승조원들이 한국 해안에 상륙했다. 이들을 잡기 위해 정국은 완전히 공안에 뒤덮여 있었다.

경향신문에서 중앙일보로 옮겨간 김상택 화백은 한 컷 만화에서 여야 영수회담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길쭉한 테이블 끄트머리에 왜소하게 앉아있고 김영삼 대통령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큼직한 탁자에 잠수정 한 척을 올려놓고 있다.

무턱대고 공안몰이하는 분위기 속에 무난하게 외교를 이끌던 공로명 외무장관이 퇴진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의 수 십 년 전 어린 학생 시절 전쟁을 겪을 때 행적을 뒤늦게 일부에서 문제를 삼자 퇴진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보수 성향의 인사들에게도 아쉬운 순간으로 지적되고 있다.

오랜 세월 논란이 분분하던 노동법 개정작업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국민들이 보기에 관건이 되는 새로운 변화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리해고 도입, 또 하나는 복수노조였다.

정리해고는 기업들이 원하는 반면 노동자들이 극력 반대하는 것이고, 복수노조는 노조가 원하는 반면 기업들이 못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그해 11월말 정부가 내놓은 개정안은 정리해고 즉각 도입, 복수노조 도입은 유예였다.

당시 언론은 개정안이 마련된 후 과천 청사의 경비가 강화됐다고 소개했다. 언론은 행간을 통해 재계는 축배를 드는 듯한 분위기임을 시사했다. 전경련을 비롯한 재계단체는 개정안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을 발표했지만 이는 본심이 아니라 여론전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의도로 간주됐다.

노동 운동의 전설로 불린 김문수 의원이 가만있을 수 없는 입장이 됐다. 함종한 박세직 유용태 이신행 홍준표 의원과 함께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신한국당 지도부는 단호하게 대응했다. 김철 대변인은 “이같은 작태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작태’라는 단어가 구설수를 초래했지만 김문수 의원 등의 기세를 꺾기에는 충분했다.

김 의원은 오히려 개정안이 마련된 뒤,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인 옛 동지들과 마주쳐 목소리를 높이며 설전을 벌이는 모습으로 돌변했다. 오늘날에 알려진 김문수 전 지사로 변화하는 첫 과정이었던 것이다.

신한국당이 야당인 한나라당이 된 뒤에는 여당 국회부의장을 붙잡아두는 돌격대 역할도 자처했다. 공동여당인 자민련 소속 국회부의장이 국회를 못 열도록 김문수 의원 등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이 김 부의장 자택으로 쳐들어갔다. 김 부의장이 화장실을 간다며 이들을 따돌리고 목욕탕 창문으로 자택을 벗어났다가 이들이 다시 자택으로 ‘모셔오는’ 소동도 있었다. 이 때를 전하는 사진에는 김 부의장이 목욕탕 슬리퍼를 신고 있는 이색적 모습을 담고 있다.

산업은행에 1996년 봄 강성노조가 등장한 것은 마치 신이 미리 사건을 질서 있게 배열한 듯 한 느낌을 주고 있다.

노동법 개정안에 따르면 금융권이 맨 먼저 ‘유연해진 고용’의 적용을 받게 돼 있었다. 쉽게 직원 해고하기 좋게 됐다는 것이다.

산업은행을 포함한 모든 은행원들이 탑골공원에 모여서 가장 먼저 저항을 시작했다. 노조운동과는 몇 십 년을 무관하게 살아온 산업은행 사람들이지만, 이미 그 해 봄에 조직을 단련하는 계기를 가졌다. 새로 출범한 강성노조가 임금 정상화 투쟁을 벌이면서 산은 사람들에게도 이런 낯선 일에 대한 경험을 축적했던 것이다. 이 조직력은 그 다음해 산은 총재 부임 때 또 한 번 활용된다.

노동법의 실행 단계에서 금융권을 가장 먼저 적용한다는 방침이 후퇴해 은행원들의 탑골공원 투쟁은 종료됐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전체 노동계와 정권이 맞붙는 국면으로 넘어갔다.

나는 1997년의 외환위기를 다루는 이 연재물에서 이 때 노동법 파동을 허탈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논쟁의 당사자 양측 어느 편 입장에 선다한들, 그 다음해 찾아올 국가의 파탄과는 무관한 것들로 보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가 만약 ‘국민적 합의’를 중시해 재계와 노동계가 모두 극력 반대하는 것을 하나씩 받아들이는 정치적 선택을 했다면 과연 또 무엇이 달라졌을까.

급한 상황에서 특단의 대책을 세우려면 편가름을 초월한 민심의 성원이 있어야 한다. 김대중 정부 집권 직후의 ‘금 모으기’가 이런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민심의 결집이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공적자금의 조성이 가능했던 것이다.

집권 4년차인 김영삼 정부가 과연 노동법 만큼은 공평한 대응을 했다면 흩어지는 민심을 얼마나 붙잡을 수 있었을까.

그해 무더기로 승인을 받은 종금사들은 은행을 통해 대신 빌려온 달러를 위험한 채권에 마구 투자하고 있었다.

이 달러는 특히 어렵게 구해온 것이었다. 마침 그 해 사상 최대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해 한국에는 달러가 고갈되고 있었다. 허울만 좋은 ‘OECD’ ‘소득 1만 달러’와 같은 허세로 빌려온 달러들이지 벌어온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미국은 달러 금리를 전보다 두 배나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환율 840원이 무너진 것은 820원 때와 같은 주목도 받지 못했다. 1996년 12월12일 미국달러 대비 원화환율이 5.5원 상승하면서 844.9원을 기록했지만 국민들의 눈과 귀는 온통 노동법 대결에 몰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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