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 국회 본관의 모습. /사진=뉴시스.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35] 엄청난 시민 저항을 불러일으킨 1996년의 노동법 파동은 무엇이 정답이었는지, 알기도 힘들지만 알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 다음해의 외환위기를 다루는 관점에서 그렇다.

이미 한국은 노동법에 대해 그 어떤 ‘신의 선택’을 했다고 한들, 기술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외환위기의 길로 가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재계의 편만 드는 노동법이든, 노동계의 목소리에 압도당한 노동법이든, 바꿀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미국은 이제 금리를 두 배나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해외에 있는 돈들을 미국으로 불러 모으고 있었다는 점. 한국은 사상 최대의 경상 적자를 기록하면서 달러가 고갈됐다는 점. 그리고 무더기로 외환영업에 뛰어든 종금사들이 외화 수입과 지출에 대해 ‘기간 불일치(미스매치)’를 발생시킬 무분별한 외환 영업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어떤 노동법인들 한 해 동안 20개 투금사를 무더기로 종금 전환시켜 준 ‘죄과’를 만회할 수 없었다.

해가 바뀌고 몇 달 있으면 한보와 기아의 부도라는 대파란 마저 겹치게 된다.

다만, 한 가지 당시 언론의 눈을 통한 국민 정서를 생각해 볼 여지는 있다. 통합된 국민 정서는 어려운 시기에 정책을 뒷받침해 주는 힘의 원천이 된다.

노동법 논란이 진행 중일 때 관건은 복수노조와 정리해고로 요약됐다. 전자는 재계가, 후자는 노동계가 극력 반대하는 것이었다. 정부의 노동법 개정안은 정리해고 시행, 복수노조 유예로 발표됐다.

상당히 보수적인 편에 속한 언론의 만평에서도 화난 척하면서 뒤에서 축배를 들고 있는 재계를 풍자했다.

나중에 국회에서 여당 단독으로 이 법안이 처리되자, 또 다른 신문의 만평은 더욱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이 신문은 대기업과의 관련이 더욱 높은 곳이다.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라는 뉴스를 듣고 있는 남편의 얼굴의 시커멓게 변했다. 부인은 “그래도 이때까지는 괜찮았어요”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 뉴스가 ‘한국 축구, 이란에 2대6 참패’를 전하자, 남편은 완전히 돌변해 TV를 창밖으로 던지려 하고 있고 부인은 “안돼요! 아직 할부도 안 끝났는데”라고 말리고 있다.

두 신문은 모두 지금이나 그 때나 보수성향이 강한 곳으로 분류되고 있다.

국민의 관점에서 봤을 때, 정부의 개정안은 재계에 기울어진 불공평한 것으로 간주된 것이다. 외환위기가 발생한 후, ‘금 모으기’와 같은 단결된 힘은 이런 정서에서는 나올 수 없다. 국민의 뜻이 갈라져 있다면 막대한 공적자금의 조성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다음 해 50년 만에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된 출발은 노동법 파동에서다. 정부가 준비했던 개정안이 정답이었든 아니든, 한국 사회에서 받은 평가가 그렇다.

당시 여당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 중에는 김대중 후보의 당선 원인을 여당 후보 아들의 병역 의혹이나 여당 지지자들의 표 갈림이라는 미시적 요인에 두고 있다.

그러나 여당 후보 아들의 병역시비는 진작 울고 싶었던 사람들 뺨 때려준 격에 불과하다. 1996년 말 노동법 파동에서 상당수 국민들은 ‘권력이 안 바뀌니 이런 일이 계속 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노동법 이전에는 경제침체에도 정권이 상당한 지지기반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정권은 여태 정권들이 해왔던 이념 매뉴얼에 더욱 집착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국의 외무장관 가운데 그나마 무탈하다고 평가되던 공로명 외무장관이 1996년 11월 퇴진한 것은 정권이 바뀌지 않는 한 언제든 다시 벌어질 수 있는 조건반사적 과정이었다.

노동법 파동은 이런 단단한 지지기반을 처음으로 뒤흔들어 놓은 충격이었다. 당장 야당 후보 지지율이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위한 핑계거리가 몇 달 후 등장한 여당 후보 집안의 병역 소동이었던 것이다. 이런 지지율 역전을 예고한 현상이 연초 조순 서울 시장의 지지율 1위 차지였다.

여당에서 탈당한 이인제 후보가 끝까지 완주하며 표를 분산시켰다는 점도, ‘사표 방지’를 싫어하는 한국 유권자들의 성향에서는 설명이 안 되는 얘기다. 5년 전, 야당의 ‘3자 필승’ ‘4자 필승’론이 난무한 가운데도 여당후보는 8%포인트 격차를 넘는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그만큼 여당 지지층은 사표를 싫어해 확실한 곳으로 표를 모아준다.

이랬던 사람들이 1997년에는 이미 ‘꼭 여당이 정권 재창출해야 된다’라는 관성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것이 마음 놓고 제3후보를 선택하게 된 배경이다.

노동법 논란은 경제적으로는 아무것도 바꿔놓지를 못했다. 개정에 재개정을 거쳤지만, 외환위기와 함께 모든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노동법 파동이 바꾼 것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 지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높은 자리 있는 분들에 관한 얘기다. 

외환위기는 국민들의 나태함으로 빚어진 일이 아니라 국가 엘리트들의 부실한 관리가 초래한 국난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나라의 다수 대중은 위기에 전혀 책임이 없을까.

작은 위기도 큰 위기로 확대시키게 되는 취약한 금융 심성이 이 나라 국민들에게 오랜 세월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다음에 거론할 주제다.

 

[36회] IMF 외환위기, 평범한 한국인에게도 죄가 있다면

[34회] 당대 석학의 질타에 한국의 당국자는 미소(?)만 짓고 있을 뿐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