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 시내 곳곳에 노숙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다. /사진=뉴시스.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36] 아는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돈 1000만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내가 돈이 어디 있는가.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에게 돈 얘기를 하러 왔다.

내가 은행원이기 때문에 돈 나올 곳이 있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었던 것이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사라진 은행원들의 특권이 아직 있을 때다. 생활안정자금이라고 2000만원까지 극히 낮은 이자로 빌릴 수 있는 돈이 있었다. 이걸 내가 받아서 자신에게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거절했다. 당시 인정으로는 그러기가 쉬운 건 아니었다. 물론 돈은 빌리지도 빌려주지도 않고 살겠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다음해 다시 공부하러 가기로 확실히 결심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저리대출은 은행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는 했지만 ‘노비문서’라고 불릴 정도로 인생의 족쇄가 되는 것이었다.

나중에 은행을 그만두고 싶어도 빌린 돈이 남아있으면 함부로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생활안정자금 제도는 지금도 남아있기는 하다. 그러나 금리는 이제 실세금리로 바뀌었다.

1996년이면 회사채 금리가 15%도 넘나들 때다. 그런 시대에 1% 이자라면 무이자나 마찬가지였다. 무조건 받아서 정기예금에 넣어두면 오히려 돈을 벌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상당수 사람들이 이 돈을 받아서 주식에 투자했던 것이다. 한국의 주식시장은 1993년 한 때 반짝했을 뿐 1995년부터는 확실히 내리막길을 가고 있었다.

은행원의 특권이라는 2000만원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갚을 일만 남긴 채 열심히 은행을 다녀야하는 사람이 가득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절대로 국민들이 게을러서 벌어진 것이 아니다. 국가 엘리트들이 국가 관리에 실패해서 발생한 것이다. 그 죄를 무고한 국민들이 뒤집어쓰게 됐다.

무고한 국민들이긴 했지만, 잘난 분들의 과오를 뒤집어쓰게 되는 취약한 심성을 갖고 있었다.

돈에 관한 인정이다. 친구, 친척이 돈 얘기를 꺼내면 차마 이를 물리치지 못한다. 그러다가 끝내 문제가 발생한다. 빌려간 돈을 갚지 못해 의절하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 원수가 되고 만다.

이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 바로 보증이다.

돈을 빌려주기 곤란할테니 보증이나 서달라는 것이다. 듣고 보니 빌려달라는 얘기보다 더욱 뿌리치기 어렵다.

그래서 빌려주지 못할 망정 보증이라도 서줬더니, 어느 날 담당 부장이 호출한다. “당신 월급차압이 들어왔는데, 어쩐 영문이냐”고 물어본다. 보증을 서줬더니 그 빚을 못 갚아서 자신이 대신 갚게 생겼다. 안 갚으면 부도사범이 되는데, 구경도 못한 돈을 대신 갚으려니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런데 보증보다도 더 나쁜 것이 있다. 맞보증이다. 보증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풍토에 약간은 ‘기브 앤 테이크’가 가미된 것이다.

A은행에서 김 씨가 5000만원을 대출받으면서 이 씨가 보증을 선다. B은행에서는 이 씨가 5000만원 대출을 받고 김 씨가 보증을 선다.

친구 잘 둬서 두 사람 다 이자가 싼 은행 돈을 빌리게 된 것만 좋아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사람 모두 1억 원의 채무를 지게 됐다는 무서운 진실이 숨어있다.

무서운 진실이 현실화된 것은 1997년 ‘IMF 위기’의 발생으로부터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고금리처방을 받아들여 1997년 10월말 12.6%였던 회사채 금리는 그해 12월23일 31.11%까지 올라갔다. 개인의 대출 금리는 은행에서 제2금융권, 제3금융권, 사채로 갈수록 더욱 혹독해졌다.

내 빚만 갚으면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맞보증을 선 친구가 잠적을 해버려 그 빚까지 떠맡았는데, 이자가 돈을 빌려올 때보다 세배 네배로 늘어났다. 덩달아 잠적하든가, 죽기를 각오하고 두 사람 빚을 혼자 다 갚든가 뿐이었다.

한국 국민 가운데 90%는 IMF 위기 때 6촌 이내 도망간 사람이 있다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금융은 냉혹한 돈의 이야기다. 이것을 혈연 친분으로 대하려했던 한국인들의 취약한 심성은 위기를 더욱 키웠다.

한국 사람들은 지난해 그리스의 경제위기를 보면서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의 ‘벼랑 끝’ 협상을 조롱하기도 했다. 한국은 저런 뻔뻔한 태도와 달리 철저히 순종하는 태도로 위기를 빨리 벗어났다고 으쓱거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정말로 ‘IMF 위기’를 조기 극복했을까. IMF 때 사라지고 잠적한 사람들은 이제 모두 돌아왔느냐는 얘기다. 지금도 한국에는 1997년 한 번의 충격으로 살 맛을 잃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치프라스 총리의 협상은 뻔뻔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결단난 경제에 사람만은 살려야 겠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외국인들의 눈에 이상할지는 몰라도 그리스 국민들에게 연금은 지금 당장 함부로 끊을 수 없는 생명줄이었던 것이다. 치프라스는 그것만큼은 절대 사수하려던 것이다.

그리스 국민들의 연금에 해당하는 것이 1997년 한국 국민들에게는 은행 이자였다. 그리스와 달리 한국은 IMF의 고금리 요구를 덜컥 받아들였다. 제 나라의 국민들이 얼마나 취약한 금융심성을 갖고 있는지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았다.

심성이 취약한 국민에게 ‘원죄’가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 위기는 엘리트들의 실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기들이 저지른 국난이라면, 무고한 국민들을 지키는 일 만큼은 목숨 걸고 협상했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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