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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위기, 원인은 무엇이었나 (1)] 1997년 봄에 벌어진 일들
[IMF 위기, 원인은 무엇이었나 (1)] 1997년 봄에 벌어진 일들
  • 장경순 기자
  • 승인 2018.12.23 1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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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하이에나들에게 "한국, 지금 피 흘려요" 알리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 아프리카 물소는 초식동물이지만 사자를 공격해서 죽이기도 하는 무서운 동물이다. 그러나 이미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상태에서는 식욕에 가득찬 하이에나 무리를 물리칠 수 없다. 이 물소는 끝내 하이에나들에게 희생됐다. /사진=남아프리카공화국 크루거국립공원 유투브 동영상 화면캡쳐.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57] 무엇이 IMF 위기를 초래했나 (1)

2016년 초부터 연재하고 있는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는 아직 연재를 종료한 것이 아니다. 정기적인 연재는 2016년 한 해 동안 했지만, 그 후에도 새로운 취재나 공부를 하게 되면 그 때마다 간헐적으로라도 새로운 글을 추가하고 있다.

아직 1997년 외환위기, 즉 ‘IMF 위기’의 원인에 대해 종합 정리한 글을 쓰지 않았다. 사실 은행 딜링룸에 있던 일개 행원으로서 쓰기에는 너무나 벅찬 주제인 면도 있다.

그래도 이 글을 한 번 써본 적이 있다. 같은 내용의 시리즈를 10여 년 전, 다른 매체에서 짧게 연재할 때 시리즈의 마지막회로 썼었다. 한 번 벌인 일을 어떻게든 마무리는 해야 된다는 심정으로 썼는데, 뜻밖에 당시 포털의 대문에 걸려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해당기사: 정말로 김영삼이 IMF를 초래했을까. 이 언론사의 폐간으로 링크가 사라져 블로그에 옮겨둔 글로 대신한다.)

그런데 그 후에도 이에 대한 취재를 하다 보니 2007년 연재 당시에는 전혀 생각도 못했던 또 다른 중요한 이유를 깨달았다. 학계에 계시는 전문가의 분석을 새로 접하고 나서다.

‘IMF 위기’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새로이 공부를 해야 된다는 것을 깊게 인식한 계기다.

어떻든, 위기 당시 일개 행원으로 보초병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서 나중에 언론계에 들어와 더 많은 얘기들을 들은 것까지 종합해 내 나름으로는 위기 원인은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많은 분들의 보충 또는 지적이 절실하다는 점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2007년 원인 정리 때 썼던 방식 가운데 하나는 이번에도 그대로 적용하려 한다. 시간의 역순으로 원인을 짚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번의 글로 끝나지 않고 몇 번에 나눠 소개한다. 그리고 당국의 정책과 별개로 당시의 민간이나 금융풍토가 지녔던 취약점을 지적한다.
 

0. 1997년 11월. 위기는 돌이킬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사람을 살릴 기회는 아직 있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는 1997년 11월초, 한국의 당국자들이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장면을 통해 관객들에게 깊은 아쉬움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한국이 해외에 지급할 외화가 부족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 IMF 위기는 최소한 그해 여름 이전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됐다고 본다.

1997년 11월에 대해 단 하나 뼈아픈 아쉬움이 남는 것은 위기의 회피 자체가 아니다. 이미 국가 부도위기는 피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IMF와의 협상에서 고금리처방을 받아들인 것은 나라는 살리지만 사람은 죽게 만든 통한의 아쉬움이다. 이 나라 국민 90%는 6촌 이내 도망간 사람이 생겼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이것은 영화나 음모론자들이 얘기하는 것 같은 수탈적 해외자본의 농간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당시 한국 금융시장의 사정을 깊게 알지 못하는 해외 채권단의 요구를 한국인들은 당시 진행 중이던 대통령 선거의 이해과정 때문에 제대로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손발을 묶으면서 받아들였다. IMF가 사후에 일부 처방의 부적절함을 자성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왜 우리 사람이 죽을 것이 뻔한 일을 제대로 설명하고 막지 못했나라는 아쉬움이 더욱 깊어진다.

개인적으로, IMF위기가 사실상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은 1996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본다. 당시의 한국사회가 작동하는 정치, 경제, 사회, 여론구조의 방식에 비춰볼 때 위기는 이 때 이미 50% 이상 피하기 어려운 것이 됐을 것으로 생각한다. 혹자는 1995년 반도체 호황에 따른 수출 호조의 달콤함이 마지막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고도 하는데, 이런 논리의 가부를 판단하기는 내 학문으로는 무리다.

관련시리즈: [56회] 
 

1. 1997년 초여름. 기아자동차 부도위기와 삼성자동차 논란

IMF 위기와 관련해서는 기아자동차 부도위기보다 더 많이 알려진 것이 한보부도다. 한보그룹의 부도는 국회 청문회가 바로 열릴 정도로 정치권까지 뒤흔들었다.

그러나 국제금융계에서는 한보보다 기아의 경영난을 더 주목했다. 1980년대 이후 신흥재벌인 한보와 ‘한강의 기적’ 시대 재벌인 기아에 대한 평가가 달랐던 것이다. 말하자면, 기아와 한보에는 ‘기아마저...’라는 차이가 존재했던 것이다. 불신은 이제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의 재벌경제 전체로 확대됐다.

기아부도 위기와 떼놓을 수없는 것이 삼성 관련 논란이다. 자동차산업 진출을 오래 염원해왔던 삼성이 기아를 뒤흔들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사후에 뚜렷이 밝혀진 것은 없다.

삼성 측이 기아인수를 시사하는 보고서를 작성한 사실로 업계가 뒤숭숭한 가운데 3월 경제부총리로 취임한 사람은 삼성자동차 부산유치위원장을 지낸 강경식 부총리였다. 기아자동차 상태를 냉정히 경영적 측면에서만 평가하기 힘든 여론구조를 만들고 말았다. 사태 해결과는 동떨어진 ‘국민기업’이란 단어가 이 때 만들어졌다.

똑똑한 대책은 못 내놔도, 의심은 면할 처신을 했다면 조금은 더 낫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을 당시 정부가 거듭하고 있었다.

한보·기아 부도는 워낙 큰 뉴스여서 웬만한 사람이 다 아는 일이었다. 이와 달리, 이 때 외환시장에서는 지금도 아는 사람만 아는 대단히 치명적인 정책실수가 벌어졌다. 한보·기아 위기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날아온 강펀치라면, 이 정책실수는 소리도 없이 한국 경제에 이미 나 있는 상처를 사정없이 더 크게 열어젖혔다. 이미 피 흘리던 한국 경제는 과다 출혈에 따른 쇼크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관련시리즈: [48회]
 

2. 1997년 2월 치명적 실수. 선물환시장 개입

이 때 외환보유액은 지금같은 4000억 달러 규모가 아니었다. 겨우 300억 달러 안팎에 일부는 시중은행 지원에 쓰여 당장의 가용자원도 되지 못했다. 이 적은 규모로 1996년부터 수시로 하루에 1억, 3억 달러씩 시장개입을 했다.

당연히 외환보유액이 바닥나는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등장한 것이 선물환개입이다. 선물환달러를 사들이면서 현물환달러의 상대적 가격을 낮추려고 했다. 딜러들에게 자발적인 저가 현물환 매입 기회를 주려고 한 것이다. 1997년 2월11일의 일이다.

대단히 머리를 잘 쓴 대책 같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이날도 원화환율은 0.6 원 올랐다. 급등이 아니라 소폭 상승으로 막은 게 효과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수면 아래서 꿈틀거렸다. 한국의 외환당국이 ‘안하던 짓’을 했다는 신호가 국제 금융시장의 ‘하이에나’들에게 전달됐다. 이것은 ‘지금이 공격할 적기’라는 확신이 됐다.

외환보유액 고갈을 당국도 우려하고 있음을 드러내 보인 것이었다. 말하자면 초원의 모든 하이에나들에게 “나 지금 피 흘려요”라는 메시지를 보낸 셈이었다.

외환시장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이나 알고 있는 얘기다. 한보 청문회, 황장엽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의 한국 망명 등 굵직한 뉴스들이 쏟아지는 틈에서 이런 치명적 실수를 경고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관련시리즈: [44회]

다음 회는 1996년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58회] 1996년 노동법파동, 이미 IMF 위기와 무관한 딴전부리기였다

[56회] '국가부도의 날' 김혜수는 왜 태어나지 못했나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첫회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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